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ia Chang

The Reason is You

Nov 18, 2013 – Dec 27, 2013

몸에 새겨진 고통과 쾌락의 기호
글. 이선영 I 미술평론

지난 10 여 년간 장지아의 작품을 단순한 전시회가 아닌 돌발적 사건처럼 접해왔는데, 이번 전시의 면모는 일견 차분하다. 그동안 장지아의 작품은 엄청나게 ‘세다’는 선입견 아닌 선입견을 가지게 된 필자는 이번에는 또 어떤 일을 저질렀을까 하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전시에 가보니 심플한 좌대 위를 이불 또는 탁자보처럼 덮은 통가죽, 붉은 벽돌, 낡은 수술기구 등이 전부여서 썰렁한 기운마저 돌았다. 서서 오줌 누는 여자(2007년 ‘omerta;침묵의 계율’ 전, 대안공간 루프)나 가학 피학적인 행위가 등장하는 이전의 작품(2004년 ‘where is the center of gravity’전, 아트선재-서울아트시네마, 2011년 ‘I confess’전, 정미소)에 비해 선정적인 면은 없지만, 물질의 형태로 그 강도와 섬세함을 보존한다. 작품을 만들기 위해 통과했을 고통과 열락의 시간은 차갑게 물질화된 채로 해동을 기다린다. 장지아의 작품은 강렬하지만 억지스럽지 않고, 예술적 승화에 연연하지 않지만 그가 구사하는 언어는 정교하다. 유기체 특유의 항상성을 죽어서도 유지하면서 그 표면에 이미지를 새기는 것에 강한 저항을 보여주는 가죽, 피나 피 같은 붉은 색을 칠한 것이 아니라 피 자체를 머금고 있는 것 같은 기이한 사물들, 이국의 벼룩시장에서 발견한 물건에 색다른 사물의 질서를 부여한 언어적 상상력 등이 그러하다. 필자가 작가를 접해 본 경험으로 보자면, 장지아의 작품의 세기는 유별난 엽기 취향이 아니라, 인간적 천진함과 작업에 대한 집요한 성실성에서 오는 것 같다. 천진함과 성실함이 결합되면 두려울 게 없다. 요컨대 앞뒤를 계산하지 않고 끝까지 가보려는 맹목적 자세는 자신도 모르게 금기들에 접근하게 한다.
장지아의 전시들의 부산물이었던 선정성은 금기와 그 위반의 게임과 관련된다. 여기에서 몸은 금기의 한 가운데에 있다. 몸은 정상과 이상이 판별되는 가장 근본적인 경계이다. 몸이라는 가장 민감한 경계의 위반은 자잘한 상처로부터 죽음에 이르는 진폭을 가진다. 그러나 어떤 한계를 돌파하는 것은 고통과 죽음 뿐 아니라, 열락과 초월도 가져온다. 그것은 비천함과 숭고를 오고간다. 금기를 위반하는 폭력을 성스러움으로 간주하는 위반의 철학자들은 예술을 종교의 후예로 자리매김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금기와 그 위반이라는 사건이 어둡고 쇠락한 기운으로만 가득하다면 우리는 그것에 그렇게 매혹되지 않을 것이다. 금기라는 한계를 넘어 절대를 향해 질주하려는 본능은 그 분출구를 찾는데, 장지아의 작품에 꾸준히 등장해 온 몸은 그 전쟁터가 된다. 가죽과 피, 그리고 금속 용구 같은 소재가 등장하는 이번 전시에서 몸은 부재하면서도 현존한다. 날카로운 금속은 내장과 살을 보호하는 피부를 뚫고 붉은 체액을 바깥으로 유출시킬 것이다. 화공약품과 살지지는 냄새를 맡으면서 가죽위에 인두질 드로잉을 하는 행위, 도대체 저것들로 무슨 수술을 했을까 싶은 야릇한 금속 도구들은 유기체의 고통과 죽음을 연상시키지만, 그 결과물은 시각적 쾌감을 주는 예술작품이자 치유이다. 금속과 살의 접합은 사도매저키즘같은 일탈적인 성적 관행에서, 일상적으로는 피어싱이나 문신 같은 하위문화의 장식에서 유희적, 쾌락적으로 등장한다. 장지아의 작품에서 고통과 쾌락이 교차하는 지점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이 전시를 계기로 장지아론을 집필한 류병학이 말하듯이 ‘누군가의 고통은 누군가의 쾌락’이다.
