담을, 무엇

Jun 27, 2014 – Aug 29, 2014

김경범
김경범 작가는 유리 파우더를 조화시켜 투명과 불투명을 적절하게 사용하고 그 중심에 기포를 넣어 작품을 제작한다. 작가는 이러한 기법을 통해 유리만이 가진 투명, 반투명, 불 투명성을 하나의 작품 안에 자연스럽게 구성하여 공간감을 지닌 색다른 시각적 효과로 연출하였다. ‘당신과 함께 #2’는 불투명한 주병의 안쪽 면이 마치 투명한 바깥 층 위에 떠 있는 것과 같은 착시 현상을 일으키며 작가만의 특성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다. 여기에 바닥에서부터 이제 막 터져 올라온 듯한 기포들은 작품에 생동감을 더한다. 그는 남서울대학교에서 유리조형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국민대학교 유리 조형디자인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김정석
김정석 작가는 금속공예 및 유리공예와 조각을 전공하여 유리가 가진 질감과 색채를 살린 유리조형예술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추상적인 회화성은 장식적이면서도 동시에 모더니즘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그의 작품들 중 LED를 활용한 작품들은 과거의 유리조형작품이 가진 장식성과 빛의 투과성 등의 유리 특유의 성질을 놓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홍익대학교에서 금속공예를 전공하고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 대학원 유리과와 일리노이대학 대학원 조소과를 수료하였다. 현재 홍익대학교 도예, 유리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김준용
김준용 작가는 블로잉으로 제작한 유리의 표면을 다시 조각하고 연마하여 세밀함과 함께 육중한 유리 캐스트의 조형미를 드러내는 작품들을 선보인다. 작가는 특별한 기억 속에 파편처럼 존재하는 자연으로부터의 꽃 봉오리, 씨앗의 실루엣을 유리의 날카로운 선과 두께로 섬세하게 표현한다. 그는 다양한 색감과 유리의 시각적 무게감에서 우러나오는 신비스러움, 그리고 그 둘을 잇는 빛이라는 또 다른 매체를 통해 유리의 아름다움을 극대화 시키고 있다. 특히, 유리의 두께 차이를 이용해 색의 그라데이션을 표현해 내는 작가의 테크닉은 눈여겨볼 만하다. 그는 국민 대학교 공예미술학과와 미국 Rochester Institute of Technology 유리학과 석사를 마치고 현재 청주대학교 공예디자인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김영무
도자와 유리를 모두 다루는 김영무 작가는 작업실에서 직접 불어 만든 유리와 도자로 조명을 만든다. 간결하고 투명한 유리의 마감, 백자의 매력이 공존하는 그의 작품은 디자인 오브제로, 공예작품으로서 가치가 충분하다. 작가는 조명은 물론 식기에서부터 토기형상의 거대한 조형물 그리고 도자로 만든 의자 등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이러한 여러 작품들을 통해 오랜 동안 작업을 하면서 얻은 그 만의 내공을 엿 볼 수 있다. 현재 그는 조명에서 모티브를 얻은 형태와 흙의 종류를 달리하여 식기에 적용하는 등의 다양한 시도를 통해 작품세계를 확장하고 있다. 작가는 단국대학교에서 도예를 전공하고 남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유리조형을 수료하였다.


박선민
박선민은 ‘여성적 나르시시즘’을 주제로 여성의 욕망을 화려한 신발과 가방의 형태로 빗대어 유리로 작업을 하는 작가이다. 그녀는 이러한 작품 표현을 위해 몰드블로잉, 콜드워킹 등 유리의 다양한 기법들을 활용하여 섬세하고 까다로운 과정들을 거쳐 작품을 만든다. 작가는 작품에 사용된 화려한 꽃잎들을 컵이나 볼 등의 상품 등에 적용시켜 제작하는 등 작품 활동 이외에 다양한 상품개발을 통해 생활 자기로서의 유리공예가 가진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창원대학교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국민대학교 대학원에서 유리조형디자인을 수료하였다. 현재 한국도자재단 이천세라피아 창조공방의 입주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박선영
박선영 작가는 백자에 청색의 안료를 사용하여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 넣는다. 그녀의 작업은 꽃, 새, 나비 등을 그려 넣었던 청화백자의 정통기법을 기본으로 현대적인 꽃 패턴과 금박을 테두리에 두르는 등 무늬와 기법을 가미하고 재 해석하여 새롭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작가는 일반적으로 쉽게 접할 수 있는 형태를 갖추고 있는 접시, 볼, 컵 등에 밑 그림 없이 붓으로 정교하게 그림을 그려 넣는다. 이렇게 일일이 직접 그려진 꽃들은 소소하고 밋밋한 접시를 더욱 가치 있고 특별하게 만든다. 작가는 중앙대에서 조각을 전공하고 일본에서 도자를 공부하였다. 현재 프랑스 루브르 퐁피두 장식 박물관 뮤지업 샵 공예관에 작가의 작품들이 입점 될 예정이다. 


