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hyeon Lee

100% REFURB SHOW

Nov 01, 2012 – Dec 05, 2012

작가 인터뷰
글. 윤형주 I 가인갤러리 큐레이터

사용설명서 [refur – refurb – refurbish – refurbished] : 말로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그림. 순수하게 정보로 환원될 수 있는, 디지털파일에 근접하는, 예를 들면 실물보다 ‘사진빨’이 더 좋은 작품.

Q. 전시회의 명칭이 ‘100% REFURB SHOW’ 라고 되어 있는데, 무슨 뜻인가요? 우리가 ‘리퍼폰’이라고 할 때의 그 리퍼인가요?
A. 리퍼제품, 리퍼브제품의 그 refurb입니다. 리퍼브란 비교적 최근에 등재된 마케팅용어로, ‘새롭게 하다’ ‘개조하다’ 라는 의미인 refurbish의 줄임말인데, 구매자의 단순변심으로 반품되거나 미세한 흠집이 있지만 실사용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전시상품, 혹은 단지 포장이 약간 훼손된 상품등의 재판매를 목적으로 재포장, 새단장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리퍼브제품이란, 주로 노트북이나 스마트폰 등 제품의 운용이 물리적인 외관보다는 운영체계나 프로그램 쪽에 비중이 있는 IT관련 디지털기기의 AS나 재판매에 사용되는 제품으로 보통 신품대비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됩니다. 박스를 뜯는 순간 중고가 된다는 말이 있죠. 타인의 손을 타는 것에 대한 약간의 결벽증을 제외하면 신품과는 하등 다를 바가 없는, 신품도 중고도 아닌, 再生品(=refurbished)인 셈입니다. 요즈음은 IT쪽 뿐 아니라 의류, 가구, 식품관련 등, 보다 광범위한 마케팅용어로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Q. 아무런 하자가 없지만 신품이 아닌 미술작품이란 어떤 것으로 이해해야 하나요?
A. 기능상으로는 전혀 하자가 없지만 신품의 이미지만 없는, 이미지에서 새로움만을 제거한 것. 그런 이미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전시회라는 것은 태생적으로 초기불량을 품고 있습니다. 모든 이미지는 이미 재생된(refurbished) 것입니다. 포장을 푸는 순간, 이미지를 보는 순간, 그것은 ‘헌’(refurbished)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작품을 감상하는데 필요한 시간은 무한히 제로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모든 미술작품의 전시회는 출발부터 악성 재고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관객들은 항상 신작을 요구하지만 신작의 유효기간은 전시회의 종료시기보다도 일찍 찾아오거든요. 비유로서만이 아니라 이제 중견작가들은 작업공간이 아닌 재고용 창고를 구해야 할 판이죠. 이것은 매출양이나 재고율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직 미술이 온전하게 데이터베이스의 영역으로 진입하지 못했다면, 그래서 여전히 감상을 필요로 하는 그 무엇이라면, 미술작품은 더욱 거듭해서 재생되어야 하는 물체이기 때문입니다.
Q. 리퍼비시라는 게 일반적으로는 마이너스적인 이미지이고 그다지 선호되지 않는 느낌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일전에 언급하신 이미지지상주의와 관계가 있는 건가요? 신작을 출품하지 않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요? 어떤 식으로 이미지의 과잉상태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A. 끊임없이 이미지를 구하는 것은 우리의 성질(nature)이기 때문에 그것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이미지를 새로운 이미지로 대체해 가는 것은 과잉의 악순환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다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무 것도 보지 않을 수도 없을 테고요. 신작컴플렉스는 우리의 인식론에 기인한 것입니다. 이미지의 조합이 무한하다는 것은 그만큼 기시감도 동시에 쌓여간다는 말입니다. 즉 낡은 이미지의 조합도 무한하다는 거지요.
Q. 낡은 이미지란 말 그대로 새롭지 않은 이미지들을 말하는 것인가요? 기시감에 대하여 조금 더 설명해 주세요.
A. 낡은 이미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미지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스스로를 조회합니다. 이것은 이렇게 생긴 것입니다. 편의상 이것을 이미지의 과거형, 뒷모습으로 부른다면, 우리는 한순간도 이미지의 앞모습을 볼 수가 없는 거죠. 녹지 않은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없는 것처럼, 기시감의 도움 없이는 새로운 이미지를 우리는 알아볼 수조차 없습니다.
Q. 소위 기성작가의 경향이나 작품세계 같은 것도 기시감으로 볼 수 있겠군요. 6년만의 개인전이지만 지난 전시 때 출품했던 작품들도 있는데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A. 지난 개인전과 1998년 경주에서 있었던 ’defrost’전은 여러모로 닮은 점이 많은 전시였어요. 넓은 공간에 대표작을 망라한 회고전에 가까운 전시였는데 전시공간에 대한 취약성을 처음으로 느꼈던 것 같아요. 아마 그때쯤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이미지를 이미지로 극복하는 것에는 어떤 근본적인 갈증이 있다고 느낀 것이. 예나 지금이나 실제 전시보다 남겨지는 도록자료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지만, 지난 개인전은 팜프렛만(으로도) 충분히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의 팜프렛편집에서 이미 이번 전시의 밑그림은 대부분 그려졌습니다. 지난 번 팜프렛의 형식이 곧 이번 개인전의 내용입니다. 이번 전시는 그 설명대로 따라해 본 것에 불과합니다. 신작 없이 말이죠. 20년 전에 발표했던 작품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전시의 내용이 팜프렛에 담기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아직 보지도 않은 이미지가 팜프렛에 선행할 수 있나요.
Q. 앞으로 새로운 이미지의 신작은 계획이 없는 건가요?
A. 새로운 이라는 이름으로는 없겠죠. 액자나 판넬을 만들고, 물감을 칠하는 단순한 노동의 결과를 작품이라고 부르지는 않잖아요. 이번에 내가 만든 건 그런 작품들의 틀과 백그라운드에요. 자신의 밴드를 데리고 다니는 일종의 유랑악단(traveling band)을 생각했어요. 그러면 (논리적으로는)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돼요. (논리적으로는) 액자에 넣어진 모든 작품들은 공간으로부터 자유롭죠. 공간을 잘 활용한다는 것은 그만큼 공간의 제약을 많이 받는다는 거니까요. ‘나는 가수다’에서 밴드팀이 상대적으로 유리하다는 것과 비슷한 논리죠.

진정성과 호환성

A. 아기 신발이라 느낌이 조금 희석되긴 하지만 작품 위를 밟게 하고 싶었어요. 이 작품은 이전부터 특히 배경으로 쓰고 싶은 생각이 많이 들던 연작인데, 처음에는 보다 고운 계조의 작품 위에 붙여보니 아이가 ‘예수 같다’고 하더군요. 물위를 걷는 듯한 설정이 너무 직접적이어서 조금 거친 화면의 작품으로 교체했습니다. 다른 물건들도 그렇지만 이 신발은 여기저기에 붙여 보았어요. 자석으로 붙이는 거라 본체에 아무런 흠집 없이 착탈됩니다. 물론 다른 신발이나 오브제를 부착할 수도 있습니다. 테이블 위에 있는 커피잔도 어딘가에 붙였던 것입니다. 테이블은 갤러리에 비치되어 있는 가구입니다.
고집스러운 예술적 선택들은 항상 일회적이고 영구불변입니다. 미술대학교에서 학년이 바뀔 때마다 산더미처럼 쏟아져 나오는 폐작품들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오직 하나의, 일회의 용도에만 바쳐지는 물건들. 모든 작품이 다른 작품의, 모든 물건들이 다른 물건들의 새로운 역할로 다시 빛을 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신발을 제일 먼저 붙여 본 작품(?)입니다. 작업테이블에서 찾아낸 허드레천 위에 신발을 올렸습니다. 지난 작업의 흔적을 고스란히 받아낸 우연한 얼룩들이 이렇게 판넬에 씌우고 보니 나름 예뻐 보입니다. 주사위작품도 올려보았는데 그것도 잘 어울리더군요. 오랜만에 꺼내본 어릴 적 첫 아이의 첫 신발이 너무 앙증맞아서 나도 모르게 ‘이건 어떻게든 다시 써야 돼’ 라고 마음속으로 외쳤습니다. 질퍽이는 바닥을 걷는 듯한, 쌍으로 찍혀진 얼룩들이, 그리고 지금은 사용할 수 없지만 버리기는 아까운 미묘한 감정들이 서로 닮았다고 느꼈습니다.
연습용이나 버린 것으로 다시 작업을 발표한 이래, 몇 해 전부터 파지들을 버리지 않고 모으고 있습니다. 사실 파지를 보관한다는 점에서 이미 조금은 불순할지 모릅니다. 한번은 처음부터 파지처럼 시간의 흔적과 통제되지 않은 거친 느낌을 만들어보려고 시도를 했는데, 일부러 못 그린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훨씬 고난이도의 노동입니다. 무엇보다 심정적으로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어차피 이 어색함은 나만 느끼는 비밀 같은 것이라 굳건하게 정색을 지켜야 합니다. 이쪽으로 특화된 몇몇 작가들도 있지만 역시 테크닉이라기보다는 성격의 문제인 듯 합니다. 새로움, 해방, 성실함, 열정 등이 하나의 억압일수 있다면, 이런 사전적 의미의 ‘좋은’ 말들을 제외한 행동을 어떻게 제정신으로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막막함이랄지.. 오버하자면 가령 우주모형의 빅크런치가 시작된 새아침의 마음가짐 같은 것? 결국 작업대의 바닥에 겹겹이 쌓인 아주 오래 된 천 중에서 ‘선별’하여 사용하기로 했습니다.(작업조수와 둘이서 보물찾기 같다고 좋아했습니다.) 그래도 어딘가 조금 어색한 곳은 손을 보고 낙서도 하고 얼룩을 덧칠했는데, 처음에는 민망하지만 신기하게도 - 이런 류의 이미지는 어떤 기준이랄 게 없으니 – 거의 티가 나질 않습니다. 취향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완성도의 기준은 없는, 대신에 오래 된 것과 새 것의 숨은그림찾기 같은 은밀한 재미가 있습니다.(고전적 의미의 기존 그림들의 완성도라는 것은 이를테면 인위적으로 시공을 정지시키는 것에 다름 아닌 게 아닌가..!)
이런 작업들을 진행하면서, 잘 그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그린 그림이란 어떤 것인지 새삼 의문에 빠졌습니다. 그나마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말(기준)은 ‘그럴듯한’ 것입니다.
이번에 선택된 버린 천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자연스럽고 풍성한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만드는 일이란 불가능에 가깝더군요. 우연한 시간의 성과물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사용한 것과는 다르지만 붓과 커피잔을 붙여 보았습니다. 이미지와의 연관성도 있고 작업시에 가장 친근한 물건들입니다. 연습용으로 혹은 깔개로 버려지는 수많은 파지들을 보면서 테이블보나 런천매트, 혹은 소파천으로 재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봤습니다. 브랜드런칭을 하자는 우스개소리도 나왔고요.. 식탁세팅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두 물체는 서로 다른 중력하에 놓여진 연출입니다. 붙이는 위치를 이리저리 바꿔보다가 ‘이’라는 글씨로 보이는 순간 결정이 되어버렸습니다.
점작업을 할 때 전용으로 사용하던 붓을 붙이려고 했는데 도통 찾을 수가 없어서 다른 사람의 붓을 빌렸습니다. 작품에 출연시켜 주겠다고 구슬려서 말이죠. 원래의 붓이었다면 도리어 식상한 동어반복이 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후일담이지만 붓의 행방을 찾느라 온종일 작업실을 뒤지고 몇년전 조수들까지 수소문해서 알 필요도 없는 건물의 리노베이션 역사까지 들어야 했습니다. 달랑 걸어버리면 금방 끝날 일을.. 붓의 제공자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결국 전시할 것은 인사동 필방에서 다시 구입했습니다.