소한마리의 가죽이 통째로 등장하는 작품 위에 새겨진 것은 한 무리의 젊은 작가들이 중국 오지를 돌아다니는 한가로운 풍경이다. 예술작품을 비롯한 인간의 어떤 필요를 위해 벗겨진 피부 위에는 이국적 문화와 자연을 즐기는 인간들이 그림지도처럼 새겨져 있다. 작가는 중국의 운남 지역에서 고택의 처마 밑에 살 껍질을 벗겨진 채 통째로 매달린 인체 크기의 고깃덩어리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보존된 이 단백질 공급원은 가축의 도살이나 가공이 금지된 곳에서 행해지는 현대적 방식과는 낯설다. 고즈녘한 동양적 풍경과 중첩된 거대한 고깃덩어리는 은폐된 삶의 진실을 불현 듯 드러낸다. 삶을 위해 희생된 유기체의 고통은 작업의 고통으로 이어진다. 큰 작품의 경우 인두로 한땀한땀 수를 놓듯이 하루 10시간 넘게 꼬박 3개월을 바쳤다. 부담 없는 드로잉 같지만, 거의 조각에 가까운 작업이다. 살타는 냄새가 진동하는 인두질 작업은 울룩불룩 우는 가죽만큼이나 작가의 손발을 오그라들게 했을 것이다. 작업 과정은 그 자체로 고통스러운 각인의 방식을 연상시킨다. 그것은 기억과 고통의 인과 관계를 다룬다. 위반의 철학자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어떻게 해서 인간이라는 동물에게 기억이 심어질 수 있을까를 묻는다. 그에 의하면 어떤 것이 기억에 남으려면 그것은 달구어져야 한다. 부단히 고통을 주는 것만이 기억에 남는다. 니체는 인간에게 기억을 새겨야 할 필요가 있을 때 피와 고문, 그리고 희생 없이는 불가능함을 강조한다. 모든 종교적 의례의 가장 잔인한 절차는 고통이야말로 기억술에 가장 도움이 된다는 점을 이용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억의 덕택으로 사람들은 마침내 이성에 도달했다.
이러한 니체의 음울한 결론은 인간의 이성이 신의 가호나 계몽화 된 개인들 간의 사회계약이 아니라, 수많은 피와 잔혹의 결과임을 알려준다. 헤이든 화이트는 [19세기의 역사적 상상력]에서 니체의 역사관이 미래의 세계를 지배할 운명에 있는 강자와 약자로 구분된 세계임을 밝힌다. 헤이든 화이트의 니체에 대한 독법에 의하면, 타자에게 권력을 행사하는데서 오는 즐거움은 가학적인데, 부유해진 사회는 가학적 쾌락을 교환가치를 지닌 상품으로 전환시켰다. 주어진 것이든 받아들인 것이든 고통은 비축되고 입안되고 과세되고 국가화 되고 사회화할 수 있게 된다. 요컨대 고통이 자본화된다. 