박성훈
박성훈 작가는 물성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컨트롤하는 블로잉 기법을 통해 유리라는 매체의 물성 탐구와 이를 시각적 아름다움으로 이끈다. 그는 유리를 매만지고 불고 갈아내는 고된 과정 속에서 조화와 대비, 통일과 변화, 비례와 균형, 리듬과 반복을 작품에 고스란히 담아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작가는 남서울대학교 환경조형학과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전문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박소연
박소연 작가는 기하학적 형태를 모티브로 감각적인 색감과 독특한 디자인에 두 가지 이상의 소지를 사용한 캐주얼 도자식기를 만든다. 그녀의 작업은 캐스팅 기법을 통해 얻어지는 일정하고 간결한 형태를 갖추고 독특한 질감에 원색을 적절히 가미하여 감각적인 디자인과 색감을 통해 이전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식기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한양여자 대학교에서 도자를 전공하고 국민대학교 디자인대학원에서 세라믹디자인을 수료하였다.


오유리
오유리 작가는 물레와 접합의 섬세한 손 작업이 요구되는 이중기 기법을 사용한다. 그녀의 이중기는 백자소지로 물레를 찬 두 기물의 습도를 맞추고, 어렵게 붙여, 조심스럽게 말리는 과정을 거친다. 이렇듯 일반적인 식기 작업보다 몇 배의 노고를 들여 힘든 작업을 고집하는 이유는 높이가 있는 그릇의 형태를 얻기 위함이다. 이러한 시각적인 높이 감이 주는 그릇을 통해 담기는 음식은 무대 위에 올라 온 것처럼 집중되는 효과를 주어 그릇은 물론 그릇이 담고 있는 음식에도 특별함을 부여한다. 그녀는 건국대학교에서 공예를 전공하고 현재 서울대학교 도예과 석사과정 중에 있다.


오혜린
오혜린 작가는 조각과 유리공예를 모두 다루며 두 분야에 경계 없이 작업을 한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 “je suis sur un petit nuage” (“작은 구름위에 있다”)는 프랑스어의 아주 행복할 때 쓰는 표현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든 작품으로 행복한 하루의 시작을 위해 아침에 손안에 작은 구름과 동물들이 함께 차나 주스를 마시면 좋겠다는 바램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작가는 현재 “나와 우주의 드라마” 라는 큰 테마를 가지고, 서사적인 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창문-문-산책-숲길-다리로 이어지는 은유와 상징의 이미지들을 채용해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있다. 국민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와 프랑스 CERFAV Verre Volume 를 수료하였다.


윤상혁
윤상혁 작가는 두 손에 의한 자극에 이리저리 반응하며 제 물성을 드러내는 흙의 성질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작가이다. 겹치는 과정에서 혹은 겹쳐진 흙덩어리를 늘리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흙들의 경계선이 우연적으로 변화한다. 동시에 도자 표면의 점, 선, 면은 작가의 의도에 의해 패턴이 만들어 진다. 이러한 우연적인 자연스러움과 필연에 의한 의도성의 조화로 만들어낸 도자 표면의 경계의 아름다운 조화가 윤상혁 작가 작품의 특징이다. 작가는 서울대학교에서 공예를 전공하였다.


이재경
이재경은 대부분의 작품이 블로잉으로 작업된 작품으로 이태리기법인 캐인, 인카르몽, 무리니 등을 이용해 작품을 만든다. 그 중 캐인 기법은 컬러의 색봉을 일일이 뽑아내어 평면으로 배열된 계산된 컬러와 사이즈를 원형으로 말아 불어내는 방법으로 장식적인 색색의 칼라를 일정한 방식으로 표현하여 비례와 색상배치 등을 작가가 의도한 바 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작업이다. 이재경 작가는 일본 타마미술대학교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친 뒤 홍익대 금속조형 디자인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한국도자재단 유리예술 감독 직을 맡고 있다.
 

한상현
한상현 작가는 화선지에 먹이 스민 듯한 동양적 추상 회화를 그릇에 담아낸다. 그는 주로 그릇의 바닥 면이나 안쪽에 안료를 사용한 마블링 기법으로 무늬를 그리는데, 안료가 물과 섞이기 전 찰나에 손목스냅을 이용하여 재빠르게 그릇에 낚아챈다. 우연의 효과와 작가의 감각만으로 그려지는 패턴은 동일하지 않아 오히려 특별하다. 두 번의 초벌과정과 재벌까지 총 3번에 걸쳐 1280도 고온 소성하여 굽기 때문에 휘거나 파손되는 경우가 많아 더욱 신경을 써야 하는 작업이지만 그로 인해 작가의 그릇은 더욱 견고하다. 경희 대학교 도예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EXHIBITION PAGE

윤회매, 차(茶)를 피우다

Feb 27, 2014 – Mar 28, 2014

茶忄音_輪廻梅
류병학 미술평론가


만약 2월 말에 활짝 핀 매화를 보고 싶으신 분들이나 방랑식객 산당 임지호의 자연식 건강 밥상을 받고 싶은 분들 그리고 다도(茶道)를 체험하고 싶은 분들 또한 테크노 바라춤을 보시고 싶은 분들께서는 2014년 2월 27일 평창동 가인갤러리를 방문하시기 바랍니다. 가인갤러리 기획전 <다음_윤회매(茶忄音_輪廻梅)>는 관객 여러분들에게 격(格) 있게 즐길 수 있는 장(場)을 마련합니다.


