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shin Kwak

On Light

Nov 17, 2011 – Dec 17, 2011

작가노트
곽남신

나이가 들어가면서 작업에 임하는 태도나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한결 느슨해진 느낌이다. 젊은 시절처럼 매일 작업실에서 뭔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많이 사라졌고 오히려 「작업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주된 화두가 되었다. 또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며 사람 사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이 즐거움의 하나가 되었다. 특별히 관찰하려고 하지 않아도 아옹다옹 살아가는 내 주변의 삶이 이미 세상사의 축소판이다.

나의 작업도 어쩔 수 없이 삶의 그러한 궤적 속에 있는 것 같다. 젊은 시절의 작업은 좀 더 학구적이고, 좀 더 심각하고, 좀 더 예술의 권능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고 할까?

최근의 작업들은 주제에 대한 심각한 대응방식 대신「가벼움」을 선호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춤추거나 입 맞추고, 운동하거나, 싸우는 우리 주변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이고 대중적인 포르노그래피, 또는 패션 스타들의 과장된 포즈를 실루엣이나 그림자의 모습으로 형상화 시키고 있다. 때로는 실상과 허상이 도치된 상태로, 또 묘사된 손은 자신의 이미지를 포함한 캔버스 전체를 당기고 있다. 오줌 누고 있는 그림자로부터 뻗어 나온 알루미늄 봉 오줌발은 멀리 실제공간으로 뻗어 나온다.

이것들은 젊은 시절의 나무그림자 그림과 비슷한 소재를 다루고는 있지만, 그 시절 나에게 강령처럼 따라다니던 평면성 이라는 모더니즘의 이데올로기를 주저 없이 일탈한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 없는 일탈들은 단순히 철지난 평면성의 이데올로기를 전복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고 안티 모더니즘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양한 전략조차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그것은 이제 나에게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강령들이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서 최근의 작업들은 회화와 탈 회화, 2차원과 3차원, 개념과 이미지가 장벽을 넘나들며 서로를 통섭하는 경계 없는 회화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형식 없이 살아가는 우리 주변 사람들의 진실 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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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g-Ouk Hong