프레임은 권력이다

Q. 예전에 선생님의 작품에 관하여 ‘회화적 설치’라는 분석도 있었습니다만, 이번의 경우에는 특히 회화작품인지 오브제작품인지 설치작품인지 더욱 애매해진 것 같습니다.
A. 여전히 모든 회화는 ‘현실에 처한 회화’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모든 작품이 기본적으로는 설치작품이고, 따라서 공간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말이죠. 그런데 그 현실이 자신의 대기권 안에서만 가능한 실존주의적 감동이나 낭만이 아닌 모종의 비현실을 가끔 떠올리기도 합니다. 불속에서 차를 달이는 어느 오도송이나 물속에서 차를 마시는 스펀지밥을 보면서 무중력적인 쾌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Q. 관객들이 프레임처럼 만들어진 벽체를 넘어 들어가 그림의 일부가 된다거나 그런 광경을 다른 관객이 바라보는 중첩된 구조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만.
A. 그림이 현실세계와 가장 가까운 부분은 정면이 아니라 측면입니다. 이 측면을 차단하는 것이 프레임이죠. 원래는 가려져 있던 부분, 즉 팜프렛이나 사진, 정면視로 구현 불가능한 부분을 보다 적극적으로, 취약한 부분을 드러나게 하는 방식으로 디스플레이하는 것. 예를 들면 프레임으로 인하여 작품의 일부가 엄폐된다던지, 보여지지 않는 벽면에 작품을 배치한다던지 하는 방식으로 말이죠. 이전의 비스듬히 바라보는 방법보다는 훨씬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방법입니다. 작품에 부착된 오브제들도 그 부분을 가리는 게 되는 셈이죠. 팜프렛을 만든다거나 사진을 찍는 행위는 작품의 옆면을 제거하는, 프레임을 씌우는 행위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혹은 작품을 말로, 이야기로 옮기려는 행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누락 없이 전적으로 정보화될 수 있는 작품이야말로 완벽한 작품이다 라는 역설이 성립됩니다. 액자는 그림의 옆면을 가리면서 시선을 안쪽으로 집중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마그리트의 여러 작품들에서 보여 지듯이 그림은 자신을 그림 안에 가둡니다. 그렇게 그림을 볼 수 있게, 혹은 없게 해주는 것이 바로 프레임이며, 프레임은 그자체로 존재의 틀임과 동시에 인식의 틀인 것입니다. 그것은 그림을 ‘있게’ 해줌과 동시에 ‘알게’ 해주는 것이죠.
보다 정확하게는, 우리가 그림의 이미지에 몰입할 때 그림의 물질적인 측면을 인지하지 못하듯이 그림은 그것이 보여지지 않는 동안에만 존재합니다. 그림을 본다는 것의 본령이 프레임의 경계를 의식하는 일이라면 – 그림의 안팎을 기웃거리는 일이라면 – 그림을 그리거나 작품을 한다는 것은 그 경계를 짓고 가공하는 일에 다름 아닌 것이 됩니다.
Q. 작업의 비중이 프레임으로 옮겨진 것과 함께 실제적으로는 벽체를 만드는 등 갤러리의 공간을 변화시키는 것이 이번 전시의 가장 주된 작업 같은 데요.
A. 가급적이면 작품화면의 페인팅에는 직접 개입을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래서 나온 것이 조합인데 이전에도 그런 식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대담하게 화면의 앞에 다른 작품을 부착해 보았습니다. 조합이라기보다는 가린다는 의미를 원했고, 위치를 옮길 수 있는 임의성, 호환성, 언제라도 원위치 할 수 있는 가역성 등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가벽의 설치는 갤러리측의 협조가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죠. 작가는 훌륭하고 개성적인 공간을 만나면 거기에 작품을 설치하는 상상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갤러리에 상주하고 계시는 분들은 좀 다를 것 같아요. 왠지 조금 따분할 것 같다고 할까. 같은 공간에 작품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할까. 작가들보다는 갤러리공간을 통시적으로 파악한달지 그런 거죠. 그래서 저는 집에 일체 작품을 걸어두지 않거든요. 일전에 갤러리 공간구조를 파악하려고 홈페이지에 들러 사진들을 보다가 마치 정지카메라로 고속촬영을 한 무비처럼 공간은 움직이지 않고 작품들만 분주하게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영화 ‘타임머신’에서 쇼윈도우 안의 마네킹의 의상이 시대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것과 흡사했어요.
지난 개인전의 팜프렛에 실린 도판을 그대로 어느 사진전에 출품한 작품의 현장 전시사진입니다. 이 도판을 다시 다른 공간에서 전시한다면 마주보는 두 거울 속의 이미지처럼 영원히 계속될 수도 있겠죠.
작품은 그대로인데 작품을 둘러싼 환경이 계속 새롭게 갱신되는(refurbish), 기시감의 과잉상태.

그림의 그림의 그림

A. 이 작품은 3개의 층, 아니 4개의 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초기의 점작업이 1994년작이고 주사위작업이 1995년작입니다. 그리고 2012년에 가장 아래에 있는 작업대를 만들었으니 여러 제작연대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캔버스천의 조직이나 상태도 다르고, 점들의 색상이나 모양새도 많이 다르지만 점들의 이미지는 서로 연결되어 보이기도 합니다. 작업대는 가장 최근에 만들었지만 오래되었다는 설정으로 몇 가지 트릭 같은 것을 추가했습니다. 자신의 근거랄지 문맥, 백그라운드를 가지는 회화를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물론 이것도 다른 작품들과의 조합 및 추가 첨삭이 가능합니다. 각각의 개체들은 서로가 프레임의 역할을 할 것입니다. 양 옆의 뚫린 프레임과는 상대적으로 돋아있는 프레임입니다. 사이즈나 높이가 들어맞게끔 되어있죠.
초기작업에서 조심스럽게 이중으로 찍은 점들이 보이는군요. 고정된 이미지를 평면 위에서 이중상으로 풀어보려고 했던 것이 주사위의 대담한 표현과는 대조적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색상이나 크기의 차이가 두드러져 보입니다. 한 시야에서 바라보니 불과 1년 사이인데도 회화론에 대한 확신이 차이가 새삼 느껴지는군요. 처음 이 조합을 생각했을 때는 10년 정도의 시차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때는 매년 개인전을 했었군요!
Q. 이 관객들은 뭐죠?
A. 요즈음은 작품을 앞에 두고도, 아니 음식을 먹기 전에도 기록부터 하는 것이 기본이더군요. 그런 상황을 연출한 겁니다. 유명전시회나 명승지에서 인파를 피하여 사진을 찍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시잖아요. 그렇다고 아무도 없는 사진은 엽서나 팜프렛과 다를 바가 없죠. 이렇게 ‘인증’을 해주는 것이 당사자들에게는 의미가 있을 테니까요. 그런 인증의 인증, 기록의 기록으로 걸러지는 과정에서 애초의 피사체가 가진 분류하기 힘든 예술적 의미들이 희석되고 탈락이 될 수 있거든요. 무게중심이 감상과 해석에서, 기록하고 분류하는 쪽으로 옮겨진다는 거죠.
Q. 학생들을 동원하신건가요?
A. 동원이 아니라 모집을 한 거죠. 현장감이나 스케일감을 내기 위한 블러샷을 찍을게 아니니까 얼굴이 안 나오게 해 달라든지 할 거면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이 초상권을 주장하는 경우는 없잖아요. 이들은 이 전시를 미리 본 관객들이기도 합니다. 작품은 한 달 이전에 걸려있었거든요. 아마 전시회의 오픈 당일에 다시 온다면 이미 본 작품을 다시 보는 기회를 가지게 되겠죠. 어차피 걸린 작품도 신작은 아닙니다만.
Q. 그래서 작품이 아웃포커싱 되어 있는 거로군요. 이 아이는 아드님?
A. 내 작품에 대한 평을 물어보니 쿨하게 ‘밋밋해’라고 합니다. 촬영을 부탁하니 시큰둥해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기대를 하고 있더라고요. 포즈요구에도 잘 협조해 주고. 그런 건 재미있나 봅니다. 사진을 편집하고 있는데 ‘내 사진이 너무 많이 나와’ 하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면서 싫은 눈치는 아니더군요.
Q. 커피잔 자국 같은 모양이 자주 등장하는군요.
A. 자국은 작업대를 연상시키는 클리셰로 애용되는 이미지입니다. 데스크의 현장성이나 평면성, 수평성을 드러내고 싶을 때 상투적으로 출현하죠. 커피잔이나 잉크병 자국 같은 둥근 흔적에 대한 선호가 있기도 하고, 일본작가 이다 쇼오이치(井田照一)에의 작은 오마주이기도 하고요. 싸인처럼 보이기도 하고.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커피얼룩을 실감나게 만들려면 몇 가지 포인트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쪽이 열려있고 다른 한쪽에 흘린 양이 몰려야 하는데, 이것이 진짜처럼 보이는 데는 잔을 놓았다가 들어 올릴 때의 기울기와 방향성, 바닥에 전달되는 압력 등 실제의 특징적인 움직임의 결과와 동일하다는 오묘한 이치가 있더군요. 그것을 반전시켜 보니 별의 엄폐(eclipse)형상과 닮아 있습니다. 커피잔이 바닥을 잠시 가리고(누르고) 지나가는 소소한 일상과 아득히 먼 천체의 운행에는 어떤 동형반복이 있는 걸까요? 사물도, 작품도, 관객들도, 바닥을 잠시 가리고 지나가는 것이 아닐까요? 물감도 기본적으로는 바닥을 가리는 것이니까요.
정면에 보이는 큰 캔버스와 막대모양의 캔버스의 조합은 서로 닮은꼴입니다. 크기의 차이만큼 풍경 같은 일루전의 거리감도 차이가 납니다. 마찬가지로 같은 사이즈의 프레임 안에서 움직이는 관객들의 위치도 서로 닮은꼴임을 느낄 수 있도록 의도한 것입니다. 통상 막대형 캔버스의 아래쪽에 조합되는 부분은 맞은 편 벽에 걸려 있습니다. 이 창을 통해서 보여지게 되겠지요.
정작 조합을 시키고 보니 천의 색상이 미묘하게 달라서 다시 제작을 해야 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정작 나 자신은 사소한 색상차이 정도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작업조수의 말을 듣고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는 겁니다.
회화의 지층 계보 중에서 비교적 컬러풀하고 예쁜 축에 속하는 작품입니다. 그래서인지 몇 개 남아있지 않아서 구성하는데 가장 고심을 한 작품입니다. 그야말로 남아있는 재고를 긁어모아 조합한 결과입니다. 옆면만 드러나 있으니 속살이 가장 많이 보이는 편이죠. 그래서 어떤 이미지를 통한 소통가능성을 얘기하시는 분도 계신데, 이번에 앞으로 튀어나오게 조합된 작품들과 같이 전시를 해 놓으니 옆면을 보인다는 컨셉이 조금 더 명확해 지는 것 같습니다. 위로 계속 쌓아 올라갈 수 있다는 확장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연필선을 그었습니다.