모든 자본화된 현실에는 고통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는 삶이란 그 근본기능에 있어서 침해, 공격, 착취, 파괴를 통해서 움직이는 것이며, 항상 다수의 약한 권력을 희생시킴으로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민주주의와 이성, 역사와 진보에 대항하여 권력에의 의지를 주장하는 니체의 사상은 반동적이고 퇴폐적이라고 낙인찍혔지만, 인간의 삶에 그러한 어두운 구석이 있음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평소에 동물실험이나 학대 등에 열렬히 반대하는 장지아가 절대 그러한 불온한 사상에 물들어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약육강식에 기반 하는 정글 같은 이 자본주의 사회가 니체주의적이라는 현실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근대적 진보가 의심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가장 먼저 복권된 철학자가 니체였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야생적 현실을 오성이나 이성의 매개 없이 날것으로 표현하려는 이들에게 니체의 울림은 거대하다. 타자의 희생이 암시된 의례적 요소, 그것이 암시하는 폭력과 성스러움, 고통과 쾌락의 동시적인 분출은 초창기 작품부터 지금까지 면면히 흐른다.
다른 가죽 작업에는 피눈물을 흘리는 자화상, 가혹한 예술노동에 시달렸을 손, 누군가의 섭식의 대상이 된 유기체, ‘죽지 않고 살아남기’에 대한 작가 나름의 해법과 강령, 해골끼리 혀를 교환하는 장면 등이 보인다. 이미지들은 마치 꿈이나 무의식처럼 뚜렷한 인과관계 없이 띄엄띄엄 새겨져 있지만, 그것들은 재료의 강한 저항을 이겨낸 가혹한 산물이며 그 모두 인간의 삶을 울고 웃게 하는 사랑, 죽음, 광기, 예술, 욕망과 밀접한 도상이다. 그것들은 살과 피를 연상시키는 재료와 하나가 된다. 그러나 장지아는 이러한 비합리적이고 무거운 주제를 그만의 방식으로 경감시킨다. 작가는 가벼움에서 무거움을, 무거움에서 가벼움을 길어 올린다. [아름다운 도구 시리즈]는 북경의 벼룩 시장에서 발견한 물건이다. 기능적 물건에 새겨진 장식은 유물 같은 면모를 드러낸다. 외과용 수술 도구에 작가가 멋대로 붙인 해설은 수상쩍은 치료보다는 고문에 방점이 찍혀있다. 그것은 2011년 ‘I confess’ 전에 나온 가학피학적인 도구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소한마리를 도축하여 받은 피로 거칠게 만든 벽돌이나 아이가 대충 만든 듯한 어수룩한 사물들은 바로 이렇게 생긴 작품을 만들기 위한 그 모든 피비린내 나는 노력을 가벼운 농담처럼 만든다. 살아있는 피를 그대로 머금고 있는 사물-예술은 기괴하다. 원래 소피는 석고랑 만나면 분홍이 아니라 회색으로, 산소와 만나면 검붉게 변한다. 정육점에 진열된 붉은 살코기는 살이 아니라 피의 색이다. 고기는 실은 피의 맛이다. 전시 오프닝 날 붉은 색 일색으로 나온 음식물은 오감에 호소해온 장지아 작업의 스타일을 알려주는 에피소드이다. 소소한 형태로 만들어진 사물엔 희생된 생명의 기운이 담겨있다. 이 작업을 할 당시 작가는 피를 쏟으며 탈진한 상태였지만, 그 시기에 그 작업을 해야 할 필연성이 있었기에 작업은 냉혹하게 진행되었다. 그 순간에 자신만이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바로 그 필연성이 예술 및 예술가를 잔혹한 운명에 몰아넣는다. 