co-

Sep 29, 2011 – Oct 29, 2011

상이한 두 축 사이의 불안정한 균형
글. 신혜영 l 미술비평

무엇이 회화를 회화이게 하는가. 모더니즘의 대표적 비평가 그린버그는 물질성과 평면성을 회화의 본질적 속성으로 꼽았다. 구체적인 형상을 재현하든 그렇지 않든 특정한 내용과 주제를 전달하든 그렇지 않든 회화라면 모름지기 캔버스와 물감을 사용해야 하며 2차원의 평면에 그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회화의 범주 안에서 활동하는 동시대 작가 역시 여전히 이 두 가지 속성과 무관하지 않다. 다만 그러한 매체적 본성을 강령으로 삼거나 위반하는 것에 작업의 목적을 두지 않으며 매체를 기준으로 한 범주구분을 우선시하지 않을 뿐이다. 홍정욱의 작업은 회화로부터 출발하였다. 회화를 회화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물질성과 평면성 둘 중 하나만을 가진 것은 회화인가 아닌가, 즉 캔버스에 물감이 칠해졌지만 평평하지 않거나 평면이지만 캔버스와 물감을 사용하지 않은 것을 회화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들의 시각적 구현이 홍정욱의 초기 작업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후 일련의 진화를 거쳐 그의 작업은 회화라는 범주구분의 의미 자체를 무화시키는 지점까지 이르렀다. 자신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답해가는 과정에서 자신을 뛰어넘는 바로 그 방식으로 말이다.
회화의 물질성과 평면성처럼 홍정욱의 작업 전반에는 상이한 두 개의 축이 공존하고 모든 작품은 그러한 두 축 사이의 한 지점에 놓인다. 이차함수 그래프의 x축과 y축 사이 한 좌표처럼 모든 작품은 서로 간의 관련성 하에 공존하는 두 가지 속성을 지니는 것이다. 먼저 중심이 되는 것은 형식상의 축이다. 기존 회화의 사각 프레임을 새로운 형태로 변형 제작해 캔버스 천을 씌우고 아크릴 물감을 칠한 그의 대표적 작업인 <-↑g=↓9.8(㎨)>과 으로 시작해보자. 이 두 시리즈 모두는 캔버스에 붓으로 흰 색과 검은 색 물감을 칠한 일종의 단색회화다. 그러나 미술사의 전통적 단색회화와는 달리 여기서 색과 붓질은 캔버스의 형태를 드러내기 위한 부차적 조건에 가깝다. 또한 전체적인 캔버스의 형태는 가로와 세로 축 중 하나의 방향으로 여러 개 뼈대의 간격을 다르게 배치하여 만든 프레임에 캔버스를 팽팽하게 당겨 씌움으로 해서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캔버스 위에 붓으로 재현하는 회화의 형상이 캔버스의 변형된 형태 자체로 대체되며 그 형태는 ‘그리기’가 아닌 ‘만들기’로부터 비롯된 셈이다. 또한 작가는 캔버스 표면에 직접 선을 긋는 대신 자석의 밀고 당기는 힘을 이용해 캔버스 표면에서 일정 간격 떨어진 지점에 직선의 와이어가 놓이도록 함으로써 이른바 허공에 선을 그었다. 캔버스 위에 붓으로 색을 칠했으나 그 형상은 그리기가 아닌 만들기에 의해 생성되는 이 작업들은 그야말로 회화와 조각의 중간 형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 유학 이후 현재까지 근 5년간의 작업들을 통해서 작가는 이러한 형식상의 범위를 확장하고 다양하게 변주해내기 시작했다. 회화와 조각 사이 어딘가에 위치했으나 일차적으로 벽에 걸린다는 점에서 회화의 축에 가까웠던 작업들이 재료와 형태의 측면에서 그 범위를 크게 확장하면서 조각 혹은 설치의 축에 가까이 옮겨가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 재료 면에서는 카드보드, 포맥스, 각종 와이어, 플라스틱 호스, 아크릴 막대, 케이블 타이, 플라스틱 태그, 실리콘 캡 등 미술재료가 아닌 일상의 사소한 재료를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재료들 각각을 작가가 전체적인 형태를 만드는 데 있어서 하나의 부분으로서 접합하고 연결하는 점, 선, 면의 기본 단위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작품마다 적합한 재료를 선택해, 점을 모아 선과 면으로, 선을 쌓아 면으로, 잛은 선을 연결해 긴 선으로, 작은 면을 붙여 큰 면으로 만들어 가면서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냈다. 각 단위를 연결해 작품의 뼈대를 완성하고 그 단위가 작아질수록 전체적인 형태는 곡선의 유기체 형상에 가까워지고 구 혹은 정육면체와 같은 입체형태로 바닥에 놓이는 등 다양한 변주가 가능해졌다.
이러한 형식상의 변화는 단순한 재료와 보여주는 방식의 변화뿐 아니라 작업에 임하는 태도에 있어서의 좌표 변화로부터 비롯되었다. 캔버스 프레임의 방향과 간격을 조정하는 보다 단순한 형태의 이전 작업들은 작가의 수학적 계산과 계획, 그에 따른 통제라는 ‘이성적’ 축에 의존하는 경향이 컸다. 물론 당시에도 작업의 전체적 인상과 기획은 작가적 직관에 따른 것이었으나, 재료와 형태의 범위가 확장된 최근 작업으로 오면서 작가는 자신의 손맛과 직관, 우연적 효과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비이성적’ 축에 보다 가까워졌다. 이번 전시의 라는 작품은 이러한 작업방식의 두 축을 잘 말해준다. ‘통제된 혼란(controlled chaos)’을 뜻하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작품은 전체적인 프레임의 형태는 미리 그려놓은 설계도를 따라 정확히 만들고 그 위를 캔버스로 가리는 대신, 투명하고 가느라단 플라스틱 호스로 전혀 계산되지 않은 손의 움직임에 따라 마구 엉켜가며 덮은 것이다. 그야말로 한 작품 안에 통제와 혼돈이 공존하고 있으며, 재료의 선택과 배치에 의해 폐쇄이자 노출의 외양을 띠게 된 셈이다. 이번 전시 대부분의 작품이 이러한 계획과 직관의 두 축 사이에서 움직인다. 모든 작품이 모눈종이에 그려진 철저한 사전 드로잉을 전제로 하지만 직접 만드는 과정에서의 변수와 그에 따른 변형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캔버스 작업들조차도 길이가 다른 나무 틀들을 연결해 비정형의 곡선 형태로 만들거나 작은 나무 조각들을 나선형으로 쌓아올려 새집 모양으로 만들고, 얇은 나무틀을 비틀어서 캔버스 중간을 가로지르게 하거나 둥근 공을 틀의 일부로 사용하는 등 회화의 인상으로부터 더욱 멀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최근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홍정욱의 작업은 대체로 단일한 색과 복잡하지 않은 형태로 인해 ‘단순하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 제작과정을 알고나면 그러한 인상이 실체와 얼마나 거리가 먼가에 탄복하게 된다. 