14세 소년, 절의 단청에 매혹되어 중이 되다.
“할아버지, 저 그림은 뭐예여?” 어린 소년이 손가락으로 대웅전 처마 쪽을 가리키며 큰 스님에게 물었다. 큰 스님 왈, “그것은 단청이라고 하지. 단청은 부처님이 거주하는 불국토의 세계를 구현하고자 장엄하고 아름답게 그림을 그려놓는 것이란다. 그런데 너는 몇 일 전에도 이곳에 온 것 같은데... 이름이 무엇이냐?” 소년이 대답한다. “저는 국민학교 5학년 김창덕입니다.” 큰 스님 왈, “부모님은 어디 계시니?” 소년이 대답한다. “혼자 왔습니다.” 큰 스님은 궁금한 나머지 소년에게 묻는다. “무슨 일로 이곳에 혼자 왔니?” 소년의 대답이다. “저 그림이 좋아서 보려고 왔습니다. 할아버지, 저 여기서 조금 더 놀다 가도 되지요?”
김창덕은 전라북도 남원에서 출생한다. 그의 집안은 그가 초등학교(초등학교) 4학년 때 인천으로 이사를 간다. 그가 13세 되는 해 불자인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인천 수도사를 방문한다. 그는 수도사 대웅전에 그려진 단청의 매력에 빠진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는 그 이후 3번이나 가출해 절을 찾았다. 단청을 보기 위해서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14세 때 탈속을 결정하고 4번째 가출을 시도한다. 결국 그의 부모는 그의 출가를 허락한다. 그는 부산 범어사에서 출가한다. 그는 2년 반 동안의 행자승 생활 끝에 계를 받았다. 그의 법명은 범성(梵性)이고, 예호는 정암(靜菴)이며, 오늘날 불리는 다음(茶忄音)은 환속하여 그가 스스로 작명한 호이다. 필자는 앞으로 김창덕을 ‘다음’으로 표기하고자 한다.
다음 왈, “당초에 절집의 황홀한 장엄에 끌려서 출가한 인연 때문인지 경전공부를 하면서도 자꾸 단청이나 탱화 등에 관심이 가더군요. 그래서 그림을 끄적거리고 물감을 칠해보고 하다가 은사님께 여러 차례 꾸중을 듣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림을 대할 때 피어오르는 말할 수 없는 환희심 때문에 몰래 한밤중에 일어나 붓을 들곤 했지요.”
그는 그림을 부산 범어사 승가대학 시절에 시작한다. 물론 그에게 그림을 가르쳐 줄 스승은 없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학승인 그는 자유롭게 그림 그릴 여건도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저녁 9시 방선죽비가 딱딱딱 울리면 잠시 자리에 들었다 슬며시 일어나 도서관으로 간다. 그는 도서관 구석에 자리를 잡고 종이를 펴서 선화(禪畵)를 그린다. 그는 그림에 빠져 어느새 새벽예불시간이 된다. 그렇게 그는 날밤을 부지기수로 샌다. 그런 열정 때문일까? 그는 그만의 독특한 선화의 세계를 그리게 된다.
아니다! 선화는 단지 열정만으로 그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화는 불교에서 스님들이 수행을 목적으로 그리는 그림이다. 따라서 그에게 선화 그리기는 일종의 ‘수행’인 셈이다. 하지만 그가 말했듯이 “당초에 절집의 황홀한 장엄에 끌려서 출가한 인연 때문인지 경전공부를 하면서도 자꾸 단청이나 탱화 등에 관심”을 갖었다는 점에서 수행이 ‘2%’ 부족한 선화를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테면 그는 단청의 황홀한 장엄에 매혹되어 화려한 오채(五彩)에 눈이 멀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그만의 독특한 선화의 세계를 구축하게 된 것일까?
다음은 범어사에서 다도(茶道)를 배웠다고 한다. 그는 범어사 승가대학 시절 다도를 배우기 전에 제사(祭祀)를 지내거나 신성(神聖)한 일을 할 때 목욕재계(沐浴齋戒)하는 것을 배웠다고 한다. 그는 오늘날에도 차를 준비하기 전이나 (테크노)바라춤을 추기 전 그리고 윤회매를 제작하기 전에 반드시 목욕재계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차를 마시는 것이나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 그에게 신성한 ‘수행’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그만의 독특한 선화의 세계를 구축하는데 다도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겠다.
차(茶)와 선(禪)이 같다는 뜻을 지닌 추사(金正喜)의 <명선(茗禪)>이라는 작품이 있다. 1815년 추사는 수락산 학림사(鶴林寺)에서 초의(草衣)와 만난다. 당시 그들은 30세 동갑내기였는데, 당시 인연으로 그들은 42년간 금란지교(金蘭之交)로 지낸다. 그들은 여러 점에서 달랐으나 예술과 다도에서만은 같은 뜻을 지녔다고 한다. 추사가 제주에 유배할 당시 초의는 손수 법제한 차를 세 차례나 보냈다. 그 이후에도 추사는 초의에게 차를 구하는 편지를 썼는데, 추사가 초의에게 차 값으로 써서 보낸 글씨가 바로 '명선'이다. 명선은 추사가 초의에게 선사한 호(號)이기도 하다. 차싹 명(茗)과 선(禪)으로 이루어진 명선은 차(茶)와 참선(禪)이 같다, 즉 차를 마시는 것은 자기 수양이라는 것을 뜻하는 셈이다.
찻잎 따기에서부터 달여서 마시기까지의 다사(茶事)는 몸과 마음을 수련하여 덕을 쌓는 행위와 같은 셈이다. 따라서 다음에게 차를 달여 마시는 것은 선화를 그리는 것과 같다. 그렇다! 다도와 선화는 다르지 않다. 특히 조선시대 다가들은 차를 마시면서 시를 읊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들으며, 청담을 나누는 취미를 즐겼다. 이제 다음은 다도를 토대로 그림에서 음악과 춤으로 확장한다. 왜냐하면 다도는 그림과 음악 그리고 춤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다음은 일종의 ‘종합예술가’로 등장하게 된다.