Text. Lee Sun-young I Art Critic
Translation. Jawoon Kim

My experience of Jia Chang’s work for the last decade or so can be characterized not as a mere viewing of art exhibitions but as coming upon some kind of unexpected accidents. Yet this show is at a glance of calmness. I had had some sort of preconceptions about Chang’s work that ‘extremely intense and provocative’ were the appropriate adjectives to describe her work. Hence I was quite curious about what the artist would have done this time . In actuality, however, my first impression of the show was that it was relatively plain and flat since it consisted only of sheets of animal skin covering simple pedestals like comforters or tablecloths, red bricks and worn-out surgical instruments. Compared to Standing Up Peeing(Omerta: Commandment of Silence, 2007, Alt Space Loop) or other previous works in which sadomasochistic actions were expressed (Where Is the Center of Gravity, 2004, Art Sonje-Seoul Art Cinema; I Confess, 2011, Gallery Jungmiso), her works shown at this exhibition maintain as much intensity and delicateness in the form of material despite it lacks the provocativeness. Hours of pain and ecstasy, which the artist went through during the production of the works, have undergone icy materialization and are now waiting to be thawed. Chang’s works are intense, yet not stubborn. They concern little with artistic sublimation, yet her creative language is quite elaborate: the animal skin seems to continue to maintain such homeostasis unique to organisms even in death and its surface harbors strong antagonism against being inscribed with some images; bizarre objects that seem to be wet with blood itself, not be painted with blood or bloody red pigments; her linguistic imagination through which artifacts found at flea markets in foreign countries are endowed with unfamiliar orders. According to my experience with the artist’s personality, the intensity of Chang’s art seems to originate not from some peculiar abject taste but from her innocent mind and tenacious devotion to her artistic work. Nothing beats the marriage between innocence and sincerity. In short, a blind attitude to go all the way without reflecting on the circumstances tends to arrive at the door of taboos.
The element of provocativeness, which had been the byproduct of Chang’s exhibitions, is related to the game of violating taboos. Here the body is in the crux of the taboo. The body is the most fundamental boundary that demarcates the line between normal and abnormal. The breaking of the most sensitive boundary of the body results in a broad spectrum of outcomes from a minor trivial injury to death. But breaking through a certain limitation brings about not only pain and death but ecstasy and transcendence as well. It fluctuates between lowliness and sublimity. The philosophers of violation, who regard taboos and the violence of violating them as sacred, do not hesitate to establish art as the offspring of religion. But if taboos and the incidents of breaking them are thought as only dark and dreary entities, one is unlikely to be fascinated by them. The instinct to transcend the limitations of taboos to seek after the absolute finds its outlet, and the body, which has constantly appeared in the work of Chang becomes its battleground. In this exhibition where the works use the materials such as leather, blood and metal equipments, the body is both absent and present. Sharp metal objects will penetrate the skin, which protect internal organs and flesh, to discharge red bodily fluids. One is reminded of the pain and death of an organism by the act of drawing on the surface of leather with a hot iron while being exposed to the stenches of chemicals and burning flesh and by the unfamiliar metal apparatuses of which one can only wonder what operations require them. Nevertheless, the outcomes are artworks of visual pleasure and have healing effects. The combination of metal and flesh is suggestive of playfulness and hedonism in the deviant sexual practices such as sadomasochism and in such subcultural practices as piercing and tattooing. There are a considerable number of points where pain and pleasure cross each other in Chang’s work. To borrow the words of Ryu Byung-hak who formulated a theory of Chang Jia on the occasion of this show, “one’s pain is another’s pleasure.”
What is inscribed on the surface of her work made of the whole skin of a cow is an idyllic scene of a group of young artists travelling around the remote areas of China. On the skin flayed for certain human needs including making a work of art are depicted human beings enjoying the exotic cultures and nature as in a pictorial map. The artist’s mind was bent by a human body-sized chunk of meat hanging from the eaves of an old house in Yunnan, China. This protein source preserved in the traditional manner looks different from that done at secluded slaughter houses where livestock is butchered and processed using modern methods. This huge hunk of meat placed against a peaceful landscape lays bare the concealed truth of life. The pain of an organism sacrificed for human life is inherited to the artist in making the work. In the case of a large piece, it took the artist as long as three straight months to produce it. She embroidered the images with an iron for over ten hours a day. It appears to have required no great labor, but it needed as much labor as the making of a sculpture would demand. The searing must have filled the studio with the stink of burning flesh, and it is beyond doubt that the artist’s mind was suffocating as the scalding iron made puckers in the leather. The production process of the work itself reminds one of agonizing branding. It deals with the causal relationship between memory and pain. In his Genealogy of Morals, Nietzsche, who is known as a philosopher of violation, asked how memory could be implanted in the mind of the animal called the human being. According to him, in order for something to remain in one’s memory, that something has to be burned in. What never ceases to cause pain in one’s mind can stay in his or her memory. Nietzsche emphasized that to inscribe memory in the human mind necessitates blood, torture and sacrifice. The cruelest procedure of every religious ritual takes advantage of the fact that pain is most useful in the art of memory. And thanks to such nature of memory, people have finally succeeded in obtaining rationality.