재현이 아니라 재생이다

A. 멀리 보이는 밝은 프레임 안에는 막대형 캔버스의 아래쪽이 걸려 있습니다.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프레이밍이 가변됩니다. 위아래로 번져나온 물감이 호수에 반영된 그림자를 연상시키는 일루전을 가진 속칭 양수리라고 불리는 시리즈인데, 초기에는 직접 양쪽 캔버스에 번갈아 같은 정도로 칠을 했습니다만 보다 정확한 대칭이미지를 얻기 위해서 몇 단계의 개선된 제작과정이 있었습니다. 캔버스의 넓은 면에 물감을 칠해 놓고 막대형 캔버스의 긴 모서리변을 45도로 눌러서 물감을 빨아들이게 하면 데칼코마니처럼 대칭이미지가 생겨나는 거죠. 바닥에 놓인 넓은 캔버스가 붓의 역할을 하는 겁니다.(반대로 양수리 작품을 바닥에 놓인 빈 캔버스에 찍으면 미시시피라는 별칭의 더 큰 대칭이미지의 작품이 됩니다.) 위아래 두개의 동일한 이미지의 캔버스가 필요하므로, 천을 두 겹으로 겹쳐 싸서 찍고, 천을 해체해서 각각의 막대에 다시 뒤집어 매면, 두 캔버스가 조합된 정확한 반영이미지를 얻을 수 있는 거죠. 보통은 두개를 위아래로 겹쳐 놓습니다. 이 반영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하여 종종 일루전으로 치우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실 양수리라는 네이밍도 여기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번에는 한쪽의 막대형 캔버스를 분리하여 반대편 프레임 안에 걸어 놓았습니다. 설명으로는 까다로운 것 같지만, 머릿속에서 반영의 이미지를 재구성 해보자는 의도였습니다.
Q. 그러한 가역적 착상이나 묘화도구의 개발, 재활용 등이 매우 기발하고 독창적인 것 같은데..
A. 대부분 내가 보았던 것에서 베껴온 거죠. 자연현상이나 풍경, 기타 인공적인 건물, 타인의 작품들 등등으로부터 자연스럽게 가지고 옵니다. 나는 보기보다 수용적인 측면이 강해요. 선, 후배, 제자를 가리지 않고 말이죠.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하고, 또 그것을 대부분 기억하고 있어요. 내가 아이디어맨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인 것 같아요.
Q. 전시회를 잘 안 다니시는 걸로 아는데 수용적이라는 말은 좀 의외입니다.
A. 그러니까 사람들은 거꾸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요.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은 보통 별로 독창적이랄 것도 없는 부분이기도 하거니와 최초의 순간적인 자극에서 결과는 워낙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예를 들면 액자의 하단에 제목을 인쇄한 판화작품이 있는데 도널드 설탄(Donald Sultan)의 과격한 싸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면 누가 표절이라고 태클을 걸 수 있겠어요?
Q. 그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하게 해 주시면?
A. 일본에서 어느 구매자로부터 ‘달밤’이 도널드 설탄의 작품과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일본에서는 두번째로 베끼는 것 까지는 괜찮다는 속설이 있더군요(자세한 의미는 모르겠지만). 물론 이미지상으로는 흡사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달밤’은 에디션의 넘버링개념이나 개별적인 농도의 차이 등, 작품의 프로세스는 전혀 다릅니다. 아무튼 그는 달밤을 구매를 했고 나는 ‘그럴 리 가 없다’라고 대답을 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때까지 나는 도널드 설탄이라는 작가를 몰랐으니까요. 이후에 그의 작품을 접하고 엉뚱하게도 그의 과감한 싸인에 강한 인상을 받아서 ‘4D Perspective – 어두워질때까지’ 연작에서 과감하게 액자에 내부에 싸인을 프린팅 해 넣는 계기가 되었지만, 그 연관성은 아무도 눈치를 못 채더군요.
한때 곽인식의 드로잉작품을 보고 나도 점작업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죠. 노다 테츠야(野田哲也)의 日記연작을 접했을 때는, 시각적인 의장등록보다 나만의 프레임의 발굴이 필요한 것이라고 받아 들였습니다. 단언컨대 ‘회화의 지층’은 그의 작품입니다. 그 당시 일본의 한 조교로부터 들은 고백인데 학부시절 아무리 노력해도 이우환의 작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는 거에요. 한참을 그리고 있다 보면 소스라치게 닮아 있다는 겁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랬다는군요. 그 후로 어떻게들 그 주박(呪縛)에서 풀려났는지 심히 궁금합니다.
독점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혼동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교훈적이거나 교육적인 옛 말씀들은 널리 나누어야 하겠지만 예술적인 것들은 다를까요? 그렇다면 예술적인 교육은 어떨까요? ‘그림을 맨 처음 벽면에 걸 줄을 안 그는’ 누군지 모르지만, ‘변기나 모니터를 맨 처음 화랑에 갖다 놓을 줄 안 그는’ 독점이 허용되어야 할까요?
닮았다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면을 타인에게서 발견하고 그것에 안도하고 다시 나에게로 와서 재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거든요. 그런 것들을 숨길 필요는 없잖아요. 심지어는 큐브릭의 영화에 나오는 모노리스를 보고 내 작품의 면모를 떠 올리기도 했어요. 물론 그 영화가 훨씬 먼저 만들어진 것이지만 순서 같은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숨쉬기 같은 거죠. 누가 먼저랄 것도 없는.
앞으로는 이것을 극단적인 미학적 실험이나 잠언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실천감각이 요구된다는 점입니다. 더 이상 이미지를 만드는 이의 특권을 주장하기가 어려워졌을 뿐 아니라 사람들은 이제 ‘만든다’는 말 속에서 ‘복사한다’는 의미를 더 많이 실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 홀로 도를 딱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거죠. 만드는 주체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그 주체가 옮겨가는 것, 그리고 되풀이 되는 것입니다.
Q. 그래도 대중들은 여전히 예술가의 특권적 위치를 인정하고 있지 않나요?
A. 그 고집스러움을 비하하는 대중들도 있죠. 대중의 반응을 정확한 지표로 삼는 예술가들도 있고요. 무엇보다 과연 대중이 가장 정확할까요? 이 말이 맞는다면 그것은 대중들이 가장 ‘이랬다 저랬다’를 잘 하기 때문이라는, 모순적인 전제 하에서 만이죠. 일관성을 가져야 할 아무런 부담이 없으니까요. 소위 예술가들도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제상황에서 대중들의 판단을 전적으로 참조하지는 않죠. 대표적인 언행불일치의 사례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생계형 예술가’ 라는 명칭은 왜 자랑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죠?
비미술인, 라이트미술인과의 관계. 경합프로그램의 프레임관련......
페이스북이야기.....