다음 왈, "그림도 음악도 춤도 수도이다.“
다음 왈, “어느날 절에서 스님들의 의식을 보고 있자니 가슴 가득 환희심이 일어나더군요. 소리와 춤, 악기 연주, 의식이 결합된 총체적인 예술인 범패(梵唄)였죠. 너무 좋아 혼자 흉내내고 다녔습니다.”
다음은 스님들의 소리에 감동한다. 그는 그 소리의 의미는 몰랐지만 소리에 담긴 신성함이 어린 다음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킨다. 다음은 소리와 춤, 악기 연주, 의식이 결합된 총체적 예술 ‘범패’에 빠져 흉내내기 시작한다. 이를 본 큰 스님이 그를 영산재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된 정지광 스님에게 소개시켜준다. 그의 나이 16세. 그는 서울 은평사의 정지광 스님 옆에서 수발하며 1983년부터 7년간 영산재(靈山齋)의 전과정을 배운다.
영산재는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었고,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영산재는 석가가 영취산에서 설법하던 영산회상(靈山會相)을 상징화한 의식절차로 영혼을 발심시키고, 그에 귀의하게 함으로써 극락왕생하게 한다는 뜻을 지닌다. 영산재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범패’라는 불교 음악과 ‘범무(梵舞)’라는 춤이다. 범패는 불교음악의 총칭으로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 즉 불가(佛歌)로 기독교의 찬송가에 해당한다. 범패는 하늘의 소리를 염불로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범패는 불심과 목청과 음악성을 아울러 갖춰야 배울 수 있다고 한다. 그만큼 오묘하고 어렵고 복잡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범패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뿐만 아니라 재능이 있어야만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자, 이번에는 불교의 무용이라고 할 수 있는 범무를 보자. 현재 전하는 범무의 유형은 나비춤과 바라춤 그리고 법고춤 또한 타주(打柱) 등 네 가지로 나뉜다. 나비춤이 불법을 상징하는 비구니의 춤이라면, 힘 있고 역동적인 비구의 바라춤은 불법을 수호한다는 의미의 춤이다. 그리고 법고춤은 세상의 축생(丑生)을 구제하기 위해 법고를 두드리며 추는 춤이고, 타주는 수행을 다짐한다는 의미를 상징하는 춤이다.
다음은 특히 바라춤에 능통했던 것 같다. 바라춤을 출 때 양손에 바라를 들고 춘다. 바라는 냄비 뚜껑(서양의 심벌즈)같이 생긴 두개의 얇고 둥근 놋쇠판으로 만들며, 놋쇠판 중앙의 불룩하게 솟은 부분에 구멍을 뚫고 끈을 꿰어 그것을 양손에 하나씩 잡고 서로 부딪쳐서 소리를 낸다. 따라서 바라춤은 양손에 바라를 들고 빠른 동작으로 전진후퇴 또는 회전을 하며 활달하게 추는 춤이다.
다음의 바라춤과 관련하여 회자되는 에피소드가 있다. 승려로 있다 환속한 황청원 시인의 부인이 다음에게 “바라춤을 보고 싶다”고 하자, 다음은 즉석에서 ‘바라 댄스’를 추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바라가 없어 다음은 큰 냄비뚜껑 두 개를 바라를 대신하여 사용했다고 한다. 다음이 1983년부터 7년간 영산재의 전과정을 끝낸 해인 1990년 다음은 미국 시카고 주립대 초청으로 선화(禪畵) 전시회를 열었고, 범패와 범무로 로스앤젤레스 포크페스티벌에 참여한다. 당시 미국 관객들은 다음의 선화와 바라춤에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다음의 선화와 퍼포먼스가 이 해외에서 주목받자 국내 언론들은 그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후 다음은 다양한 퍼포먼스(performance)에 초대된다. 1997년 광주 탑전갤러리에서 다음의 선화 전시회 오프닝 퍼포먼스는 화제가 되었다. 피아니스트 임동창 씨가 피아노 연주를 하면 다음이 선화를 그리며 바라춤을 추는 퍼포먼스가 그것이다. 당시 전시회 오프닝 음식도 화제가 되었는데, 접시가 아닌 기왓장에 올려놓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음식들이 세팅되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그 오프닝 음식을 준비해 준 요리가가 다름아닌 다음의 절친인 방랑식객 임지호다.