This dismal conclusion of Nietzsche informs that human rationality is neither of God’s blessing nor of the social contract between enlightened individuals but the achievement attained at the cost of bloodsheds and cruelties. In The Historical Imagination of Nineteenth-Century Europe, Hayden White posits that the historical view of Nietzsche is based on the notion of the world whose people are divided into the strong who is destined to rule it and the weak. According to White’s reading of Nietzsche, the pleasure in exercising power upon the other is sadistic in nature and in the rich society sadistic pleasure has converted sadistic pleasure into a commodity of exchangeable value. Regardless whether it is given or accepted, pain is stored, is drawn up, is taxed, is nationalized and is socialized. In brief, pain is capitalized. Every capitalized reality is inscribed with pain. In Genealogy of Morals, Nietzsche writes that life operates, in its basic function, through disturbance, attack, exploitation and destruction and that it is always sustained through the sacrifice of the weak power of the majority. Nietzsche gave priority to the will to power over democracy, rationality, history and progress, and such ideas of Nietzsche have been branded as reactionary and decadent. But it is obvious that no one can deny that the life of every human being is tainted with such dark stains. Chang has been fiercely opposed to animal testing or animal abuse and thus I do not believe that she is infected with such disquieting ideas. Nonetheless, no one can ditch the reality that this jungle-like capitalist society is Nietzscheanistic. It is not coincidental that it was Nietzsche who was the first to be reinstated in the postmodern era during which the modern concept of progress has been questioned. For those who attempt to express the raw and wild reality without the mediation of understanding or reason, the thoughts of Nietzsche are heart-throbbing. What has been coherently inquired into in Chang’s art from the early years until now are the ritualistic elements suggestive of the sacrifice of the other, the violence and sacredness entailed by them, and the simultaneous releases of pain and pleasure.
What are shown in another leather work of Chang in this show are a self-portrait shedding tears of blood, hands on which severe artistic labor inflicted, an organism that have become someone’s food, the artist’s own solutions and doctrines of ‘surviving the death’, and a scene where skeletons are tongue kissing. These images seem to show no distinct connection among them as if in dreams or unconscious minds. Yet they are the products of brutality that have conquered the obstinate resistance of the material and function as icons intimately related to love, death, madness, art and desire, all of which determine one’s joy and sadness. They have become one with the material, which reminds one of flesh and blood. Yet Chang lightens up these irrational and heavy subjects in her own ways. The artist extracts the heavy from the light and vice versa. Beautiful Instrumentsconsists of objects that the artist found at a flea market in Beijing. The ornamental designs of those practical objects give them the appearance of relics. The artist’s random comments about surgical equipments are more focused on the act of torturing than some sort of suspicious surgical operations. The work is in the same context of the sadomasochistic tools shown at I Confessin 2011. The slipshodness of the bricks for which the blood of a slaughtered cow is used and the sloppiness of the objects to the extent that they look as if a child made them, eradicate the seriousness that can be plausibly associated with all the bloody endeavors that the artist carried out for the very production of those crude artifacts. The word to describe the object-art preserving living blood is nothing but grotesque. Cattle blood should turn grey, not pink, when it meets plaster and blackish red when it does oxygen. The red color of meat in the display case at a butcher shop is the color of blood, not of flesh. What gives meat its flavor is its blood. At the opening reception of the show, all the food was red in color. It was an episode that epitomized the style of Chang who has been appealing to one’s five senses. Her artifacts in unsophisticated forms contain the force of the lives of those creatures sacrificed. During the making of the works the artist endured excruciating labor. She even coughed up blood. But she felt the necessity that the work needed to be done at that very moment, and that forced her to carry on. The very need that can and should be done by only him or her at a certain moment pushes both art and the artist into merciless destin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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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young Song

