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o Yeun Ahn

Dec 14, 2006 – Jan 11, 2007

작가노트


내 작업은 흑백, 파지티브와 네거티브, 순박함과 세련됨, 표면과 깊이, 물리적 충동과 심리적 과정 사이의 상호작용 가운데서 비롯된다.
나는 그 양쪽 사이의 경계를 관찰하고 각각의 영역으로부터의 일탈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거기서 나는 일반적인 기대심으로부터 특정한 패턴을 끌어내도록 만드는 긴장감(tension)을 경험한다.
그리고 난 후 나의 복잡한 느낌과 육체성은 단순한 형태로 변형된다.


Artist Statement


My works emerge from in the middle of the interplay between
white and black,
the positive and the negative,
naive and sophisticated,
surface and depth,
physical impulse and psychological process.
I observe the boundary between both, and I grab a moment of deviation from each bounds.
In there, I experience tension which intrigues me to draw a particular pattern from the general expectation.
Then, my intricate feeling and physicality resolve into a simple form.

EXHIBITION PAGE

Nicolas Chardon

Nicolas Chardon

Oct 26, 2006 – Nov 26, 2006

기하학 추상이 레디메이드를 만났을 때
글. 신혜영

흰색과 검은색의 기하학적 형태가 주조를 이루는 니콜라 샤르동(Nicolas Chardon, 1974- )의 회화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느낌을 준다. 그것은 20세기 초반 말레비치(Kazimir S. Malevich)의 검은 사각형부터 현대미술 작가 다니엘 뷔렝(Daniel Buren)의 흑백 줄무늬 작품까지 한 세기 가깝게 계속되어 온 특정한 기하학 추상의 계보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내밀히 살펴보면 우리는 샤르동의 회화가 단지 이러한 선임자들의 계보를 잇는 평범한 기하학적 추상회화에 그치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작품에 기하학 추상이라는 대표적인 모던 아트(Modern art)의 모티프를 가지고 와서 그것을 그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새롭게 변형한다. 그것은 모던 아트의 단순한 재생이나 계승이 아닌 모더니즘에 대한 동시대 예술의 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그린버그식의 협소한 의미의 모더니즘이 아닌 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모더니즘일 경우에만 굵은 글씨로 표기하기로 함)
샤르동의 기하학적 추상의 핵심은 그가 캔버스 대신 사용하는 체크패턴 천에 있다. 그는 모든 화가들이 캔버스를 그 틀에 씌우듯 ‘그리드(grid)’를 가진 기성 천을 캔버스 틀에 당겨 고정한다. 이 때 천을 당기면서 가해지는 균일하지 않은 물리적 힘에 의해 천의 씨실과 날실은 약간씩 틀어지고 그로 인해 천의 그리드 또한 변형을 겪는다. 이 위에 천의 질감을 살리기 위해 젯소를 칠한 뒤 그리드의 왜곡된 선을 따라 자신이 원하는 기하학적 형태와 구성을 그려넣고 나머지 부분을 흰 색으로 칠하는 것이 샤르동의 주된 작품제작 방식이다. 천이 팽팽하게 당겨짐으로써 생기는 그리드의 변화와 왜곡을 따라 기하학의 형태는 유연해지고 부드러워진다. 직선이 아닌 비일률적인 곡선으로 이루어진 그의 기하학적 형태는 이렇듯 작가의 의도에 따른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체크패턴 천의 물질적 특성에 따른 우연적인 결과에 의한 것이다. 이와 같이 체크패턴 천이라는 레디메이드 오브제는 샤르동의 기하학적 구성을 이끌어내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의 작품 제작방식은 이처럼 매우 쉽고도 명료하다.