부처 대신 여자를 선택한 스님
1990년 미국 시카고 주립대 초청과 로스앤젤레스 포크페스티벌 참가 당시 다음은 미국에서 8개월간 머물렀다. 당시 다음이 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의 양손에는 음반이 가득 들려있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모은 음반이 3,000장에 달한다고 한다. 그가 소장하고 있는 음반은 국악부터에서부터 클래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는 음반을 사기위해 그가 좋아하는 ‘메로나’도 안 먹고, 염불 알바도 열심히 한다.
다음 왈, “어떤 음악을 듣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어떻게 듣는가가 중요합니다. 명곡이란 말은 주관적이지요. 기분에 따라 모든 음악을 다 듣습니다. 물론 뽕짝도 듣죠. 남인수가 부르는 애수의 소야곡 한 번 올려볼까요?”
1990년 중반 다음은 거처를 절이 아니라 민가로 옮긴다. 전남 담양의 독수정 근처의 황토벽으로 된 ‘훈향산방’에서 다음은 한동안 거처한다. 당시 다음의 거처를 방문했던 언론기자들이나 다음의 팬들은 목탁 대신 클래식을 들었다고 전한다. 그렇다! 그들은 음반과 오디오가 있는 스님의 방을 방문한 것이다. 더욱이 그의 법당에는 부처상이 아니라 정말 뼈밖에 남지 않은 ‘6년 고행상’의 사진이 벽면에 부착되어 있었다고 한다. 물론 그가 그린 선화도 설치되어 있었다.
다음 왈, “절집보다 편하고 자유로워 민가에서 지냅니다. 또 한 곳에 오래 있으면 아는 사람이 많아져 번거롭기 때문에 자주 거처를 옮기지요. 절집은 참선 수행을 절대 우선으로 여기므로 선화를 치거나 범채를 익히기에 불편한 점이 많습니다. 예술도 참선의 한 방편일텐데 우리 절집 풍속이 아직 거기까지 자유롭지 못한 것 같습니다. 태안사에서도 그랬고 개암사에서 그랬는데 참선은 않고 그림만 그린다고 대중공사에 붙여져 천배 참배를 한 적이 많습니다.”
당 필자, 우연한 기회에 선암사에 한 달간 거처한 적이 있다. 당시 선암사 큰 스님은 필자에게 아침공양 전 천배, 저녁공양 후 천배를 하도록 지시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필자는 큰 스님의 말을 따라 아침 저녁으로 천배를 하였다. 온몸은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하지만 천배를 하는 과정에서 몸은 힘들었지만 천배를 마치고 나면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만약 당신이 천배를 한다면 잡념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적어도 필자에게 최고의 수양 방법은 천배였다. 따라서 다음에게 천배 ‘참배’는 일종의 ‘참선’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다음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에게 그림과 음악 그리고 춤은 일종의 ‘수도’이다. 절에서 승려들이 참선을 하듯, 필자는 천배를 하고, 다음은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다음은 필자에게 “무릎 끓고 음악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승려들이 참선하듯 무릎을 끓고 음악을 듣는다? 다음 왈, “음악이 다른 형태로 다가옵니다. 참된 말도 말 적을 때 나오는 것처럼, 마음의 준비와 자세에 따라 음악이 달라집니다.” 이것이 바로 다음의 태도다. 이를테면 수도하는 자세로 작업하는 것이 아티스트의 태도라고 말이다.
다음 왈, “저는 모든 것이 서로 만나고 나누는 데서 조화가 빚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종교도 만나고 음악도 만나고 고대와 현대도 만나고 종파나 문중도 만나고 말이죠. 특히 종교인이 만나야 합니다. 종교가 없었더라면 사람들이 서로 더 잘 사랑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종교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이별을 하는 것이 현실이지 않습니까? 성자의 빛은 무작위로 비치는 빛입니다. 우리 식으로 빛을 생각하고 재단해선 안 돼죠.”
다음은 거처를 절에서 민가로 옮기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물론 그는 부처를 만나고 여자도 만난다. 어느날 여자들이 그에게 설법을 듣기위해 찾아온다. 그가 설법을 하는데 유난히 한 여자가 그를 장시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음은 절의 단청과 범패와 범무에 매혹된 것처럼 그녀에게 빠진다. 그래서 다음은 그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 수소문하여 결국 그녀와 재회한다. 그들은 6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연애를 한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종교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생이별을 할 것인지 아니면 20여년 동안 생활해오던 승려의 신분을 내려놓을 것인지 고민한다. 결국 그는 부처가 아니라 사랑을 선택한다. 그는 이제 스님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와 두 명의 아들과 함께 생활하는 한 가정의 아버지이다.