뜨끔한

Aug 22, 2013 – Sep 27, 2013

작가노트
김윤수

1999년부터 나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삶’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그것에 관한 그들 각자의 생각을 적고 지문을 찍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렇게 해서 공책 한 페이지씩을 그들만의 고유한 흔적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지문은 개인이 지닌 고유한 형태이다. 그것은 마치 지도의 등고선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곳엔 산이 있고 강이 흐르며, 바람이 스치기도 구름이 머물기도 한다. 패어지고 흐려진 지문의 선들은 그들이 살아온 삶의 여정들을 보여주는 듯하다.
나는 그들이 적어준 개별적인 이야기들을 각자의 엄지지문의 선을 따라 써나갔다. 지문의 선을 따라 써나가는 일은 무한 공간 저 편에서 점차 선명해지는 미지의 섬을 거니는 것과도 같다.
각기 다른 지문글씨들은 다시 수십 장의 아크릴판에 복사되고 겹쳐져 사각 큐브 공간 안의 블랙홀을 이루고 있다. 현재까지 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을 만나고 거니는 이 작업은 계속되고 있다.

작가노트
송수영

익숙한 사물이 어느 순간 새롭게 인식되는 순간이 있다. 예를 들어 그저 ‘음식’이었던 족발에서 사람의 것과 같은 털과 발톱을 발견하고 ‘누군가의 다리’로 인식되는 순간이다. 이러한 체험은 어떤 깨달음이나 강한 인상, 감정을 남긴다. 그리하여 그 사물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고, 그와 관련된 행동 양식, 심지어는 세계관을 바꿔 놓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체험을 제공하는 것이 내 작업을 목적이다.
그러기 위해 그 사물들에 내가 본 새로운 모습이 중첩되도록 변형시킨다. 여기서 사물을 변형시키는 방법으로는 주로 일상적 노동이 사용된다. 예를 들어, 나무젓가락을 깎아서 살아있는 나무의 새순을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일상의 사물(젓가락)에 다른 이미지(나무새순)가 공존함으로써 작품이 성립된다. 그리하여 이 젓가락은 막 새순이 돋는 나무의 모습을 닮아 있다. 누군가는 젓가락이 필요해서 다가가다가 새싹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중 누군가는 봄날에 보았던 반가운 목련나무의 꽃봉오리를 떠올리기도 한다. 누군가는 나무젓가락이 이렇게 빛을 향해 새싹을 틔우던 생명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기도 한다.