프레임의 프레임의 프레임

A. 사실 이 벽면은 막대형 캔버스와 동일한 사이즈의 슬릿을 통하여 동굴을 탐험하듯 보게 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하면 작품을 걸고 나올 수가 없어서 변경을 했습니다. 마주 보는 프레임과 상호보완되는 효과도 있고 자연광과 대비되어 쇼윈도우를 연상시키는 화려함도 있어서 나쁘지 않더군요.
비록 목재로 만들어진 칸막이에 불과하지만 물리적인 경계는 어떤 류의 정서를 환기시킵니다. 아이들의 땅따먹기놀이나 선을 그어서 자신의 영역을 만들기, 혹은 그 와중의 다툼은 매우 역동적이고 신기하게까지 느껴지지 않습니까? 회화작품의 비밀이 그렇듯이 이미지의 아우트라인은 의미론을 훌쩍 뛰어넘어 생각의 아우트라인을 정해 버립니다. 유럽여행중 미케네의 아가멤논의 무덤에 들어섰을 때 나는 문득 노다 테츠야의 목판화를 떠올렸습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도쿄 긴자의 화랑가에 한평 남짓한 아주 작은 갤러리가 있었습니다. 그 곳은 항상 문을 닫아놓고 손바닥만 한 창을 통해서만 작품을 볼 수 있도록 해놓았습니다.
Q. 나중에 써넣은 어색한 메모들은 다행스럽게도 잘 보이지 않는군요. 신발자국은 밀실추리소설의 분위기가 나지 않나요?
A. 몇 년 전 캄보디아의 어느 외딴 사원을 방문했을 때, 어두운 회랑을 헤매다가 매몰된 돌무더기들의 틈 사이로 이름 모를 석상을 촬영하고 있는 외국인과 마주친 적이 있었습니다. 가이드북에도 나와 있지 않은 대단한 포스의 여신상이었습니다. 장비들로 짐작컨대 일반 관광객처럼 보이지는 않았고 어딘가에 게재될 사진을 찍는 프로 카메라맨 같았는데, 매우 비밀스러운 장면을 불시에 조우한 듯한 뭔가 흥분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치 어드벤처영화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촬영된 결과물은 깔끔한 엽서사진만 남긴 채, 안타깝게도 석상을 가리는 돌기둥들과, 곡예에 가까운 촬영각도와, 또 그것을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는 한국에서 온 한 관광객이 있다는 걸 보여주지는 못하겠죠.
여기에 출연한 관객들은 전시기간중에, 그리고 팜프렛을 볼 때마다, 미리 본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될 겁니다.

featuring with

A. 조각가 정광호의 대표작인 ‘나뭇잎’을 내 작품 위에 붙여 보았습니다. 나는 이것을 콜라보레이션(協業 collaboration)이나 2인전이 아닌 ‘피처링(featuring)’이라고 부릅니다. 두 사람이 한 목소리를 내는 듀엣이나 하모니를 생명으로 하는 합창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서로의 지분을 침해하면서도 각자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가요배틀을 생각했습니다. 각자의 작품을 위계와 상관없이 동시에 한 시야로 보는 것. 서로 쓸데없이 양보하거나 결론을 도출할 필요가 없는 최선의 동거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한 기계적인 중첩이 필요합니다. 따로 본 두 작품을 동시에 다시 떠올리듯이 말입니다.
정광호의 작품을 모르는 사람들은 전부 내 작품인 줄 알더군요.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요? 여기서도 브이질은 필수입니다. 해당 작품과는 화해할 필요가 없거든요.
두께를 가진 회화와, 매스가 결여되어 있는 조각은 의외로 혹은 예상대로 잘 어울려 보입니다. 그림자처럼 진하고 흐리게 찍힌 두 점의 평면적 일루전과 잎맥의 입체적 그림자가 의외로 어울리고, 두 점이 마치 나뭇잎의 벌레먹은 흔적인 것처럼 예상대로 잘 어울립니다. 너무 잘 어울리는 점이 바로 이번 피처링의 최대약점일 우려가 있습니다.
물고기는 거리를 약간 띄워서 매달았습니다. 유치한 발상이지만 걸어가면서 보면 물고기가 앞으로 나아가는 듯 움직입니다.
이 점들 또한 물고기의 눈인양, 옆줄인양, 똥인양 너무 잘 어울립니다.

노는 것도 일이다 일이야 !

A. 신작컴플렉스는 항상 억울하게 ‘빚진’ 마음으로 전시회를 맞이하게 합니다. 이번 전시의 컨셉은 ‘신작을 만들지 말자(100% REFURB SHOW)’라서 모처럼 느긋한 마음으로 준비를 했습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작품들로 하는 만큼 주머니가 두둑한 심정인 거죠. 게다가 피치 못할 여행예정으로 마음도 부산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있을 줄 알았던 이 작품이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는 겁니다. 아마도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판넬을 재활용하려고 폐기한 것 같습니다. 원작은 1992~3년 쯤 제작인데 그때도 이 작품은 미발표 신작이었습니다. 작품을 본 유일한 사람이 그 당시 작업조수였던 서해근작가 단 한명이었어요.(그럼 엄밀히는 신작이 아닌 게 되나요?) 그런데 서해근군은 내 작품 중에서 이 작품을 제일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번짐이 약간 마음에 안 들긴 했지만 이번 전시는 화면의 이미지만으로 승부하는 컨셉이 아니라서 충분히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현물이 없으니 시뮬레이션한 사진파일로 전시를 할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다시 만들기로 했습니다. 원작은 이번에 설치할 벽면에 비해 조금 큰 편이라 만드는 김에 사이즈도 약간 줄였고, 번짐도 그때보다는 훨씬 잘 나왔습니다. 새로 구입한 천의 상태가 아주 좋았습니다. 이쯤 되면 신작이라 할만도 한데, 아무튼 새로 무언가를 ‘처음으로’ 만든다는 부담감이 없어서 편했습니다. 머릿속으로는 ‘그때 그것’을 다시 만드는 것이었으니까요.
작업의 난이도로 보자면 이 작품이 제일 힘이 듭니다. 한시간 이상 1초도 쉬지 않고 고도로 집중해서 붓질을 해야 하거든요. 그것도 매일 한번씩 수차례 반복해서요. 이것 말고도 놀고먹기에는 refurbish해 줘야 할 일이 많았지만 ‘놀기 위해 일한다’는 말 만큼이나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노동이었습니다.
언젠가는 시뮬레이션만으로, 말만으로, 생각만으로도 작업내용이 전달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잔뜩 구입해 놓은 성능 좋은 천들은 어떻게 하지요?
내 작품 중에서는 드물게 12禁쯤 되는 등급을 가지고 있습니다. 19禁이상으로 상향조정도 가능합니다.
바로 이전의 작품과 같은 방에 설치된 작품인데 두 작품은 서로 상반된 동선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앞의 작품이 전후의 동선으로 엄폐를 말한다면 이 작품은 양 옆으로 감상의 동선이 이루어집니다. 정면에서는 그림자로만 입체감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벽면에는 유화물감과 비슷한 반광택의 도료를 칠했습니다.
이 작품도 명목상으로는 재고 전시지만 여러 군데 재처리과정(refurbish)을 거쳤습니다.
갤러리의 입구 – 에 걸려있는 – 사진입니다.
이 벽에는 아무 것도 걸려있지 않습니다.
걸려있지만 보지 못한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EXHIBITION PAGE