다음, 이덕무(윤회매)를 만나다
필자는 작년 4월 초 광주시 남구 양림동에 위치한 이장우 고택에서 지인의 소개로 다음을 처음 만났다. 이장우 고택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전통가옥으로 광주 민속자료 1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고택은 1899년 정병호가 안채와 대문간을 건축하였고, 1959년 이장우가 매입한 후 사랑채와 행랑채, 곳간채까지 완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고택 주인인 이장우는 광주에 소재한 동신대학교 총장이다. 그 이장우 고택 별채에서 김황식 국무총리가 고시공부를 했다고 한다. 다음은 2010년부터 이장우 고택의 사랑채를 다실로 사용하고 있다. 그는 그곳을 시은처(市隱處), 즉 ‘도시 가운데 은신처’라고 불렀다.
다음 왈, “다인은 차를 마시는 동시에 색과 향을 감상해요. 차를 처음 즐기거나 배우는 사람은 일단 백자부터 시작합니다. 하얀 잔에 담겨야 우러난 차의 색깔을 구별하기 쉽기 때문이죠. 그러다 점점 차에 빠져들게 되면 분청사기같이 색이 있는 다완을 사용해요. 특히 그 정점을 흑자로 보는데, 말차의 진 연두색이 흑자에 담기면 대비를 이루어 연두색이 더욱 선명하고 아름답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말차와 다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뜨거운 물이 담긴 다완에 말차가루를 넣어 솔을 가지고 빠른 손놀림으로 말차를 만든다. 그는 백색 다완에 고운 거품이 있는 밝은 청록색의 말차를 필자 앞에 건내면서 “녹차라떼는 오래 전부터 만들어진 것이죠”라고 말한다. 필자는 두 손으로 다완을 잡고 베토벤의 <후기 현악 4중주곡>을 들으면서 말차를 음미한다.
다음 왈, “모노 녹음이지만, 그런 만큼의 옛 정취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현악 4중주곡을 들을 땐 비올라와 제2바이올린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편입니다. 그 어울림이 참 좋은 음반이죠. 명상해 보면 맑은 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사랑방의 벽에는 ‘매화 그림’이 걸려있고, 고가구 위에는 매화가지에 꽃들이 활짝 핀 홍매가 화병에 꽂아있다. 사랑방의 열려진 문 사이로 정원의 한 켠에 홍매가 보인다. “화병에 꽃아있는 홍매가 정원에 핀 홍매를 꺾어 놓은 것인가요?” 필자의 질문에 다음은 “아닙니다. 저 화병에 있는 것은 ‘윤회매’입니다.” 윤회매?
다음 왈, “벌이 꽃가루를 채집해 꿀을 만들고, 그 꿀에서 밀립이 생기고, 그 밀랍이 다시 매화가 되니, 이 모든 것이 돌고 도는 윤회와 같다는 의미에서 윤회매라고 합니다. 조선 정조 때 북학파 실학자로서 규장각 검사관과 적성현감을 지내신 이덕무 선생께서 17세에 밀랍화인 윤회매를 창제하셨지요. 차에 관한 시도 여러 편 있으며, 차를 좋아하셔서 찻자리에 놓고 감상하기 위해 만드신 것이죠.”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라는 그림이 있다. 그것은 옛 선비들이 동짓날부터 81일이 지나면 매화가 피는 날이라 하여 하얀 종이에 먹선으로 매화 여든 한 송이를 그려 놓고 매일 한 송이씩 붉은 색을 칠해 완성한 그림을 말한다. 그렇게 홍매화를 피워 내다 82일째 되는 날 창문을 열면 실재 붉은 매화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매화를 기다리는 마음을 담아 즐긴 놀이인 셈이다.
다음 왈, “고려시대엔 차를 마실 때 향을 피우고 차를 맞이했어요. 다반엔 조그만 화병이 놓여 있었고요. 거기에 꽃을 한 송이 꽂는 거예요. 차와 꽃과 향이 함께 하는 것이죠. 생화를 꽂았지만 종이로 만든 가화를 꽂기도 했지요.”
다음은 윤회매가 차(茶) 문화의 소산이라고 말한다. 그는 차 문헌을 살펴보다가 윤회매를 알게 되었단다. 하지만 윤회매 제작 방법을 소상이 밝힌 이덕무 선생의 ‘윤회매 십전’ 문헌이 실려 있는 이덕무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원본은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 동아시아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어 한글 번역서를 참조했단다. 삼성출판사에서 발행한 ‘궁중채화(宮中綵花)’ 기능보유자 황수로의 <한국 꽃 예술문화사>가 그것이다. 궁중채화? 그것은 궁중의 연희나 의례 등에 사용된 비단 꽃을 말한다. 조선 시대 궁에는 꽃들이 주위에 널려 있었지만 생명을 존중하는 의미로 살아 있는 꽃을 꺾어 실내를 꾸미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선조의 생명 존중 사상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다음은 1996년 황수로의 저서에 실린 <윤회매 십전>를 읽고, 1998년 첫 윤회매를 제작한다. 다음의 윤회매는 천연 밀랍으로 만든 매화꽃으로 청매, 백매, 홍매 등 다양하다. 그가 탄생시키는 윤회매의 재료들(천연 밀랍, 천연 색소, 노루털 그리고 나뭇가지 등)은 모두 천연 재료이다. 물론 윤회매에 사용되는 천연재료들을 구하기는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은 천연재료들을 여러 루트를 통해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림으로 존재하는 윤회매 제작 도구들을 똑같이 재현해 사용하는 것은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현대적인 개념의 윤회매 도구들을 직접 개발한다.
다음은 독일 출신의 번역가이자 ‘꿀초’ 제작자인 빈도림에게서 천연 밀랍을 구해 윤회매를 만든다. 제대로 만든 한봉밀랍은 그 빛깔이 누렇다. 그는 한봉밀랍을 써서 섭씨 75도의 불에 녹여 액체가 되면 ‘매화골’이라는 도구 끝에 묻혀 찬물에 식힌 뒤 손으로 떼어낸다. 그러면 투명한 매화잎이 완성된다. 꽃은 붉은색을 내는 안료를 이용해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다. 꽃술은 노루털을 쓴다. 이렇게 만든 매화잎과 꽃술은, 꽃받침 등을 밀랍땜질로 나뭇가지에 붙이면 완성이다. 아니다! 윤회매를 담아주는 그릇이 남았다. 다음은 윤회매와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는 도자기를 찾는다.