작가노트
정경자

In Between Something and Nothing
나는 작업을 통해 닥쳐올 죽음에 반응하는 것들의 삶과 그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나의 이미지들은 어느덧 지나가는 삶, 또는 이미 떠나버린 삶의 흔적을 포착하려 시도한다.
나는 가끔 현실 속에서 부유하듯 다른 세계의 삶을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무엇인가를 잡으려고 하나 손에 잡히지 않은 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 같고, 바닥이 없는 늪으로 가라앉아 심연 한 가운데 있는 것 같다. 나의 눈길을 끄는 것들은 버려지거나, 있어야 할 자리를 잃어버린 물건들, 그리고 살아있으나 이미 생명을 잃어버린 것과 마찬가지인 것들이다. (중략)
작업 은 낯선 환경에서 느끼는 이질감과 소외감에 대한 것이다. 비오는 날 차창 밖의 사람들은 나와는 동떨어진 다른 세계의 그 무엇같이 보였다.
'과연 나는 어디에 있는걸까?’ ‘내가 속해 있는 이 세상이 단지 환영은 아닐까?’ 하는 생각 속에서 그 순간을 내가 바라보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선택하여 잘라 담은 것이다.
나는 의식의 밑바닥에 잠재하는 것들을 표면으로 끌어올리는 일에 관심이 있으며, 일상의 경험에서 얻은 초현실적인 감정들을 구체적인 모습을 통해 드러내려 한다. 그래서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말로서 얘기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일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내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사물들의 이름이 아니라 그런 소재들이 한 장소에 모여서 만들어지는 이차적인 이미지다. 그것은 현실의 시간 안쪽에 흐르는 또 하나의 시간, 느린 속도로 아주 조금씩 퇴화가 진행되는 시간일 것이다.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언제 보느냐, 어떻게 보느냐, 그리고 무엇을 통해 보느냐에 따라 같은 것임에도 그 본질마저 의심할만큼 다르게 보여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Story within a Story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언제 보느냐, 어떻게 보느냐, 그리고 무엇을 통해 보느냐에 따라 같은 것임에도 그 본질마저 의심할 만큼 다르게 보여질 수 있다. 에서의 이미지들은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지시하기 보다는, 나의 감각을 자극하여 나의 눈길을 끄는 것들이다. 이것은 나와 주변과의 개인적인 사소한 대화라 할 수 있다. 혼자, 시간의 두께를 입고, 버려지거나, 날카롭게, 흔적만 남기고, 떠도는 것들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느끼는 나의 감정 밑바닥에 있는, 삶의 어긋난 틈 깊숙이 들어앉은 우울의 감정이다. 나는 가끔 현실 속에서 부유하듯 다른 세계의 삶을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무엇인가를 잡으려고 하나 손에 잡히지 않은 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 같고, 바닥이 없는 늪으로 가라앉아 심연 한 가운데 있는 것 같다. 만질 수 없고,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의 시간 안쪽에 흐르는 또 하나의 시간, 느린 속도로 아주 조금씩 퇴화가 진행되는 시간일 것이다. 이미지들은 치유 불가능한 고독과 우울함을 담고 있지만, 그럼에도 삶은 언제나 그렇듯 계속된다.

작가노트
하태범

나는 인터넷에 올라오는 여러 사건들을 다룬 뉴스의 사진자료들을 수집하여 작은 모형으로 재구성한다. 그리고 그 모형을 처음에 수집한 사진과 같은 구도와 느낌을 갖도록 다시 사진을 찍는다. 그러나 재구성한 모형으로 재현된 현장은 흰색으로 인해 피가 거세되고 작은 원본에 의존한 탓에 세부는 생략되어 있다. 인위적이고 축소된 형태로 인하여 사진에서 보여지는 모습은 실제의 그것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얼핏 그리스 유적지와 같은 고요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정경, 인간은 얼마나 무심하며 잔인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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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ungwoo Chun