Veronica Bailey

Modern Myths

May 10, 2012 – Jun 08, 2012

편재하는 현대적 신화에 대한 사진적 비판
글. 신혜영 I 미술비평

“나는 언젠가 이발소에 갔었다. 거기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파리-마치(Paris-Match)> 라는 잡지 한 권을 내밀었다. 그 잡지의 표지에는, 프랑스 군복을 입은 흑인 청년이 눈을 약간 치켜 뜬 채 주름진 프랑스 삼색 국기를 주시하면서 군대식으로 경례를 올리고 있었다... 내가 순진하건 순진하지 않건 간에, 나는 이 표지의 이미지가 나에게 의미하는 바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프랑스는 위대한 제국이며 프랑스의 모든 자손들은 인종 차별 없이 프랑스 국기 아래에서 평등하게 군에 복무한다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유명한 그의 저서 ‘신화론(Mythologies)’(1957)에서 오늘날 무수히 많은 사회 현상 가운데 작동하는 ‘현대적 신화’를 발견하고 ‘탈신화’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앞서 진심을 다해 경례를 올리는 흑인 청년의 이미지는 사실상 프랑스 제국주의의 역사를 미화하고 정당화하는 데 기여하는 일종의 신화로서, 우리는 그러한 ‘외연’과 그 안에 감춰진 ‘함의’를 구분하여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영국 사진작가 베로니카 베일리(Veronica Bailey)의 신작 <현대 신화(Modern Myths)>(2011)는 이러한 바르트의 신화론과 밀접히 닿아 있다. 베일리는 현존하는 인류의 모든 기원으로서 고대 그리스의 신들을 대표적인 현대 신화인 미디어, 그 중에서도 전통적 미디어인 신문으로 재해석한다. 작가가 포착한 사진의 피사체는 신문을 말아 쥐었을 때의 단면들로, 신문의 종이색, 매수, 말아 쥔 강도나 모양 등에 따라 그 이미지 또한 달라진다. 그 결과 각기 다른 열두 신문의 이미지는 상징하는 바가 각기 다른 올림포스의 열두 신으로 인격화된다. 따라서 검은색 배경 가운데 놓인 신문들은 그 자체로 ‘정물화’임에도 이미지와 짝을 이루는 각 신의 이름을 가리키는 제목과 함께 일종의 ‘초상화’로 보여지게 된다. 아프로디테, 아폴로, 아레스, 아르테미스, 아테나, 데메테르, 헤파이스토스, 헤라, 헤르메스, 헤스티아, 포세이돈, 제우스가 그 주인공이다. 모든 기호에서 기표와 기의를 연결하려는 우리의 해독적 습관은 자연스럽게 신문의 이미지와 각 신의 상징적 의미를 연결시키고, 그러한 노력은 대로는 어느 정도 성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여러 겹의 종이들이 풍성하게 겹쳐져 부드러운 이중의 곡선이 강조된 이미지는 여성, 결혼, 모성의 여신인 헤라이며 종이의 홑겹이 아닌 스테이플러로 묶은 부분이 드러나 두텁고 강한 선들이 강조되고 안쪽에 붉은 색이 보이는 이미지는 다름 아닌 불과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토스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미지와 텍스트의 대응은 작가의 주관적인 인상과 직관에 의한 것으로, 그것은 마치 언어의 기표와 기의의 자의적 관계처럼 전적으로 임의적인 관계이다. 따라서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를 왕래하며 둘 사이의 관계를 추론하는 것은 <현대 신화>를 감상하는 하나의 유희적 방식일 수 있으나 작가의 본질적인 의도는 아닌 셈이다. 오히려 작가는 그러한 기표와 기의, 이미지와 텍스트의 일대일 대응관계를 하나의 ‘신화’로 보고 암묵적으로 비판하려는 쪽에 더 가깝다.
본격적으로 베일 리가 고대 신화를 끌어들여 전달하려는 신문에 대한 탈신화의 시도는 두 가지 층위에서 일어난다. 첫째, 신문을 ‘읽을 수 없는 텍스트’로 제시함으로써 무력화하는 것이다. 작가는 신문의 매체적 본질이라 할 수 있는 텍스트를 읽을 수 없는 새로운 이미지로 제시함으로써, 미디어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리라는 보편적인 믿음을 비판한다.
우리는 오늘날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접할 수 있다고 믿지만, 사실상 미디어의 발달은 자본이나 권력과의 결탁으로 인한 왜곡과 더 많은 조작을 수반한다. 이러한 점에서 작가는 미디어가 전달하는 수많은 현상들 이면에 우리의 믿음과는 전혀 다른 진실이 존재할 수 있음을 강변한다. 한편, 베일리의 <현대 신화>가 구사하는 탈신화의 두 번째 층위는 신문을 ‘물질적 본성으로 직면’하게 함으로써 미디어의 절대적 권력을 축소시키는 것이다. 작가는 종이의 질감과 신문 특유의 가장자리 마감 부분까지 디테일이 살아있는 고화질의 클로즈업 이미지를 통해 신문이란 하루(또는 한 주)의 소식을 전달하는 용도가 다 하면 폐기되는 값싼 종이일 뿐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제시함으로써 미디어의 신화에 흠집을 내는 것이다.
<현대 신화>에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지점은 열두 신 외에 또 다른 이미지, 즉 그들의 신전이 있던 산의 이름을 딴 <올림포스>라는 제목의 사진에 있다. 올림포스가 대신한 그리스 신화의 열세 번재 신의 자리는 원래 지하세계 왕좌에 머물러 있던 ‘죽음의 왕’ 하이데스의 것이다. 베일리는 이 ‘죽음의 자리’를 9.11 테러 사진이 1면에 실린 <파이낸셜 타임즈>로 대신하고 있다. 유일하게 내용(텍스트가 아닌 이미지지만)을 볼 수 있는 <올림포스>는 나머지 열두 이미지를 대신해 작가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자본주의의 종주국인 미국, 그 중에서도 뉴욕 맨해튼, 그 중에서도 증권가 한 가운데 자리한 상징적인 건물에 대한 공격으로서 세계무역센터에 대한 테러는 결국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공격이자 완전무결해 보이는 자본주의 신화의 파열을 함의하는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작가가 선택한 이미지가 폭발로 건물이 불타고 있는 여타 신문의 이미지와 달리, 건물이 붕괴되어 사라지고 없는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을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이는 폭발 사진을 접할 때의 비현실성과는 또다른, 폭발이 일어난 뒤 사후적 지표(index)로서 사건을 받아들이게 하는 독특한 경험을 유발한다. 베일리는 그 이미지가 “죽음을 ‘하나의 공간(a space)’으로 받아들이게 하였다.”고 말한다. 그러한 이유로 그녀는 그 열세 번째 사진을 신이 아닌 신이 머물렀던 장소로 대치하였을지 모른다. 사실상 이러한 ‘부재의 현전’이야말로 다름 아닌 신화의 본성이다. 작가가 인상 깊게 기억하는 색이 바라고 신체 일부분이 훼손된 고대 그리스 조각의 모습은 이러한 신화의 본성을 잘 말해준다. 현대의 상태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신화의 신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현전하는 것처럼, 역사적인 발생의 기원과 무관하게 지금의 그것을 자연스럽게 믿게 하는 것이 바로 신화의 작동원리이기 때문이다.
<현대 신화>와 유사한 시기 제작된 베일리의 또다른 사진연작 <헤르메스 베이비(Hermes Baby>(2011)는 대표적인 현대 신화 중 하나인 전쟁을 주제로 한 작업이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은 자국의 안보와 세계 평화라는 명분으로 대대적인 전쟁을 감행했고, 다수의 국민은 나라가 내세운 전쟁의 공익성과 정당성을 진실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전쟁의 신화는 실질적인 테러와 무관한 수많은 민간인의 목숨을 앗아가고, 그 가운데서도 여전히 상대를 가해자로 만들 수 있었다. 미국의 경우 뿐 아니라 힘의 논리에 의해 전 세계를 지배하는 문화제국주의나 신자유주의가 여전히 일정한 신화로서 작동하고 있음에 우리 모두는 전쟁의 신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헤르메스 베이비>는 최초의 여성 퓰리처 상 수상자인 미국인 종군기자 마그리트 히긴스(Marguerite Higgins)가 한국전쟁의 경험을 적은 책을 소재로 한 작업이다. 작가는 이 책에서 인상 깊은 두 세 단어의 구절을 발췌하여 ‘베이비 헤르메스’라는 특정 서체로 적고, 글자가 적힌 디지털 이미지를 35mm 아날로그 필름으로 전환해 암실에서 수작업으로 현상하고 명함크기의 1950년대 빈티지 인화지에 인화하였다. 그리고 넉장의 사진을 하나의 그룹으로 묶어 장방형으로 하나의 액자에 배치하였다.

이 사진들은 크게 두 가지 지점에서 작가 자신의 이전 작업은 물론 여타의 사진들과 차별화도니다. 첫째, 카메라 촬영이 아닌 빛의 노출을 통해 상을 얻는 고유의 제작 방식이다. 카메라 촬영에 작가의 제작 행위가 집중되는 대부분의 대형 디지털 사진과 달리, 이 소형 아날로그 사진은 –레이요그램이나 솔라리제이션 등 빛에 노출하여 상을 얻는 일부 전통적인 사진기법들처럼- 필름에 상을 안착시키고 인화지에 이미지를 얻어내는 후반 작업에 무게가 실린다. 특히 이 작업에서 작가는 1950년대 기록된 전쟁에 관한 텍스트를 당시 생산된 인화지에 재현함으로써 내용과 물질의 양 측면에서 과거에 대한 현재의 시대적 개입을 시도한다. 사실상 이 작품에서 작가의 제작행위는 내용상 창작이 아닌 발췌이며, 형식상 촬영이 아닌 필름 전환, 현상, 인화라는 점에서 소극적인 방식에 국한된다. 그러나 작가의 현재적 개입으로 인해 과거 전쟁의 내용이 다른 맥락에서 전달되고 과거 생산된 종이가 오늘날 새롭게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 텍스트와 종이는 분명 과거에 발생한 역사적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여전히 현전한다는 점에서 신화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상 그 맥락과 의미는 전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탈신화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상 제작방식보다 중요한 <헤르메스 베이비>의 차별점은 사진의 피사체(subject)가 텍스트라는 사실이다. 이미지가 아닌 텍스트, 즉 도상기호가 아닌 문자기호가 그림이나 사진에 재현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그것은 관습적인 이유이기도 하지만, 닮음을 전제로 한 도상기호와 달리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자의적인 문자기호는 지시체가 지닌 의미를 직접적으로 전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반면, 문자기호는 그 의미가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달라지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심상과 상상력의 측면에서 훨씬 더 풍요로워질 수 있는 강점이 있다. 특히 <헤르메스 베이비>의 경우 베일리가 선택한 ‘녹색 병사’, ‘보랏빛 심장’, ‘붉은 껍데기’ 등의 색과 관련된 표현이나, ‘뒤돌아 도망치라’, ‘악몽 같은 샛길’, ‘묘지 같은 참호’ 등의 상황 묘사는 보는 사람에게 저마다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심상은 직접적으로 묘사된 이미지보다 훨씬 폭넓은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게 한다. 베일리는 이러한 텍스트의 효과를 인화지의 형태와 결합하여 배가시킨다. 인화 과정에서 끝이 제멋대로 말려들어간 종이의 모양은 그것이 단순히 종이가 아닌 깃발이나 손수건처럼 보이게 한다. 그것은 종전을 알리는 흰 깃발이나 전장으로 향하는 병사를 보내면서 가족이 흔들었ㅇ르 손수건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 자체 특정한 정서를 자아내는 일종의 오브제로서 이 사진들은 전쟁과 관련된 텍스트와 겹쳐져 더욱 다양한 층위의 심상과 상상력을 자아낸다. 흥미로운 것은 베일리가 선택한 텍스트의 내용과 서체의 형태, 그리고 그것이 흰 배경 안에 고립되어 제시되는 방식이 잔혹한 전쟁의 현실을 가벼운 수사적 표현으로 희석시킨다는 점이다. 이는 베일리가 전쟁의 탈신화를 꾀하는 방식이다. 작가는 당시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국 군인들이 공유한 영예와 자만감의 집단의식이 전쟁을 정당화하는 정부의 입장을 개인적으로 내면화한 허위의식에 불과함을 말하고자 한다. 사실상 그 젊은이들은 그러한 대의명분이 아니라 전쟁이 일어나기 전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전쟁에 충실히 임할 뿐이라는, 이른바 ‘바닐라 아이스크림’의 신화를 폭로하고자 하는 것이다. ‘얼어 죽은’이라는 구절 바로 옆에서 발견하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주는 상충적 느낌은 그야말로 이러한 전쟁의 신화를 대변한다.
바르트는 “신화는 곧 발화(speech)”라고 말한다. 신화란 특정 대상이나 소재에 국한된 것이 아닌 모든 “의사소통의 체계”와 “의미작용의 양식”에서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단, 바르트는 신화가 “역사에 의해 선택된 발화”인 점을 강조한다. 베일리가 지금까지 사진의 소재로 삼아 온 것들, 즉 역사적 인물의 서가에 꽂힌 책이나 그들이 주고 받은 편지, 그리고 최근의 특정 순간을 기록한 신문이나 과거 전쟁의 경험을 적인 텍스트는 모두 ‘역사에 의해 선택된 발화’와 관련된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그것들 대부분이 발화의 내용에 해당하는 정보를 드러내지 않고 작가의 최소한의 개입에 의해 새로운 시각적 기호로 제시되거나, 발화의 내용을 드러낼 때조차 전혀 다른 맥락의 의미로 전환되어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일관된 방식은 택스트와 이미지, 문자기호와 도상기호의 관계에 관한 사진적 탐구는 물론, 현대적 신화의 편재와 그러한 신화의 허상을 암묵적으로 제시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이야말로 바르트의 가장 중요한 학문적 성과이며, 베일리는 바르트가 이론을 통해 행한 그 일을 예술이라는 다른 언어로 성취해가고 있는 셈이다. 그 세계는 명료하고도 풍요롭다. 