모든 재료를 깎고 자르고 갈아서 붙이고 매달고 덮는 전 과정에서 공장에 맡기거나 기계를 사용하는 단 하나의 공정도 없다. 나무나 포맥스로 작품의 전체 뼈대를 만드는 것에서부터 수 백 개의 택(tag)이나 케이블 타이(cable tie)를 일일이 매달고, 수 십 개의 아크릴 막대와 철사의 단면을 원하는 각도로 갈아서 부착하는 것까지 모두 전적으로 작가의 손에 달려있다. 심지어 보관과 운송을 위한 나무상자까지 손수 만드는 작가의 모습은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원시 부족사회의 브리콜뢰르(bricoleur)와 꼭 닮았다. 브리콜뢰르가 주변 사물들을 손에 닿는 대로 가져다가 원래의 쓰임과 상관없이 새로운 쓰임새의 물건을 만들어낸다면, 홍정욱은 완성될 작품의 드로잉을 가지고 실질적인 쓰임새와는 무관한 예술작품을 만들어낸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처럼 복잡한 제작과정과 극도의 물질적 노동이 그와 상반된 간결한 최소한의 형태를 낳는다는 점에서 어쩌면 홍정욱의 작업은 예술의 무용성(useless)을 극대화하는 작업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간극이 가져오는 역설이 작가의 가장 고유한 특징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현상과 보이지 않는 실체 사이의 극명한 차이는 작업의 주제나 내용과도 맞닿아있다. 작가는 보이는 것 너머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지만 쉽게 변하지 않는 보편적인 사실들을 작품을 통해 가시화하고자 한다. 예컨대 그가 오랜 시간 몰두해 온 ‘중력(gravity)’이라는 소재는 평소에 인지할 수 없지만 시간과 장소와 무관하게 지구상의 모든 존재에 작용하는 가장 기본적인 힘이다. 작가는 그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자신의 작품을 통해 눈에 보이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번 전시의 <-by> 역시 중력을 이용한 작품이다. 캔버스 아래로 내려와 있는 와이어는 실제 사각형이 아니지만 캔버스에 매달렸을 때 중력에 의해 사격형처럼 보이도록 계산된 형태이며, 3개의 모서리만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의 지각의 습성에 따라 사각형으로 인지된다. 한편 이 작품의 푸른색 캔버스는 사실상 단색이 아닌 48가지색의 무수한 점이 겹쳐져 푸른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외양과 실재의 차이를 보여준다. 많은 작품에서 작가는 이렇듯 외양 너머의 실재, 현상 너머의 실체에 관해 말하고자 한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홍정욱은 점, 선, 면과 원형, 삼각형, 사각형이라는 형태를 중요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사물들이 기본적으로 원형, 삼각형, 사각형의 세 가지 형태 혹은 그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러한 모든 형태는 결국 면으로 이루어지며 면은 선의 결합으로, 선은 점의 연장으로 형성된다는 보편적인 사실을 작업 전반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전시장의 중앙벽에 벽드로잉과 함께 설치된 작업 은 이러한 주제적 측면을 포함해 현시점의 작가의 특징을 가장 잘 대변해준다. 두 벽에 걸쳐 그려진 벽드로잉은 정확히는 사각형과 삼각형이 결합된 오각형이지만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삼각형으로 인식되며, 두 꼭지점에서 허공을 가로질러 건너편 벽의 한 꼭지점까지 연결된 두 가닥의 팽팽한 실은 그러한 오각형의 벽드로잉이 삼각형으로 보이는 한 지점에서 그와 겹쳐진다. 그 지점은 감상자의 시선 높이에 따라 달라진다. 한편 벽드로잉 안에는 짧은 나무조각을 나선형으로 쌓아 만든 새집 모양의 캔버스 작업 위에 직선의 와이어를 한바퀴 돌려만든 원형의 와이어가 긴장감 있게 올려져 있다. 그리고 정면에서 봤을 때 직선이지만 측면에서 봤을 때는 원형인 두 개의 와이어가 방향을 달리해 벽드로잉과 함께 설치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이 한 데 조화를 이루어 보는 사람의 시점과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이고 유동적인 설치작업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렇듯 홍정욱의 작업에는 복잡하면서도 단순한 여러 쌍의 상이한 축들이 수직과 수평으로 교차된다. 그리고 각 작품은 그러한 두 축들 사이의 한 지점에 놓인다. 그것은 회화와 조각, 이성과 직관, 현상과 실체, 인공과 자연, 당기는 힘과 미는 힘, 노출과 폐쇄, 약한 재료와 강한 구조 등 흔히 공존하기 어려운 특징들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며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 , <-by>, 등의 작품제목과 전시제목인 는 다름아닌 이러한 두 가지 축의 공존을 의미할 것이다. 모든 작품은 경우에 따라 하나의 축에 더 가까워지기도 하지만 반드시 또 다른 축의 존재를 전제하며 그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존재한다. 그것은 일종의 '불안정한 균형'과도 같이 잠재적으로 이탈의 가능성을 담지하지만 동시에 그 이유로 강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진정한 균형은 고착된 안정이 아니라 그것의 변형가능성에서 오기 때문이다. 회화에서 출발한 그의 작업은 거듭되는 질문을 통해 회화로부터 한참 멀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그 흔적을 담고 있으며 하나의 축으로서 회화로의 회귀의 가능성을 언제나 배태하고 있다. 상이한 축들 사이의 거리가 멀어질 수록 작업의 다양성이 담보될 뿐이다. 현재 작가의 과감하고 새로운 시도가 짜릿하고 앞으로 변화의 행로가 궁금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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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hyun Shin