Interpreters

Apr 25, 2013 – May 31, 2013

기억과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된 오해, 그 미적 가능성 탐구

천경우 작가는 오랫동안 인간의 관계에 대한 성찰, 추상적인 개념에 머물렀던 시간의 의식적인 체험을 통해 무뎌져 가는 감각을 환기시키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모순적인 현상에 담긴 풍부함 등을 탐구하면서, 다양한 문화권에서 살고 있는 여러 계층의 인물들과의 협업을 통해 미니멀한 표현방법으로 작품들을 구현해왔다. 주로 '사진' 이라는 매체를 통해 인간과 세계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온 작가의 관심은 사진의 본성과 그것의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한 집요한 탐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인간의 기억과 해석의 차이에서 오는 오해와 이로부터 파생된 창의적 이미지에 주목하며, 우연과 필연의 계기에서 오는 미적 가능성을 탐색한다. 오해는 흔히, 잘못된 해석 혹은 뜻이나 의미를 잘못 파악한 것, 따라서 정정하고 수정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 (Seeing is Believing)”라는 시각 중심의 오래된 믿음에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Believing is Seeing, 2007)>라는 예술적 맞수를 놓았듯, 작가는 다시 질문한다. 오해는 과연 그릇된 것인가. 만일 그 오해가 문화적, 경험적 차이로 인해 발생한 해석의 다양성이라면, 다양한 해석의 수만큼, 그것은 세계의 확장이 아닌가.
해석학을 발전시킨 독일의 철학자 가다머(H. G. Gadamer)에 따르면, 진정한 해석은 작품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거나 작가의 본래 의도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물음을 수용하고 다시 질문하는 대화의 과정을 통해 '지평융합(Horizontverschmelzung)'을 이루는 것이다. 또한 해석은 의미를 찾는 활동이라는 점에서 눈 앞에 보이는 관찰 가능한 사실이나 사건에 대한 기술(description)처럼 맞고 틀림의 문제가 아니며,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평가(evaluation)와도 분명 다르다. '해석자들'이라는 제목의 이번 전시는 제시된 사진 혹은 단순한 행위를 통해 작가와 참가자들이 자신이 속한 문화적, 경험적 지평에 따라 해석하고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에 대한 것이며, 이렇게 완성된 사진작품들을 전시장에서 마주한 관람객이 또 다시 찾게 될 의미에 대한 것이다.

A Misunderstanding Caused by the Differences in Memory and Interpretation, and a Study to Its Aesthetic Possibility

Kyungwoo Chun has long been attempting to reanimate the enervated senses based on his insightful observations on the nature of human relationships and through conscious experiences of time provided by his artistic creations, which has often been perceived only abstractly. He has also explored new understandings of his surroundings and looked into the complexity of the contradictory. His artistic endeavors can be characterized by the collaboration with people from different social classes in various cultural regions through restrained expression. His fundamental questions about the world and human beings living in it, which have been embodied mainly through the medium of photography, derives from his tenacious inquiry into the nature of photography and its another possibility.
This exhibition unfolds the artist’s artistic attention to the misunderstandings caused by the differences in memory and interpretation and to the creative images that are triggered by such misunderstandings and simultaneously looks at his search for the aesthetic possibilities of the accidental and the inevitable. A misunderstanding has usually been thought to involve a wrong interpretation or a miscomprehension of the meaning or significance of the concerned. It has, thus, been regarded as something that needs to be corrected or rectified. In his Believing Is Seeing (2007) Chun mounted an artistic countermove against the long-standing vision-centered belief that seeing was believing. And here the artist poses another question: Is a misunderstanding really a wrong thing? If a misunderstanding signifies the diversity of interpretation brought about by cultural and experiential differences, is it not safe to say that it implies that the world has expanded to an extent where a number of various interpretations are allowed?
According to H. G. Gadamer, a German philosopher who contributed to the development of hermeneutics, a true interpretation of a work of art depends neither on the objectivity of its analysis nor the discovery of its artist’s original intent, but hinges upon the successful ‘fusion of horizons’ through the dialoguing process where the interpreter listens to the question that the artwork puts to him or her and proposes his or her own question. In the respect that interpretation is an activity of identifying the meaning, it is not a matter of right or wrong unlike in the cases of observable facts or descriptions of incidents, and it is unquestionably different from the process of evaluation in terms of good or bad. This exhibition entitled ‘Interpreters’ is about the process through which the artist and the participants attempt to interpret the photographs given to them or the actions asked of them to carry out and to uncover the meanings of such objects and actions in accordance with the cultural and experiential horizons to which they belong, and about the meaning that a viewer may formulate in front of Chun’s photograp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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