Photographic Criticism of the Prevalence of Modern Myths 

Text. Hyeyoung Shin | Art Critic

Translation. Jawoon Kim


“One day I was at the barber shop and a copy of Paris-Match was offered to me. On the cover, a young black soldier in a French uniform was saluting in a military manner, with his eyes uplifted, probably fixed on a fold of the tricolor… Whether naively or not, I saw very well what it signified to me: that France was a great Empire, that all her sons, without any color discrimination, faithfully served under her flag.” In his celebrated book entitled ‘Mythologies’ (1957) Roland Barthes asserted emphatically the need for ‘demythification’ upon his discovery of the operation of ‘modern mythology’ in the realm of the infinite number of social phenomena. The above-mentioned image of a young black man saluting the flag from the bottom of his heart acts, in fact, as a sort of myth contributing to the beautification and justification of the history of French imperialism, and one needs to distinguish the ‘connotation’ hidden behind such ‘denotation’.
 Modern Myths (2011), one of the recent works of the English photographer Veronica Bailey, is closely related to this Barthes’s theory about mythology. Bailey translates ancient Greek gods as the very genesis of existent human beings into modern myths—the various kinds of the mass media, and especially the newspaper, which is one of the most traditional media. The subjects are the different sections of rolled newspapers, and the resulting images are decided by the colors and number of the pages of newspaper and the intensity of the grasp and the resulting shape. As a result, the images produced by photographing twelve different newspapers are personified as twelve Greek Olympian deities who have their own symbolisms. Although the photographs of the newspapers located in the middle of the dark background are in themselves still lifes, consequently,they are seen as some kinds of ‘portraits’ together with the titles referring to different Greek mythological figures. The protagonists are Aphrodite, Apollo, Ares, Artemis, Athena, Demeter, Hephaestus, Hera, Hermes, Hestia, Poseidon and Zeus. One’s habit of decoding to pair the signifier to the signified in every case of sign is naturally applied to the connection of the images of the newspapers to the symbolic meanings of each deity, and such efforts seem to succeed from time to time to some extent. For example, the smooth double curvilinear lines emphasized by the exuberant layers of paper are deliberately devised so as to link them to Hephaestus, the god of fire and metalworkers. Yet the matching of each image and its corresponding text is actually established in accordance with the artist’s subjective impression and intuition, and thus the relation between them is undoubtedly arbitrary as in the voluntary relation between the signifier and the signified in the domain of language. The ratiocination of the relationship between image and text while going between them may, therefore, be a sportive mode of appreciating Modern Myths, but it fails to help one to penetrate the original intention of the artist. Rather, it is more likely that the artist sees an operation of ‘mythification’ in the one-to-one correspondence between the signified and the signifier and between text and image, and casts a tacit criticism against it.
 Bailey’s attempt for the demythification of the newspaper by employing the subject matters of ancient myths occurs in two different horizons. One is to debilitate the power of the newspaper by presenting it as ‘unreadable text’. The artist censures the universal belief that the media delivers reality as it is by re-present text, which can be characterized as the mediatic core of the newspaper, through unreadable new images. Today, one hesitates to doubt that he or she can be informed of all the incidents occurring throughout the world through various channels of the mass media, but in reality the development of the media is accompanied by all the more distortion and manipulation of facts due to its collusion with capital and power. In this respect, the artist argues for the existence of truths totally detached from one’s belief behind the countless phenomena distributed through the media. The other horizon of her Modern Myths is to diminish the absolute power of the media by forcing one to ‘be confronted with the materialistic nature’ of the newspaper. The artist’s use of the technique of high definition close-up for the delicate depiction of the texture of paper and the unique edge peculiar to the newspaper reveals the undeniable fact that the newspaper is nothing but cheap paper that is destined to be disposed upon the completion of its service to deliver the news stories for the day (or for the week), and this allows the artist to impair the status of the myths of the media.
 Another intriguing aspect of Modern Myths is it has another image besides those of the twelve deities—a photograph entitled ‘Olympus,’ borrowed from the name of the mountain on which their temple stood. The seat of the thirteenth god of the Greek mythology that is supplanted by the image of Olympus is originally of Hades, ‘the king of the dead’ who has stayed on the throne of the Underworld. Bailey replaced this ‘seat of the god of the dead’ with the front page of the Financial Times on which the picture of 9/11 is printed. The message that the artist aims to convey is disclosed through Olympus, which is the only image of the series that shows content (image instead of text), on behalf of the other twelve images. The terrorist attack on the World Trade Center as the attack against the symbolic building located in the heart of Wall Street in Manhattan, New York in the United States, one of the most champion fans of capitalism is, above all, an assault on the capitalist system and entails the rupture of the myth of the seemingly perfect and indestructible system of capitalism. What deserves one’s attention is that the image chosen by the artist shows the skyline of Manhattan without the World Trade Center after the demolishment of the building, unlike the images on many other newspapers in which the building is being burnt owing to the explosion. This choice of the artist induces an inimitable experience through which one receives the incident as an expost facto index after the explosion, rather divergent from the sense of unreality caused by looking at a photograph of the explosion. Bailey states that the image “made her see death as ‘a space’.” This may explain why she decided to use for the thirteenth photograph not a god but the place where gods resided. As a matter of fact, this ‘presence of absence’ is the very fundamental property of myths. This attribute of myth is well exemplified by ancient Greek sculptures whose faded colors and damaged parts have been deeply carved in the mind of the artist. For as mythological gods are present under one’s very eyes even today, regardless of the present status quo of them or the truth about their existence, it is the mechanism of myth to lead one to a natural belief in what it is now regardless of the historical origin of its formation.
 Hermes Baby (2011),  another photographic series of Bailey, which was made in the same time frame of the production of Modern Myths, deals with the theme of war, which is one of the typical modern myths. After the 9/11 terrorist attacks, the U. S. went to war under the pretext of her security and world peace, and the majority of her people unquestionably accepted the public necessity and legitimacy of the war that their nation insisted. This myth of war took the lives of numerous civilians extraneous to the actual terrorist attack, and it still enabled to frame the other party as the wrongdoer. This does not apply just to the case of the U. S., and historically every war has maintained itself with the help of its mythification. Today, one is not freed from the myths of war since not only the mere outbreaks of armed conflicts but also such doctrines as cultural imperialism and neoliberalism that dominate the entire world by use of the logic of power still operate themselves as myths. Hermes Baby takes as its subject matter the book  in which Marguerite Higgins, American war journalist and the first female Pulitzer Prize winner, wrote about her experiences of the Korean War. The artist selected from Higgins’ notes several phrases consisting of a few words that impressed her, used a specific font of ‘Baby Hermes’ to write the words, converted the digital images of the words into 35mm analog film negatives, developed them manually in the dark room, and handprinted them onto slips of vintage photographic paper made in the 1950s whose size is of a name card. Then, she puts four sets of four photographs into four square boxframes. 
 These photographs are differentiated from both her previous works and any other’s photographic pieces in, by large, two respects. One is her own distinctive photographic technique to obtain images through the exposure of light, not camera shooting. Unlike most of the large-scale digital photographs that are imbued concentratively with the action of the photographer in the case of camera shooting, in these small-sized analogue photographs, weight is attached to the later part of the making process of placing images on film negatives and to attain images on sensitized paper—as in the case of some conventional photo-making techniques such as Rayogram and solarization that acquire images by the utilization of light exposure technique. Especially in this series, the artist attempts for the intervention of the present in the past in terms of both content and material by re-writing the texts about war made in the 1950s on the printing paper produced during the very decade. In fact, in this work, the creative activity of the artist is related not to content but to selection, and formally, it is confined to a passive mode since it consists not of camera shooting but the processes of film conversion, development, and printing. Yet the artist’s present interference allows the content of the past war to be disseminated in a different context and permits the paper made in the past to be given a new light today. Here, a myth is suggested in the respect that the text and the paper are still present today despite that they are clearly historical entities of the past and the idea of demythification in the respect that nevertheless their contexts and significances fail to be transformed.
 What makes Hermes Baby distinguish itself, more importantly, is the fact that its subject is text. It is not frequent for text not image—linguistic signs instead of iconic ones—to be represented in a photograph. This owes to certain convention, yet it is because unlike iconic signs premised upon the concept of resemblance, linguistic signs in which the signifier and the signified have a voluntary relationship have difficulty in the direct delivery of the significance of the referent. On the other hand, linguistic signs have the capacity to be much more enriched in terms of one’s mental image and imagination while their meanings are subject to change depending who uses and interprets them. In Hermes Baby, the expressions related to color and the descriptions of situations that Bailey have chosen—‘Green Soldiers,’ ‘A Purple Heart,’ and ‘Red Shells,’ or ‘Turn and Bolt,’ ‘Nightmare Alley,’ and ‘Graveyard Foxholes’—invoke different images in the minds of different viewers. And such mental images generate a still wider arena of imagination than explicit depictions of images. This effect bred by the use of text is doubled by Bailey’s choice to interrelate it to the form of printing paper. The shape of paper with randomly curled-in edges during the process of printing makes the paper to be seen not as a simple piece of paper but a flag or a handkerchief. One is here reminded of a white flag to signal the termination of the war or handkerchiefs waving in the hands of the family members of a soldier who is heading to the battle ground. As some objects stimulating specific sentiments, these photographs engender mental images and imagination of an eclectic variety of dimensions, which are extended by the company of texts relevant to the war. What is attention-grabbing here is that the images of the cruel and harsh reality of the war is attenuated and assuaged by Bailey’s choices of the contents of the texts, of the type of font, and the way in which they are presented to be isolated within the white background while it is being transformed to be seen as not so grave rhetoric expressions. This is how Bailey seeks after the demythification of the war. What the artist wants to tell here is that the collective consciousness of honor and pride shared among the American soldiers who had participated in the Korean War is no more than a false consciousness fabricated by their personal internalization of the government’s positions. In other words, the intention is to expose about the myth of what is called ‘vanilla ice cream’: those young men carried out their mission devotedly not for such a great cause but in order to be able to come back to their ordinary lives that they enjoyed prior to the war. The collision between the phrase ‘Vanilla-Ice-Cream’ placed next to the phrase ‘Frozen Dead’ undeniably embodies such a myth of the war.
 Barthes says, “Myth is an act of speech.” That is, the formation of a myth is not confined to a specific object or subject, but it can be formulated in every “system of communication” and every “mode of signification.” And Barthes does not forget to stress that myth is “a type of speech chosen by history.” The subjects that Bailey has taken as the subject matters for her photographic works—the books on the shelves of certain historical figures and the letters corresponded between them, newspaper pages on which recent particular moments are published, and texts of the past experiences of wars—are all related to ‘speech chosen by history.’ What should be noticed is that most of them are presented as new visual signs materialized by the minimal intervention of the artist without revealing the information about the content of speech, or even when the content of speech is disclosed, it is with a wholly different meaning. This coherently maintained mode of Bailey has tempted her to do photographic inquiries into the relationships between text and image and between linguistic and iconic signs and results in the implicit revelation of the prevalence of modern myths and their falsehood. This is what is most important in the achievements of Barthes, and Bailey has accomplished and will continue to do so what Barthes did theoretically through a different language of art. And it is a world of clarity and ferti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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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ol Yu Kim