Aug 18, 2011 – Sep 07, 2011

지각과 존재의 역설
글. 조경진 I 철학


기존의 신치현의 작업들을 보아왔던 사람이라면, 그가 이번 전시회에서 내놓은 작품들에서 기존 작업들과의 양식적 연속성이나 방법적 일관성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의 작업들이 주로 해상도가 낮은 도시 전광판이나 광학 디스플레이에서 볼 수 있었던 디지털 이미지를 3차원으로 전사시키는 방식을 보여주었다면, 이번 작품들은 표면의 패턴을 통해 형상과 볼륨을 정의하는 한편, 조각 방법에 있어서도 판형들의 집적이 아닌 투조기법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진 조각적 문제의식, 세계와 존재를 보고 경험하는 방식, 그리고 삶의 근본적 물음 등에서는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자신의 조각들을 통해 문제 삼고 있는 것들은 지각된 이미지와 실재로 존재하는 것, 존재를 구성하는 것과 그러한 구성요소에 동일성을 부여하는 실체적 형상(Eidos, Form) 간의 불일치, 혹은 역설이다. 그의 작업들은 바로 이 역설을 해소하기 위한 여정의 결과물들이다. 그의 조각들에서는 하나의 실체가 다른 실체 안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 오랜 존재론적 원리, 즉 절대성의 원리라는 것은 거부당한다. 그의 조각에서 존재들에 불변적 고정성을 부여하는 실체적 형상들은 단지 지각자의 특정 관점과 위치에서만 존재하거나 패턴적 표면, 혹은 지각적 외양이나 윤곽으로서만 규정될 수 있을 뿐, 내부의 형이상학적 지지체를 함축하지 않는다. 그에게 존재의 본성은 지각 너머의, 즉 지각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물자체나 이데아적 형상과 같은 초월적 실체가 아니라, 지각에 의존하면서 동시에 지각과 마찬가지로 잠재적이고 유동적인 것으로 파악된다.
존재의 본성, 혹은 존재자의 존재방식을 형이상학적 실체나 본질이 아닌 지각적 사실들로 환원하려는 그의 조각적 시도는 지각과 존재에 대한 두 가지의 관습적 오해, 즉 지각은 하나의 수동적 수용활동이며 따라서 표상적이라는 전제와 지각 너머나 혹은 사물의 내부에 존재한다고 가정되는 것, 즉 실체에 대한 일루전을 제거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무엇보다 우리가 가진 지각과 존재에 관한 잘못된 이해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그가 기존의 작업들에서 택한 방법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도입부에서 말한 것처럼, 판형(板形)들의 외연적 집적의 방법이다. 관객은 신치현의 조각들이 판형들의 우연적 집적에 의한 만들어진 것임을 쉽사리 알아차릴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내적 구조라는 것은 외적으로 보이는 것들로부터 어떤 다른 것의 개입도 없이 투명하게 드러나게 되고, 내적 실체를 가정하는 일은 차단당한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부분들은 바로 앞이나 뒤의 형태로부터 직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기 때문에 내부는 논리적으로 투명하며 텅 비어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작업 형태는 2002년의 「얼굴」에서 최근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두 번째는 2009년의 展에서 선보였던 것으로서 인간의 부분 대상, 즉 얼굴, 팔과 다리 등이 타조, 악어, 사슴 등과 같은 전체로서의 동물형상을 구성하게 되는 방식이다. 이 조각들은 얼핏 데페이즈망의 기법과 언캐니의 감정과 연관된다는 점에서 초현실주의적인 것으로 읽힐 수 있겠으나, 신치현의 것은 부분대상들의 이종적 결합에서 오는 무의식적 느낌을 활성화시키려고 했다기보다는 요소로서의 부분대상과 그것에 통일성을 부여하고 있다고 가정되는 실체적 형상(Eidos)과의 불일치에서 오는 역설의 느낌을 더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가진 소박한 존재론적 가정들에 비춰보면 사실상 이 조각들은 전시 제목 그대로 에러다. 형상 안에 형상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해서 우리가 가지는 형상에 관한 관습적 오해를 제거한다. 다시 말해 형상의 동일성은 단지 외형적인 것 일뿐, 그 내적 구조는 비동일성으로 구성될 수 있다는 것이며, 어떤 존재를 바로 그와 같은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으로서 형상이 불변의 이데아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잠재적이며 유동적이고, 이중적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작품들에서도 판형집적기법은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어서 내적 실체로서의 형상의 관념이 차단되기는 마찬가지이다.
한편, 지각의 문제에 있어서 그는 기존의 수동적이고 재현적 지각 관념 대신에 잠재적인 것들을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서 능동적으로 현실화하는 생성활동으로 규정한다. 신치현에게 지각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유보적이며 잠재적인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에서 절대적 관람의 지점이나 거리는 존재하지 않게 되며, 지각의 대상으로서 그의 조각들에서 대상의 객관적 확실성이나 형상적 불변성이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예컨대, 우리가 「Walking Man-p4」(2010)를 볼 때, 만약 우리가 어떤 특정한 재현적 관점에서 머물고자 한다면, 형상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지점에 서서 그 조각을 보면 되는 것이고, 또 우리의 망막적 인상의 구조에 머무르고자 한다면 가장 가까이서 보거나 작품 표면 그 자체가 되어 보면 된다. 또 어떤 시점에서는 모듈적 판형들의 미니멀적 관계가 드러날 것이며, 또 어떤 시점에서는 추상적 이미지가 드러날 것이다. 만약 더 멀리서 본다면, 그것은 자코메티의 형상으로도 드러날 것이다. 즉 우리가 어떤 관점이나 위치에 있고, 또 어떤 전제를 가지고 있고, 우리가 무엇을 욕망하느냐에 따라,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대상들은 그때마다 다르게 현실화된다. 그의 조각에서 하나의 동일한 형상(무엇)을 발견하는데 그친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렇게 보고자 원했기 때문이지, 본래적으로 그것이 그러한 대상으로 결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결국 존재는 지각에 의존하게 되고, 지각은 잠재적 존재들을 구체적으로 현실화하고 생성하는 활동이 된다. 이렇게 될 때, 지각과 존재는 서로 분리되지 않은 채 동시적으로 생성될 수 있게 된다. 신치현이 존재를 지각으로 환원하고자 한다고 했을 때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투조기법을 취하고 있는 그의 근작들 역시 기존 작업들을 관류하는 문제의식과 접근방식에서 이해가능하다. 기존의 작업들에서 존재의 내적 실체나 형상은 외형적인 것으로 치환되었으며, 사실상 제거되었었다. 기존의 판형집적기법에서 내적 실체는 판들의 집적에 의해 논리적으로 투명하고 텅빈 것이 되었다면, 금번의 작업들에서 형상은 투조패턴에 의해 실질적으로 텅빈 구조로 제시되며, 단지 평면적 패턴들이 만드는 공간에 의해 부정적으로만 정의될 수 있을 뿐이다.
한편, 동일성(사람, 동물의 형상)이 비동일성(숲과 잎패턴)에 의해 구성된다는 점에서 2009년의 전에서 보인 바 있었던 존재에 관한 접근 방식을 공유하고 있지만, 지각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 이전의 작업들과 다른 접근법을 보이고 있다. 기존의 작업에서 고정된 객체에 대한 재현으로서의 지각을 문제 삼았다면, 이번 작품들은 형태심리학에서 가장 기본적인 지각적 전제로 삼고 있는 형태와 배경의 문법에 대해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지각적 사실을 통한 존재의 재해석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형태심리학에 따르면, 우리는 무엇인가를 동일성을 가진 하나의 형상으로 확인하기 위해서 대상을 배경과 분리시킬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형상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그 외의 것이 배경으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치현이 보기에 이것 역시 지각을 표상중심주의의 관점에서 잘못되게 가정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생각하기에 배경은 불변하는 형상 뒤에서 형상과 분리되어 그것을 두드러지게 하는 패턴적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존재를 적극적으로 생성시키는 힘을 가진 잠재성의 지대이다. 형상은 항상 형상이고, 배경은 항상 배경인 것이 아니라, 형상과 배경은 사실상 하나이며, 모두 잠재성의 지대에 속하지만, 우리가 어떤 것에 관심을 갖는 순간 배경이 형상으로 현실화될 뿐이다. 얼핏 이번 작품들은 단순히 위장(camouflage)의 개념을 형상화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숲이나 숲의 잎패턴으로서의 배경과 사람내지 동물의 형상의 관계를 역전시켜서 배경이 형상을 정의하도록 만든 것이다. 실제 그의 조각에서 배경은 패턴적 표면으로 주어지고, 이에 의해 존재의 내적 실체는 완전히 지각적 표면으로 환원된다. 이렇게 되면 존재는 고스란히 지각으로 환원되고, 그 때 지각이란 배경 속에서 고정된 형상을 찾아내는 일이 아니라, 잠재적 배경에 한정성의 형식을 부여해 현실화시키는 활동이 되는 것이다. 이번 작품들 역시 존재의 존재방식을 지각활동으로 일원화하려 파악하려고 하는 것과 맞닿아 있다고 하겠다.
신치현에게 지각은 외부의 대상을 내적 이미지로서 복제하는 활동이 아니며, 그 자체로 존재하는 와중에 있는 활동이며 무엇인가를 존재시키는 활동에 다름 아니다. 그에게 지각활동은 지각하는 자와 지각되는 것이 함께 생성되는 활동이며, 잠재적인 것이 현실화되고, 미결정적인 것이 구체적으로 결정화되는 사건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근작들을 비롯한 그의 전 조각들은 지각한다는 것, 혹은 더 특수하게 봄의 활동을 통해 존재하는 것을 이해하려는 행위의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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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gjoo Kim