필자의 윤회매 제작 과정 서술은 간략하기 그지없다. 밀랍은 온도에 매우 민감하다. 윤회매를 서늘한 곳에 두면 바스라진다. 따라서 적당한 온기가 필요하다. 그는 작업할 때 참숯을 사용한다. 다음의 말에 의하면 윤회매의 꽃잎을 만드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한다. 왜냐하면 정교한 손놀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밀랍으로 제작된 작은 크기의 매화잎과 꽃받침을 보면 다음의 섬세함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더욱이 노루털로 수십개의 꽃술을 꽂는 다음의 모습을 상상하자면 섬세함의 극치를 느끼게 만든다. 물론 그는 1998년 문헌 기록에만 의지하며 첫 윤회매 작업을 하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2004년 윤회매 15점을 처음으로 전시한다.
다음 왈, “이덕무 선생님이 제 마음 속에 늘 함께 있고요. 그 분의 글에는 정신이 있기 때문에 문헌을 보고 윤회매를 재현한 것입니다. 옛 분들의 정신을 내 삶에 놓치지 않는다면, 그 분들의 정신이나 사상, 문예 쪽으로 뛰어났던 그분들의 모습들을 (윤회매를 통해) 이 시간에 같은 풍류로서 호흡할 수 있는 것이죠. 이덕무 선생 같은 고결하고 격 있게 사셨던 선인들의 삶처럼 우리 모습도 그렇게 닮아가지 않을까 하는 꿈을 꾸는 것입니다. 윤회매를 만드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이덕무의 ‘윤회매 십전’을 따라 제작하는 것이 다음의 목표가 아니다. 그는 윤회매를 만드는 선인(이덕무)의 정신까지 되살리고자 한다. 그렇다면 이덕무의 정신이란 무엇일까? 이덕무는 서얼(庶孼) 출신으로 빈한한 환경에서 자란다. 그는 가난한 환경 탓에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오직 책 읽는 일을 천명으로 여겼다고 한다. 가난하여 책을 살 형편이 되지 않았지만, 수만 권의 책을 빌려서 읽고 또 수백 권을 책을 베꼈다. 이덕무 스스로 자신을 ‘책만 아는 바보’라고 하여 <간서치전(看書痴傳)>을 지었다. 그는 귀한 책을 구하면 집 안이 떠나가라 웃었다고 한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는 단순하게 책을 읽지 않았다. 그는 다섯 번씩 읽어 정독하려고 했다. 그리고 정독한 뒤에는 반드시 느낀 점을 기록했다고 한다.
이덕무의 저술총서이자 조선후기 백과전서라 할 수 있는 <청장관전서>를 보면 사실(史實)에 대한 고증부터 역사와 지리, 초목과 곤충에 이르기까지 그의 지적 편력은 실로 방대하고 다양하여 고증과 박학의 대가로 인정받는다. 필자가 만나 본 다음 역시 박학다식(博學多識)하다. 그는 마치 ‘책만 읽는 바보’처럼 수많은 서적을 읽고 자신만의 논리로 소화해 낸다. 더욱이 그가 어떤 특정 사항을 언급할 때는 출처와 연도까지 정확히 밝히는데 할 말을 잊게 만든다. 그러니 그의 달변(설법)을 듣고 감탄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다음 왈, “매화가 다 그렇지만 암향이라고 해서 향이 겉으로 화려하게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안쪽에 숨어있듯이 향도 안으로 숨어 있다는 것이죠. 우리 삶도 깊어지면 벼가 고개를 숙이듯이 우리가 인격적으로 성숙되고 뭔가 완성이 된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윤회매의 시각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이덕무 선생이 첫 윤회매를 만들었던 그 마음을 떠올리면서 다른 각도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죠. 이덕무 선생이 매화가 지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움에도 그렇겠지만 밀랍으로 만들어 윤회매라 이름 붙인 것도 우리 삶을 한번 돌이켜 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런 의미로 보면 화려한 꽃 이면에 우리 삶도 비춰볼 수 있는 소중한 계기가 될 수 있다면 하나하나씩 피우는 윤회매 작업이 많은 시간이 걸리기도 하지만 어느 하나 소홀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죠.”
작년 말 필자와 가인갤러리 안미진 큐레이터는 다음의 집에 초대받는다. 광주 시내 부근에 위치한 그의 집은 낡은 한옥이다. 그의 가족은 조선시대 이덕무처럼 청빈한 생활을 하고 있다. 물론 그 청빈생활은 그가 선택한 것이다. 정조가 “가난이 선비의 재산”이라고 말했듯이, 다음은 청빈을 아티스트의 재산으로 삼는다. 그렇다면 다음의 가족은 어떨까? 다음이 부처를 포기하고 선택한 부인은 마치 청빈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부귀를 포기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밝고 맑은 다음 부부에게 청빈은 마치 암향처럼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성품이 깨끗하고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을 뿐이지 결코 가난하지 않다. 왜냐하면 삶의 질을 높여지게 하는 것은 부귀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음은 공덕(功德)을 쌓는 것이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덕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연기(緣起)와 윤회를 근본으로 하는 불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행위의 하나이다. 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가 모두 공덕이 된다. (물론 불교에서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다.) 하지만 공덕은 결과보다 그것을 쌓고 닦아 가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