In & Out Project

Mar 22, 2012 – Apr 21, 2012

작가노트
김철유

나는 거의 매일 꿈을 꾼다. 그 중 몇 개는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같다. 주로 날아다닌다. 한발 두발 내딛다 보면 어느새 나는 허공에 떠 있다. 창문을 통해 드나들지만 가끔은 매우 뜬금없는 곳에서 시작한다. 예를 들면 비행기나 물 속이다. 나는 양팔을 날개처럼 사용한다. 어렸을 때는 종종 떨어지곤 했다. 스토리가 어이없이 끝난 다음 날은 숙취처럼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날개를 사용하고 난 뒤부터는 내용도 풍부해지고 잠도 잘 왔다. 간밤의 비행 탓에 팔과 어깨가 간혹 아플 때도 있었다. 떨어지지 않으려면 나름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한창 때는 꿈을 꾸는 시간이 많아서 어떤 게 꿈이고 현실인지 헷갈렸다. 아마도 꿈에 기억할 것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내 작업은 그런 꿈과 현실 사이에 있는, 내가 보아왔던 곳의 풍경화라고 할 수 있다. 허리케인에, 홍수에, 혹은 폭풍우에 쓸려 올라간 집과 사람들, 그 밖에 잡다한 것들이 모여 있을 법한, 빛의 속도로 천 번을 살아가는 동안 달려야 겨우 닿을 수 있는, 우주 밖의 풍경말이다.


The Deep Stay
이수진

나는 개인 혹은 집단의 심리, 행동 패턴에 의해 만들어지는 시각적인 정황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중첩된 시간과 물리적 관계, 일정한 규칙, 불확실성 등을 주목하고 통찰해 왔다. 현재 진행하는 프로젝트인 'The Deep Stay'는 나를 비롯한 우리들의 삶에 존재하는 다양한 장소를 찾아 머무르며, 그 내부에 존재하는 요소들을 시각 및 공감각적 요소로 치환해 오고 있다. 장소 안에 '벽'을 지어내며 진행되는 본 프로젝트는 장소를 대상으로 다루지만, 그 자체를 주목하게 하기 보다는 그 벽을 통해 반영되거나 퍼올려지는 심리적 질감, 이미지와 컨텍스트, 상호반응 등에 주목하게 한다. 이 작업은 공간의 구조로서 관객과 만나며, 삶의 모습을 투영하고 보이지 않는 주변을 색다르게 경험시키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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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jin Lee

In & Out Project

Mar 22, 2012 – Apr 21, 2012


The Deep Stay
이수진

나는 개인 혹은 집단의 심리, 행동 패턴에 의해 만들어지는 시각적인 정황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중첩된 시간과 물리적 관계, 일정한 규칙, 불확실성 등을 주목하고 통찰해 왔다. 현재 진행하는 프로젝트인 'The Deep Stay'는 나를 비롯한 우리들의 삶에 존재하는 다양한 장소를 찾아 머무르며, 그 내부에 존재하는 요소들을 시각 및 공감각적 요소로 치환해 오고 있다. 장소 안에 '벽'을 지어내며 진행되는 본 프로젝트는 장소를 대상으로 다루지만, 그 자체를 주목하게 하기 보다는 그 벽을 통해 반영되거나 퍼올려지는 심리적 질감, 이미지와 컨텍스트, 상호반응 등에 주목하게 한다. 이 작업은 공간의 구조로서 관객과 만나며, 삶의 모습을 투영하고 보이지 않는 주변을 색다르게 경험시키고자 한다.


작가노트
김철유

나는 거의 매일 꿈을 꾼다. 그 중 몇 개는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같다. 주로 날아다닌다. 한발 두발 내딛다 보면 어느새 나는 허공에 떠 있다. 창문을 통해 드나들지만 가끔은 매우 뜬금없는 곳에서 시작한다. 예를 들면 비행기나 물 속이다. 나는 양팔을 날개처럼 사용한다. 어렸을 때는 종종 떨어지곤 했다. 스토리가 어이없이 끝난 다음 날은 숙취처럼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날개를 사용하고 난 뒤부터는 내용도 풍부해지고 잠도 잘 왔다. 간밤의 비행 탓에 팔과 어깨가 간혹 아플 때도 있었다. 떨어지지 않으려면 나름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한창 때는 꿈을 꾸는 시간이 많아서 어떤 게 꿈이고 현실인지 헷갈렸다. 아마도 꿈에 기억할 것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내 작업은 그런 꿈과 현실 사이에 있는, 내가 보아왔던 곳의 풍경화라고 할 수 있다. 허리케인에, 홍수에, 혹은 폭풍우에 쓸려 올라간 집과 사람들, 그 밖에 잡다한 것들이 모여 있을 법한, 빛의 속도로 천 번을 살아가는 동안 달려야 겨우 닿을 수 있는, 우주 밖의 풍경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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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tage

Feb 14, 2012 – Mar 03, 2012

줄리앙 오피 Julian Opie (1958~ )
줄리앙 오피는 이미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영국 작가로 동시대를 대표하는 탁월한 아티스트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명성은 전시나 아트 페어에서는 물론 유럽과 미국, 일본 등지에서 진행된 버스 광고물, 교통 표지판, 쇼 윈도우, 지하철이나 공항의 환승로 등 공공미술 프로젝트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픽토그램(pictogram)을 연상시키는 둥근 머리와 단순한 선으로 이루어진 전신상, 그리고 작가 주변의 인물을 클로즈업해서 묘사한 반신상을 다룬 이미지들이다. 이번에 전시되는 애니메이션 작품 역시 그러한 특징을 잘 볼 수 있으며, LCD 화면 속 시계초침과 담배연기, 그리고 눈의 움직임에서는 담담한 감정의 표현과 세련미가 더한 위트도 느껴진다.   


빅 뮤니즈 Vik Muniz (1961~ )
빅 뮤니즈는 브라질 출신으로, 미국을 비롯하여 북남미, 유럽 등지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는 음식재료와 먼지, 다이아몬드 같은 다양한 재료를 이용한 드로잉 및 설치작업에 대한 최종 결과물을 사진으로 남긴 후, 작업을 해체함으로써 유한함과 무한함을 동시에 아우른다. 작가는 마를린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 유명인의 이미지와 기록사진 및 거장들의 작품을 재현하면서, 재료와 인물 간에 이질적인 관계를 통하여 예술과 현실 안에서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한다. 드로잉 과정은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표현방식을 추구하지만, 기록의 도구로써 사진 본래의 역할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번 전시에서는 학교 단체사진을 초콜렛으로 그린 과 고갱의 작품을 피그먼트로 재현한 을 볼 수 있다.


알브레히트 슈니더 Albrecht Schnider (1958~ )
알브레히트 슈니더는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회화작가로 1980년대부터 특유의 회화와 드로잉으로 주목받아 왔다. 그의 작품은 축소된 풍경이미지, 실물크기의 형태, 도식화된 초상에서 모호한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미국 팝아트를 떠올리는 밝은 톤의 뚜렷한 화면분할은 단순하지만 강한 인상을 주며, 작가 특유의 붓자욱을 드러내지 않는 색감은 원근감을 알 수 없지만 공간성을 가늠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화면 속 형상은 직접적인 의미전달을 피하고 있는 대신에, 도상학적 측면에서 그림의 형태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이번에 선보이는 소품 2점은 얼굴로 보이는 흰 여백과 추상적 색면 구성이라는 슈니더 만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제이슨 샐러번 Jason Salavon (1970~ )
제이슨 샐러번은 미국 출신의 미디어 아티스트로, 미국과 유럽 중심의 주요 미술관과 갤러리는 물론, 휘트니 비엔날레를 비롯한 다양한 국제전시에 초대되는 작가이다. 주로 디지털 사진과 비디오 영상으로 보여지는 제이슨의 작품은 현대사회의 각종 미디어로부터 추출한 이미지를 컴퓨터 기술을 이용하여 전혀 새로운 시각적 형태로 변형하는 방식을 따른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은 <100 Special Moments> 시리즈로, 결혼식과 크리스마스 같은 미국 사회의 가장 대표적인 일상의 이미지들을 그가 고안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중첩시키거나 재구성하여 회화적 이미지로 나타내고 있다.


존 발데사리 John Baldessari (1931~ ) 
존 발데사리는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의 개념미술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은 잡지, 신문광고 등에 원색의 도형으로 화면의 일부를 가리거나 인물의 얼굴 위에 배치하고, 또한 공간 벽에 작품을 콜라주 하듯이 구성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번 전시 작품인 석판화 시리즈는 1760년대 로렌스 스턴(Laurence Sterne)의 원작 소설 「The Life and Opinions of Tristram Shandy」의 1988년 특별판에 수록된 삽화의 일부로, 원작소설의 재발행을 계획 중이었던 편집자와 평소에 이 책을 좋아하던 발데사리의 공동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소설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구성되었으며, 발데사리 특유의, 오래된 B급 영화의 느낌이 지배적인 기하학적 문양의 콜라주 기법이 돋보인다. 


로버트 롱고 Robert Longo (1953~)
로버트 롱고는 미국을 대표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작가이자 뉴페인팅의 기수로 손꼽히며, 연극 무대에서 격렬한 연기를 하는 듯 과장된 제스처를 보이는 인물들을 담은 ‘도시인(Men in the Cities)’ 시리즈로 유명하다. 1980년대, 인간이라는 존재가 문명의 시스템에 예속된 노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간파했던 작가는 작품 속에서 일정한 권위와 위치를 지니고 있지만 고통에 춤추듯 몸부림치는 현대인의 보편적인 삶을, 그리고 팍팍한 현대사회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 역시 그의 대표적인 도시인 시리즈로, 일반적인 춤 사진과 달리 강력한 에너지와 상징성이 돋보인다 할 수 있다.