Undertone

May 19, 2011 – Jun 18, 2011

비하인드 스토리 _ 함의
글. 윤형주ㅣ가인갤러리 큐레이터

“이번 작업은 나에게 던져진 물음과도 같은 공간에 대한, 형태가 가진 의미에 대한, 그 기저에 감추어진 함의를 찾는 일이었다. 모든 것은 관계에 대한 것, 그들의 좌표에 관한 것인지도 모른다.” - 작가노트 중에서

문제 1. 그래프와 수식의 상관관계를 구하라.
정방형의 교실 안 직사각형 책상에 앉아, 칠판에 그려진 함수 그래프와 수학기호들을 아리송한 표정으로 번갈아 쳐다보는 한 소녀가 있다. ‘좌표평면 위 저 곡선’과 ‘y=x²+2x+1’이라는 수식이 어떻게 같다는 말인가. 골똘히 생각해도 답은 늘 틀렸고, 그럴 때마다 해결방법과 정답이 주어졌다. 그러나 소녀는 의심스러웠다. 단지 ‘틀렸다’는 통보를 받았을 뿐 자신의 손으로 양자의 관계를 검증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수학자 피타고라스에게 만물의 근원은 ‘수’였고, 이를 탐구하기 위한 수단이 ‘숫자’였다면, 김정주에게 그것은 ‘공간과의 관계’와 ‘스테이플러 철침’이다. 나를 둘러싼 세계는 무엇이고, 나는 그 세계와 무슨 관계를 갖는가. 그런데, 문제에 앞서, ‘왜 하필 스테이플러 철침’인가.
“반짝이는 차가운 물성이 손에 와 닿는 감촉이 좋아요. 유닛을 하나하나 이어 붙여가며 집적하는 과정도 재밌고요.”
김정주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다거나 혹은 ‘틀렸다’고 판단된다면, 질문을 바꾸어보겠다. 수학자들은 세계를 탐구하기 위해서 ‘왜 하필 숫자나 수학기호들’을 사용하는가. 왜 아라비아 숫자 ‘3’을, 집합을 표시하는 기호 ‘⊂’를, 무한대를 표시하는 기호 ‘∞’를 사용하는가.
피타고라스가 물질 너머의 순수한 형식적 원리인 수로 세계의 근원을 설명하려 했다면, 김정주는 스테이플러 철침을 일일이 이어 붙여 세계를 측정하고 검증한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TV를 켜기 위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리모컨처럼, 김정주에게 그것은 나를 둘러싼 세계를 깨워 살아나게 하는 도구이자, 감각의 확장인 것이다.
또한 그것은 김정주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적인 즐거움일 뿐만 아니라 세계를 직접 경험하게 하는 촉각의 기쁨을 선사한다. 반짝이는 작은 유닛을 만지작거리며 작가가 체험했을 세계는 자신의 두 발로 걸어 조선의 영토를 측량한 김정호의 그것과 닮았다. 자신이 직접 세계를 재어보려는 욕망이 김정주에게 스테이플러 철침을 만지게 한 것이다.