수행자로서 오랜 세월 자기 자신을 닦아온 다음은 선화와 음악 그리고 춤과 윤회매를 통해 공덕을 쌓는다. 왜냐하면 그에게 예술은 티 없이 가꿔온 수행자의 고결한 삶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베어 나오는 수행의 표현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음이 윤회매를 동시대에 맞게 복원하여 일반 대중에게 널리 보여주는 것은 일종의 ‘수행 공덕’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 까닭일까, 다음이 제작한 윤회매의 자태를 보면 청빈 속에 살아가는 깐깐한 선비의 기개마저 느껴진다. 그의 윤회매를 보면 고인(이덕무)에 대한 지극 정성의 마음과 사무침이 느껴진다. 그러니 감동먹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격(格) 있는 놀이
다음 왈, “벗이 4가지가 있는데요. 첫째는 차를 만나는 것이고요. 그리고 명상음악이든 클래식이든 잘 선택하면 음악도 좋은 벗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림 그리는 것이나 윤회매를 만드는 것 (차와 음악, 그림, 윤회매가) 저의 평생의 벗입니다. 그런데 제가 윤회매를 만들고 전시하고 공연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윤회매를 부각하는 것은 이덕무 선생이라는 인물에 대한 부각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국만리에 있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가 돌아오는 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아직 윤회매가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찻자리에 일품의 격이라는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추구했던 정신성이 윤회매에 함축되어 있다면 우리가 다시 문화로서 삶에 대한 깊이를 위해 윤회매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더불어 자기 시간과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차문화가 발전이 된다면 우리 삶이 훨씬 더 향기로운 삶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음은 범패와 범무를 동시대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듯이 동시대적 어법으로 다양하게 윤회매를 부각하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작년 10월 광주국제미디어아트 페스티벌에서 선보인 다음의 <도산의 달밤에 매화를 읊다(陶山月夜詠梅)>는 음악과 윤회매의 그림자놀이 그리고 바라춤을 접목시킨 퍼포먼스이다. 특히 윤회매의 그림자놀이는 다산 정약용의 ‘그림자놀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적어도 필자의 눈에 보였다. 달밤에 조명을 받은 윤회매가 집채만한 크기가 되었다가 손바닥만 하게 작아지기도 하듯이, 조명을 통해 윤회매의 그림자를 만든 영상은 마치 한 폭의 수묵화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다음은 매화를 지극히 사랑하였던 옛 선비들의 정신세계를 미디어아트 퍼포먼스로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닌가?
다음 왈, “한자로 차 다자가 풀초자 사람인 나무목 입니다. 풀과 나무 사이에 사람이 있지요. 우리 모두는 자연에서 왔다 본래 모습인 자연으로 회귀하는 존재입니다. 차를 만나는 것은 자연을 닮아가고 그 가운데 생각이 쉬어짐에 자기 자신을 만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거기에 일품의 격으로 매화인 윤회매는 더욱 잘 어울리는 찻자리 벗인 다화가 되는 것이죠. 제 생활에서 차향이나 윤회매 격처럼 향기가 났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다음은 18세기를 살다간 선인의 차 문화와 윤회매에 담긴 사상을 200여 년 후인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진정한 풍류를 “격(格) 있게 노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 김창덕이 다음(茶忄音)이란 호를 즐겨 쓰는지 아시겠죠? 격 있게 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차와 음악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그런데 다음은 차와 음악 사이에 마음(心)을 삽입했다. 말하자면 “마음을 다해 차와 음악을 만나면 몸과 마음에 평화로움이 깃든다”고 말이다.
이런 단편적인 정보는 다음의 그림과 윤회매 그리고 춤은 바로 마음을 다해 만나는 차와 음악의 기반 위에서 꽃피울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를테면 맛(陰陽)을 알아야 멋(五行)을 드러낼 수 있다고 말이다. 맛을 모르는 멋은 일종의 댄디즘(dandyism), 즉 깊이를 고려하지 않고 단지 세련된 멋(치장)을 고려함으로써 대중에게 과시하는 겉멋(태도)일 뿐이다. 깊이 있는 맛과 멋을 즐길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격이 있는 놀이가 아닐까요? 여러분, 다음의 윤회매와 함께 격 있게 놀아 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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