로이 리히텐슈타인 Roy Lichtenstein (1923 ~ 1997)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미국 맨하탄 출신으로 자본과 문화의 중심인 뉴욕의 대표적인 팝 아티스트이다. 주로 만화의 장면을 세부적인 수정을 거친 후 큰 캔버스에 옮겨 여러가지 장면과 상황을 그대로 재현하고, 잡지나 신문의 색채의 기본구성이 망점으로 메워져 있는 벤데이 점도 금속 등사판을 이용한 기계적인 방법으로 동일하게 화면을 구성하는 것이 특징이다. 1966년 이후에 피카소, 마티스, 몬드리안 등 거장들의 작품을 재해석하여 빨강, 파랑, 노랑의 삼원색과 흑백의 한정된 색을 이용하여 제작한 판화작품은 통속적인 평면성과 추상표현주의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은 1973년 판화작인 이다.


요시토모 나라 Yoshitomo Nara (1959~ )
요시토모 나라는 일본의 대표적인 팝아티스트로서, 그의 회화와 조각은 순수미술과 대중적인 정서를 함께 담고 있다. 1990년 중반부터 유럽, 미국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국내에서는 2005년 로댕갤러리(현, 플라토갤러리)에서 「내 서랍 깊은 곳에서」 개인전으로 큰 호응을 받은 바 있다. 회화, 판화, 그리고 조각 및 설치로 제작되는 작품에서 지그시 눈을 감은 슬픈표정의 여자아이와 강아지, 그리고 캐릭터의 다양한 표정과 직접적인 텍스트와 어우러지는 그림이 특징인데, 이것은 혼자있는 시간이 많았던 작가가 유년기에 접한 자연환경과 팝송, 그리고 그림책을 통해 형성된 감성이 반영된 것이다. 2012년 일본 요코하마미술관에서 개인전이 열릴 예정이며, 이번에 전시되는 판화작품 에서도 그의 특징적 요소를 확인할 수 있다.


콘라드 빈터 Konrad Winter (1963~ )
오스트리아 출신의 콘라드 빈터는 주로 유럽도시의 풍경과 관광지의 고풍스러움을 알루미늄 위에 자동차 도료라는 현대적인 소재를 사용하여 재해석한 회화로 유명하다. 컴퓨터의 픽셀처럼 일정하지 않은 색면들로 그려진 그의 작품들은 가까이서 보면 추상회화처럼 보이지만 일정 정도 거리를 두고 보면 작가가 그리고자 한 대상이 보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은 유럽의 해변가 풍경으로, 컬러의 보색 대비나 교차와 결합을 반복하는 색점들의 배치 그리고 올록볼록한 엠보싱 표면이 잘 어우러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스테판 길 Stephen Gill (1971~ )
영국의 사진작가 스테판 길은 아마추어 사진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유년시절과 청소년기에 사진현상과 인화를 직접하면서 자연스럽게 사진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20대 초반에 런던으로 가면서 보도사진 그룹 매그넘포토스에서 일하면서 전문적 사진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현재는 아를르(Arles), 토론토(Toronto), 포토에스파냐(PHotoEspana)와 같은 세계 유명 사진 페스티벌에 참여하는 등 두각을 보이고 있다. 그의 사진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치열함을 차갑게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따뜻한 시선과 해학으로 삶의 현장을 이야기 한다. 이번 전시에서 보여지는 는 그의 최대 수작으로, 2002년에 런던 동부에 위치한 ‘해크니 윅’이란 지역에서 6~7년간 작업한 시리즈이며, 지역시장에서 50펜스짜리 플라스틱 카메라를 구입하여 찍은 사진에 콜라주한 화면을, 다시 재촬영한 작품이다.


베로니카 베일리 Veronica Bailey (1965~ )
베로니카 베일리는 영국출신의 사진작가로, 2003년 영국의 ‘저우드 사진상(Jerwood Photography Award)’의 제 1회 수상자로 선정된 이후 최근 유럽과 미국에서 크게 주목 받고 있는 여성 사진작가이다. 2008년 가인갤러리에서 국내 첫 개인전을 가졌으며, 2012년 5월에 두번째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다. 베로니카의 사진은 초점이 선명한 형상적 이미지에 해당하지만, 대상이 본래 가지는 기하학적인 형태와 구도를 강조하여,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두고 있다. 이번 전시작인 는 영국과 미국식 여자이름을 제목으로 목각인형의 동작을 디테일하게 설정하여, 어느 한 부분을 클로즈업한 작업으로, 이 시리즈에 해당하는 를 선보인다.


써니킴 Sunny Kim (1969~ )
써니킴은 무채색의 톤과 어딘가에서 본 듯한 풍경, 그리고 세필의 자수화, 교복입은 소녀들과 같은 전통적인 소재와 다큐멘터리적 요소를 담은 회화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작가는 이민 1.5 세대라는 개인의 정체성과 화가로서의 관점을 일치시켜 개인의 감성을 더하고 사실적 풍경을 재해석 하는 작업을 한다. 그녀의 작업은 주로 의도적인 의미전달을 생략하고 표현의 절제를 통하여 발전되어 오고 있으며, 신문이나 영화에서 본 장면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이번 전시 출품작의 제목은 단어의 기본형 인데, 텍스트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를 편집하고 재해석하여 무심한 관찰자의 시점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박현두 Park Hyun Doo (1971~ )
박현두는 현대인들이 느끼는 소외감을 사진 속 장소와 등장인물의 연출을 통하여 특유의 위트와 애잔한 유머로 표현하고 있다. 2010년 박건희문화재단 주최의 제 8회 다음작가로 선정되어 참신함과 독창성을 인정 받은 바 있다. 라는 테마로 지속되고 있는 이 시리즈 작품은 제목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이방인’이 가지는 환경과 군중 속 소외감에 대한 감정을 탈출시키려는 시도를 다루고 있다. 작업 방식은 원경 속 인물의 방향과 상황을 구성하기 위해 장소를 찾은 다음, 대형 크레인을 설치하여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전까지 무전기로 교신하며 쉽지 않은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번 전시작은 에 해당하는 작품 두 점으로, 풀을 다듬는 골프장의 인부들과 바닷가의 치킨 배달부가 거대한 공간과 대조를 이루며 이방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김봄 Bom Kim (1983~ )
김봄의 회화에 나타난 풍경은 주로 서울 지역을 일정한 비율로 줄여 평면에 도식화한 지도형식을 차용하고 있다. 서울성곽, 청계천, 한강, (광화문)광장 등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주로 서울을 모티브로 한 그림은 실제 장소에 있는 지표의 명칭을 구분 할 수 있을 정도로 재현하고 있기 때문에 현장성과 시대적 정황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 <북악스카이웨이>와 <탑골공원> 역시, 지형적 특징과 지금도 볼 수 있는 과거의 석탑, 정자와 함께 현대에 설치된 표지판, 가로수들이 사람들의 모습과 한데 어우러져 작가만의 생동감있는 지도를 완성하고 있다.


천경우 Kyungwoo Chun (1969~ )
천경우는 독일 브레멘에 거주하며 서울을 비롯해 독일, 스페인, 네덜란드, 덴마크 등 유럽 전역을 아우르며 국제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작업 방식은 19세기 중엽의 전통적인 초상사진과 동일한 조건을 가지지만, 작가가 주목하는 것은 인간의 ‘관계’에 있다. 그의 사진은 피사체에 해당하는 대상과의 인터뷰와 대상 간의 관계를 매개로 하는 퍼포먼스에 기반한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 은 서양의 격언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Seeing is Believing)’의 역설적 답변으로, ‘보는 만큼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만큼 보는 것’이라는 작가의 믿음을 보여준다. 다른 작품 는 모노톤으로 작업해온 작가의 첫 번째 컬러 작품이자 한자의 ‘사람 인(人)’의 형상과 의미에 동기를 두고 퍼포먼스 형식에 바탕을 둔 작업으로, 2011년 뉴욕 타임스스퀘어에서 진행되어 주목 받은 바 있다.


이응노 Lee Eungno (1904 ~ 1989) 
고암 이응노는 충청남도 홍성 출신으로, 먹의 농담과 속도감있는 필법으로 표현되는 사람형상의 모임과 흩어짐을 통해 화면전체에 생동감이 느껴지는 <군상>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고암이 타계 전, 30년 동안 파리에서 머물며 마지막까지 천착했던 주제는 ‘인간’이었다. 1980년에 ‘광주민주화운동’에서 모티브를 얻은 ‘인간’ 시리즈는 지필묵이라는 전통적 매체를 사용하여, 과거 한국사회의 격동과 희생을 바탕으로 지금의 현실을 반영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와 같은 고암 이응노의 대표적인 <군상> 작품 2점을 선보인다. 극히 단순화 시킨 작은 인간을 단위로 먹의 농도에 따라 화면에 나타나는 굵은 선의 형상은 고암의 진취적이고 실험적인 작품관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 작품의 특징은 작품을 나란히 배치시켜 필체와 형상의 대비를 보이는 ‘군상대련’이라고도 불린다.


김철유 Kim Cheolyu (1969~ )
김철유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조각을 전공하고, 주로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올해 3월,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가인갤러리에서 개인전이 있을 예정이다. 그의 펜 드로잉은 평면이지만 펜의 각도에 따라 일정한 간격의 선으로 얻어지는 양감과 조형성을 획득하고 있으며, 수채화 및 아크릴화는 우주와 시공간을 넘나드는 작가만의 판타지를 실현시키는 스토리를 가진다. 출품작 소품시리즈는 작가가 의자에 앉았을 때 블랙홀로 빨려들어 갈 듯한 느낌을 아크릴 물감을 이용한 흑백 격자만을 사용해서 제작한 작품으로, 작가의 3차원적 공간감과 탄탄한 필력으로 완성되었다.


김형근 Kim Hyung gun (1930~)
김형근은 사실주의가 주도한 70년대 국전에서 <과녁>이란 작품으로 대통령상을 받은 바 있으며, 2년 간의 미국유학 이후 ‘동양의식’을 바탕으로 한 그의 작품에는 주로 ‘꽃과 여인’이라는 상징적 대상이 등장한다. 크게 인물과 정물로 구분되는 그의 작품은 정물화에서의 화면분할과 예리한 선과 묘사, 그리고 여인이 등장하는 화면의 색채미로 독자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볼 수 있는 판화작품은 무채색으로 표현된 여자의 옆모습과 머리장식에 붉은 꽃이 더해져 순수한 소녀의 감성을 전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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