문제 2. 아그리파(Agrippa) 조각상을 그리시오.
스케치북을 세운다. 세로로 4등분 한 후 한쪽 눈을 감고 연필을 이용해 비율을 측정한다. 큰 면을 분할해서 형태를 잡되, 직선에서 곡선으로 밀도를 높이면서 화면에 옮긴다. 이때 명암의 변화를 살펴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몇 차례의 ‘제작과 조응(making and matching)’의 시간이 흘렀고, 그림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정해진 순서를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실감(實感)이 나지 않는다. 도대체 저 앞에 놓인 아그리파 조각이 내가 그린 스케치북 속 이미지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하면 3차원의 대상을 2차원의 화면에 담아낼 수 있을까. ‘입체’와 ‘평면’ 사이의 이러한 간극을 극복하는 문제는 사진이 발명되기 전 모든 화가들의 고민이었고, 투시원근법의 발명은 이를 해결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사실상 우리의 지각은 눈에 들어오는 혼란스러운 시각적 단편들을 뒤늦게 하나의 구조로 정리할 뿐이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있는 그대로의 지각에 따라 자신이 받아들인 사물을 화면에 재구성한 세잔의 ‘체험된 원근법’은 이후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한편, 19세기 무렵 탄생한 사진은 이러한 회화의 한계를 광학적 방법으로 극복하고 실재와 똑같이 복제하는 획기적인 고안물로 여겨졌다. 그러나 사진 역시, 사물의 표면을 반사하는 빛의 기록일 뿐 사람의 실제 지각과는 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더 이상 공간을 평면에 재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사라졌다.
화실의 조각상 앞에서 3차원을 2차원으로 전환할 때 일어나는 ‘변형’이라는 미술사의 오랜 문제에 맞닥뜨린 김정주는 무엇보다도 우선 ‘감’이 잡히질 않았다고 한다. 수학문제 앞에서 만큼의 암담함은 아니지만 여전히 ‘실감’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김정주는 이를 직접 검증해 보기로 한다. ‘3차원의 사물을 직접 만든 후에 사진으로 촬영해보면 어떻게 될까?’ 김정주의 작업에서 조각과 사진이라는 두 장르의 혼용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도시를 모티브로 가상의 세계를 구축하고 탐구했던 <더 시티>, <매직랜드>를 거치면서 김정주의 관심은 인간의 끊임없는 구축성과 욕망이라는 큰 틀을 견지한 채, 또 다른 가상의 공간, 컴퓨터 매트릭스가 만들어내는 공간으로 확장된다. 3차원의 공간이 사진기에 의해 사진이라는 2차원의 이미지로 바뀌어 기록되는 것처럼, 컴퓨터 속 가상공간이 렌더링이라는 과정을 통해 2차원의 이미지로 바뀌는 과정이 흥미로웠던 것이다.
이때 스테이플러 철침으로 집적된 오브제와 그것이 놓인 공간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장면을 다양한 카메라 워크로 연출한다는 측면에서는 동일하지만, 그러나 김정주는 이번 작업에서의 무게중심을 ‘가상’보다는 ‘실측’으로 이동한다. 사과와 오렌지는 그리고 찻잔과 병과 접시는 가상의 빌딩이나 첨탑이 아니라 실제의 물리적 사물들을 실측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렌더링 과정에서 탄생한 사과 역시 스테이플러 철침의 실제 사이즈를 컴퓨터에 입력한 후 프로그램이 집적하고 구축한 장면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작가가 손으로 직접 만든 후 형광녹색을 칠해서 사진으로 촬영한 ‘사과’와 컴퓨터 프로그램이 렌더링을 통해 만들어낸 ‘사과’가 보여주는 이미지의 대조(contrast)와 유비(analogy)이며, 특히 눈이 좋은 관람자라면 영상작업에서 숨겨진 ‘함의’ 한 가지를 발견하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문제 3. 왜 세잔인가.
어린 시절 종종 놀러가곤 했던 이모네 가게. 나는 항상 한 쪽 벽면에 걸린 큰 그림에 눈길이 갔다. 회색이 도는 푸른빛의 무언가가 화면을 크게 자르던 그 그림에서 나는 단단하면서도 면면들이 숨 쉬는 마티에르를 보며 골똘히 이런 생각을 했다.
‘이 그림은 아름답지만 구도가 좀 이상하다. 이 부분이 좀 더 작아야 하지 않을까.’
꽤 나중에 나는 그때 그 그림을 그린 화가가 화면 속 구도와 구성의 형식을 치열하게 실험하며 현대 미술의 지평을 열었던 폴 세잔(Paul Cézanne)임을 알게 되었다.
김정주의 이번 전시는 어린 시절 보았던 세잔의 그림이 던져준 ‘구도와 구성의 문제’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보려는 시도에서 출발했는지도 모른다. 전작 <더 시티>와 <매직랜드>에서 보여준 수직적 쌓기의 본능은 <투명한 벽>이라는 수평적 탐험을 지나 공간 속에 놓인 다양한 사물들에게로 옮겨갔다. 이 과정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보일 수는 있다고 해도 그 사물이 반드시 세잔의 ‘사과와 오렌지’일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세잔의 정물화는 부유하는 빛을 쫒느라 놓쳐버린 인상주의자들의 사물로부터 견고함과 깊이를 되찾게 해주었음은 물론, 산만하지만 실제인 지각의 모호함을 인정함으로써 ‘고정된 정신의 눈이 아니라 움직이는 육체의 안구’로 사물을 바라보게 했다. 특히, 김정주에게 영감을 준 것은 화면에서의 구성과 구도에 대한 세잔의 집요한 탐구였고, 이를 따라 실현해보는 과정에서 김정주만의 방식과 재해석을 거친 다양한 작품들이 완성되었다. ‘사과와 오렌지’ 3연작은 테이블 보 아래로 무너져 내리는 사물들의 구성이 주는 묘미와 함께 배경과 사물의 뚜렷한 대비감을 주고, ‘죽은 자연’은 스테이플러 철침 격자들 간의 팽팽한 긴장감과 밀도를 잘 드러내고 있으며, 이에 반해 ‘모서리와 사과’는 회화적인 드로잉을 연상시키는데, 천을 가까이 당기고 조도를 조절해 보다 평면적인 구도를 설정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전시 <함의>는 한 마디로 작가 김정주가 과거의 시간 속에서 길어 올린 미결의 문제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이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문제가 제시되고, 그 문제를 풀기 위한 단서들을 찾아 과정을 따라가면 전시도 끝이 난다. 중요한 것은 답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그 답을 어떻게 얻었는가 이기 때문이다.

To Be Continued...
물리적인 세계의 전부처럼 여겨지던 서울이라는 도시를 떠나 프랑스 북동부 시골마을 샹파뉴(Champagne)에서 지내는 동안 김정주에게는 또 다시 혼돈이 찾아왔다. 여기는 어디고, 나는 누구인가.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동시에 공존하는 그 시골마을에서 김정주는 자신이 떠나온 공간 서울이 과연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김정주에게 자신을 둘러싼 물리적인 세계가 달라진다는 것은 또 하나의 풀어야 할 문제가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시장 한 켠은 따라서, 새로운 문제풀이를 위해 마련된 김정주의 아이디어 노트이자, 아직 측정해보지 않은 세계를 담기 위한 예고편이다. 사진 속 거미줄을 닮은 반짝이는 작은 체인은 왜 그곳에 걸려 있는가. ‘9 x 9’ 라는 이름의 구성 실험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리고 펜 드로잉 두 점은 왜 그곳에 함께 놓였어야만 하는가. 김정주의 다음 전시가 기다려지는 이유는 이 예고편에 담겨 있는 그 ‘함의’가 무엇인지 궁금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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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hythm in Art

Jan 11, 2011 – Feb 26, 2011

앤디 워홀(Andy Warhol)
앤디 워홀(1928~1987)은 현대미술계의 철학과 패러다임을 바꾼 아티스트로 평가받는 세계적인 작가로,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은 작가의 대표적인 실크스크린 기법과 다이아몬드 가루를 재료로 아름답게 조화시킨 ‘슈즈’ 입니다. 이 작품은 일상적인 소재를 예술로 승화시킨 앤디 워홀의 예술세계를 잘 보여주는 수작으로, 대중들에게 잘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예술성이 이미 검증된 작품이라 할 것입니다.


콘라드 빈터(Konrad Winter)
오스트리아 출신의 콘라드 빈터(1963~ )는 주로 유럽도시의 풍경과 관광지의 고풍스러움을 알루미늄 위에 자동차 도료라는 현대적인 소재를 사용하여 재해석한 회화로 유명합니다. 컴퓨터의 픽셀처럼 일정하지 않은 색면들로 그려진 그의 작품들은 가까이서 보면 추상회화처럼 보이지만 일정 정도 거리를 두고 보면 작가가 그리고자 한 대상이 보이는 특징을 가집니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은 광안대교를 포함한 부산의 풍경을 그린 것으로, 컬러의 보색 대비나 교차와 결합을 반복하는 색점들의 배치 그리고 올록볼록한 엠보싱 표면이 잘 어우러진 작품입니다.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현대미술의 ‘미스터 데스(Mr. Death)’, ‘무서운 아이’, ‘컬트 조각가’ 등 다양한 별명만큼이나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영국출신의 작가 데미언 허스트(1965~ )는 ‘yBa’의 기수 혹은 현대미술의 영역을 뛰어 넘어 이미 이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 하였습니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 역시 대중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지닌 그의 대표작으로, 색점들의 규칙적인 배열이 주는 리듬감과 정중동의 감흥 이면에는 삶을 위해 처방된 신경안정제의 과다가 불러올 죽음의 메시지를 통해 삶과 죽음은 결국 한바퀴의 원이라고 역설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프레드 샌드백(Fred Sandback)
프레드 샌드백(1943~2003)은 40여 년의 작업 기간 동안 일관되게 채색된 아크릴 실과 탄성이 있는 노끈, 금속 와이어 등을 사용하여 공간을 드로잉하는 설치작업으로 명성을 얻은 세계적인 작가로,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은 그의 웍스온 페이퍼입니다. 재패니즈 페이퍼 위에 신중하게 배치된 날카로운 직선들은 맞닿은 지점에서 서로를 마주 당겨 3차원의 환영을 빚어냅니다. 평면 위에 그려진 1차원의 직선들로 3차원을 그려내는 그의 단단한 선에서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 건축적 엄격함마저 느껴지며, 몇 개의 선이 만들어내는 규칙적인 리듬에서는 무한한 에너지가 흐르는 듯합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분단시대 독일회화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우리시대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게르하르트 리히터(1932~ )는 회화의 본질을 끈질기게 탐색하며 구상과 추상, 리얼리즘과 형식주의의 간극을 자유롭게 넘나든 작품세계로 유명합니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 역시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무채색의 색조와 역동적인 공간 구성으로 알프스 산의 풍경을 묘사한 장면이 일품입니다.


제이슨 샐러번(Jason Salavon)
미국 출신의 미디어 아티스트 제이슨 샐러번(1970~ )은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주요 미술관과 갤러리의 전시는 물론 휘트니 비엔날레를 비롯한 다양한 국제전시에 초대되는 작가입니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 은 그의 작품세계를 잘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스탠리 큐브릭의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 마틴 스코시즈의 <택시 드라이버>,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 등 세 편의 필름 안에서 수십만 개의 프레임 각각의 평균색을 추출한 후, 컴퓨터 프로세싱의 과정을 거쳐 중심에서 바깥쪽으로 내러티브의 흐름에 따라 재배치한 디지털 사진입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작가는 과거의 경험이나 생활 속 사물들이 하나의 보편적인 이미지로 각인될 뿐 각각의 개별적인 이미지는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말하고 있습니다.


줄리안 오피(Julian Opie)
줄리안 오피(1958~ )는 이미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영국 작가로 동시대를 대표하는 탁월한 아티스트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의 명성은 전시나 아트 페어에서는 물론 유럽과 미국, 일본 등지에서 진행된 버스 광고물, 교통 표지판, 쇼 윈도우, 지하철이나 공항의 환승로 등 공공미술 프로젝트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픽토그램(pictogram)을 연상시키는 둥근 머리와 단순한 선으로 이루어진 전신상, 그리고 작가 주변의 인물을 클로즈업해서 묘사한 반신상을 다룬 이미지들입니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은 총 다섯 점으로, 그의 대표적인 인물상 애니매이션 LCD와 정적인 프레임 안에서 역동적인 순간을 절제된 단순한 선들로 포착한 대형 작품 두 점을 비롯해, 시간이 반복되면서 만들어내는 리듬을 통해 고즈넉함과 쓸쓸함, 담담함의 감정이 반복적으로 느껴지는 풍경 LCD 두 점이 포함됩니다.


니브 오말리(Niamh O'malley)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니브 오말리(1975~)는 2004년 뉴욕현대미술관 산하의 P.S.1의 레지던시 보고전시부터 뉴욕 화단에 알려졌으며, 베니스 비엔날레에 아일랜드 대표로 참여하는 등 세계 도처에서 자기 작업을 선보이고 있는 주목받는 작가입니다. 그녀는 주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린 후, 그 위에 실재의 장면을 포착한 비디오 프로젝션을 투사시키면서 가상과 실재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작업으로 유명합니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업은 이러한 영상들을 제작하기 위한 개념 드로잉(concept drawing)으로, 창문이나 다리, 구름, 풀, 밤하늘 등을 연필로 섬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시적이고 서정적이며 대지를 사랑하는 아일랜드인의 정서를 느낄 수 있게 합니다.


니콜라 샤르동(Nicholas Chardon)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니콜라 샤르동(1974~ )은 일상의 오브제를 이용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변형시켜 작품을 완성하는 현대미술의 대표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가입니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 역시 그의 대표적인 회화로, 캔버스를 감싼 체크패턴 천을 당길 때마다 매번 달라지는 우연적인 효과에 기대어 기하학적 추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자신만의 유머와 재치를 더해 작품 감상의 재미를 북돋우고 있는데, 흰색과 검정의 또렷하고 담백한 색감이 주는 시각적인 즐거움은 물론 리드미컬하게 흘러가는 곡선의 유연함은 회화에서 음악적인 리듬감을 느끼게 하며, 이와 같은 조형성이 인테리어 효과를 배가시킴은 물론일 것입니다.


로버트 롱고(Robert Longo)
미국을 대표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작가이자 뉴페인팅의 기수로 손꼽히는 로버트 롱고(1953~ )는 연극 무대에서 격렬한 연기를 하는 듯 과장된 제스처를 보이는 인물들을 담은 ‘도시인(Men in the Cities)’ 시리즈로 유명합니다. 1980년대, 인간이라는 존재가 문명의 시스템에 예속된 노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간파했던 작가는 작품 속에서 일정한 권위와 위치를 지니고 있지만 고통에 춤추듯 몸부림치는 현대인의 보편적인 삶을, 그리고 팍팍한 현대사회의 모습을 표현했습니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 역시 그의 대표적인 도시인 시리즈로, 일반적인 춤 사진과 달리 강력한 에너지와 상징성이 돋보인다 할 것입니다.


솔 르윗(Sol Lewitt)
엄격하고 끊임없는 기하학적 연구와 개념의 탐구를 통해 서양미술사의 한 획을 그은 세계적인 작가 솔 르윗(1928~2007)은 예술을 기본적인 형태로 환원시키는 미니멀리즘을 넘어 개념의 조작을 통해 형태를 결정짓는 예술의 추상적 방법을 제시한 작가로 유명합니다. “예술작품이 어떻게 보이냐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라고 말하는 작가는 조형물의 결과가 아니라 거기에는 표현되어 있지 않은 미술가의 관념에서 작품의 가치를 찾아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 역시 대담한 원색의 곡선들이 강한 율동미를 선사하지만 보이는 ‘형상’ 그 자체가 아니라 형상을 존재하게 만드는 ‘개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수작으로 평가받습니다.


시튼 스미스(Seton Smith)
독특한 느낌의 서정적인 사진으로 파리와 뉴욕을 비롯한 전 세계 미술계에 잘 알려진 미국 출신 사진작가 시튼 스미스(1955~ )는 일상 오브제를 찍은 정물사진과 실내 공간을 찍은 공간사진, 자연의 특정한 일부분을 찍은 풍경사진 등 인물을 배제한 채 초점을 흐리는 방식으로 촬영된 사진작품으로 유명합니다. 이번에 전시되는 사진들 역시 그녀의 대표작으로, 사진 속 대상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흐릿한 화면과 단색조의 서정적인 색채감으로 인해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의 지각에 따라 다른 느낌과 해석을 갖게 할 것입니다.


샤오제 시에(Xiaoze Xie)
뉴욕을 중심으로 전 세계 무대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중국출신의 회화작가 샤오제 시에(1966~ )는 도서관 구석에 쌓인 낡고 손때 묻은 오래된 책과 신문들을 소재로 축적된 것들이 드러내는 시간과 기억, 당대의 시대상과 역사를 보여주는 회화로 유명합니다. 작가는 학교 도서관 서고에 들어섰을 때 책들이 여러 층으로 빼곡히 꽂혀 있는 책장들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 모습에 압도당했다고 합니다.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한 그에게 그 모습은 일종의 건축적 형태이자 특정한 시각적 패턴으로 눈에 들어왔던 것입니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 역시 그의 대표작으로, 정제되면서도 힘찬 붓질과 정교한 묘사, 균형 잡힌 화면의 구성 등 조형적 측면 역시 뛰어난 작품이라 할 것입니다.


유병훈
웅대한 세계상이나 피안(彼岸)의 어떤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 주변을 둘러싼 자연을 포착하고 빛을 탐구하는데 주목한 작가 유병훈(1949~ )은 주로 ‘숲-바람’의 모티브를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습니다. 그의 그림에는 항상 주변 산천을 재현하려는 의지와 빛을 담으려는 의욕이 넘치며, 사각이라는 종래의 캔버스 개념을 떠나 원형 또는 반원, 불규칙한 형태나 종이작업을 넘나들며 경계를 확장합니다. 작품의 모티브는 일면 19세기 후반의 인상주의를, 특히 방법적인 측면에서는 쇠라의 점묘법을 사용하는 듯 보이지만 그에게 자연은 "열매를 맺게 해주고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빛"에 대한 외경심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에서 발상부터 다르다고 할 것입니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 역시 ‘숲-바람’ 시리즈 중 대표적인 수작으로, 그 속에서 기운생동의 에너지를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우환
한국 작가로는 백남준 이후 처음으로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 초대전이 기획되어 있으며, 일본 나오시마에 ‘이우환 미술관’이 건립되어 있을 정도로 인지도가 높은 이우환(1936~)은 한국은 물론, 일본 현대미술사에서도 큰 획을 그은 화가이자 조각가입니다. 그에게 예술은 일종의 우주공간이며, 무한에 이르는 장이고, 캔버스는 인간과 세계가 교섭하는 통로이자 문입니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은 조각이지만, 액자로 마감된 부조 조각으로 벽면에 설치 가능하다는 이점이 있음은 물론 그의 회화와는 또 다른 매력과 에너지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인현
이인현(1958~ )은 가공하지 않은 캔버스에 단색 유채물감만을 사용하여 간결한 화면을 구성하는 작가로서, 그의 작품에서 물감이 서서히 옅어지거나 진해지는 색의 번짐 효과는 그 자체로 어떤 물리적인 지층을 연상케 합니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 역시 그가 오랜 동안 작업해 온 ‘회화의 지층’ 시리즈 중 하나로 특정한 형상이 드러나지 않은 간결한 화면만으로 관람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저마다의 느낌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울러 깊고 풍부하며 정갈한 화면은 그 조형성 덕분에 해당 작품이 놓인 공간을 담백하면서 풍성하게 만들어 줄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천광엽
조형의 기본요소인 ‘점’을 활용하고 화려한 색채의 유희를 즐기는 천광엽(1958~ )은 국내 는 물론, 뉴욕, 도쿄, 오사카 등 해외에서의 개인전도 여러 차례 가진 국제적인 작가로 단순한 평면에서 벗어나 드러나는 부분과 감추어진 부분이 공존하면서 만들어내는 리듬감이 매력적인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점자’라는 촉각적인 언어를 통해 소통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그의 작업방식은 붓이 아니라 무수한 구멍을 낸 시트지에 안료를 바르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매끈한 표면을 완성시키는 특징을 가지며,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들 역시 이러한 감성과 매력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홍경택
몇 해 전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고가에 낙찰되며 한국 현대미술의 스타작가로 떠오른 홍경택(1968~ )의 작업은 현란하고 화려한 색채로 빈틈없이 꽉 채워진 화면을 특징으로 합니다. 음악에서 색을 느낀 칸딘스키처럼 색청능력이 감지되는 그의 작품에서는 음악적인 리듬과 멜로디는 물론 끊임없이 발산되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저런 소리가 모여 음악적 내용을 이루듯, 강렬한 채도와 다양한 이미지의 향연으로 완성된 그의 회화 속에서 한국적 팝아트가 갖는 매력을 한껏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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