우리는 이렇게 단순한 방법론과 한정된 수단으로 만들어진 그의 회화에서 생각보다 큰 시각적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그만의 부드러운 기하학 형태는 일반적인 기하학에서는 느낄 수 없는 리듬감과 율동감을 부여하며 그것이 당겨진 천의 체크패턴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트와 유머를 느끼게 한다. 사실상 체크패턴 천은 샤르동에게 그만의 기하학 형태를 그리기 위한 그리드를 제공하는 보조도구인 동시에 그 자체로 부차적인 시각적 효과를 지니고 있다. 예컨대 물감이 칠해지지 않은 캔버스 측면에는 작품마다 각기 다른 다양한 천의 패턴들이 존재하고, 회화의 화면에는 천의 미묘한 텍스쳐가 느껴진다. 또한 그림이 흰 벽에 걸렸을 때 천의 색과 패턴이 반사되는 모습은 관객에게 예상밖의 즐거움을 제공한다. 이렇듯 샤르동의 기하학 추상은 체크패턴 천으로 인한 비일률적인 곡선의 새로운 기하학 형태를 만들어내는 조형적인 특징 외에 재료의 물질적 특성으로 인한 시각적 다양성을 가진 독창적인 회화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회화가 흥미로운 것은 기존의 미술사에서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져 온 상이한 개념을 하나의 작품 안에서 자연스럽게 한 데 녹여 새로운 결과물로 변화시킨다는 점이다. 일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값싼 기성 천을 사용하여 기하학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그리드를 변형시키는 샤르동의 회화는 모더니즘의 주된 역사에서 배제되었던 레디메이드 오브제를, 모더니즘의 대표적 양식 중 하나인 기하학적 추상회화를 재해석하는 중요한 도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모더니즘의 재해석에 있어서 그는 모던 페인팅의 상투적인 요소들을 사용한다. 그가 빈번하게 시도하는 검은 사각형은 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검은 사각형은 말레비치가 처음 시도한 이래 절대주의(Suprematism)를 따르는 화가들을 비롯해 그 후 20세기 전반을 거쳐 많은 예술가들이 소재로 삼은 추상회화의 상징과도 같다. 샤르동은 이러한 모던 페인팅의 클리셰를 자신의 회화에 도입하여 기성 오브제의 물질적 특성과 그에 기반한 제작기법으로 그것을 새롭게 해석해내는 것이다.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과 뒤샹의 <샘>이 1913년 같은 해에 발표되었다는 사실은 샤르동의 회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흥미로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샤르동 회화가 지닌 의미를 더욱 명료하게 해주는 것은 그의 장소 특정적인(site-specific) 설치작업이다. 모빌의 형태로 제작되는 그의 설치작품은 체크패턴 천과 같이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는 베니어판을 재료로 한다. 베니어판의 양면에 단색 아크릴 물감을 칠한 뒤 그것을 구부려 부러뜨리고 두 부분으로 쪼개진 판넬을 천장에 매다는 방식을 취하는 그의 모빌은 회화의 제작방식이나 개념과 그대로 부합한다. 캔버스 틀에 천을 당김으로써 그리드가 우연적인 변화를 겪듯 판넬을 구부려 부러뜨림으로써 쪼개진 판넬의 모서리는 불규칙하고 매번 다른 모양을 띤다. 뿐만 아니라 회화에서 우연적으로 틀어진 그리드 위에 작가 자신의 의도대로 기하학적 형태를 그리듯이 모빌에서 역시 우연적 효과에 기대는 과정 외에 작가는 판넬의 분할 비율이나 설치의 위치와 구성을 더해 작업을 완성한다. 또한 회화에서처럼 모빌작업에서 역시 ‘모노크롬’이라는 모던 페인팅의 대표적인 클리셰를 자신의 방식대로 변화시킨다. 한편, 이러한 과정으로 만들어지는 샤르동의 설치 작업은 항상 그 공간에 맞추어 새로 제작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전시장의 회화작품 설치를 마친 후 그에 맞추어 한국에서 구한 베니어판과 아크릴 물감을 가지고 1대 2 비율로 분할한 빨간색 모빌을 만들어 한쪽 공간에 매달고, 같은 비율로 분할한 또 다른 모빌을 전시장의 또 다른 공간의 바닥에 설치하였다. 사실상 설치작업을 포함한 모든 작품의 디스플레이를 각각의 전시공간에 맞추어 즉석에서 제안하는 그의 작업 전반은 현대미술의 유동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듯이 샤르동의 작업이 보다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모더니즘과 이를 포함한 예술의 역사에 관한 뚜렷한 입장을 가진 현대미술이라는 점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가리켜 일종의 모더니스트라고 천명하거나 자신의 독창적 기하학 추상을 ‘또 다른 모더니즘(alter-modernism)’이라는 신조어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는 평면성과 같이 회화의 형식적인 측면에 치중한 그린버그식 모더니즘이 아닌 새로움에 대한 추구라는 모더니즘의 진정한 본질에 동조하는 그의 확고한 입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1960년대 초 추상표현주의가 쇠퇴하고 그린버그의 형식주의적 관점으로는 더 이상 설명이 불가능한 앤디 워홀의 <브릴로 박스>가 등장한 것을 두고 단토(Arthur C. Danto)는 예술의 역사를 대변하는 ‘모더니즘’이 종말을 고하고 역사 이후(post-history)의 ‘동시대 (contemporary)’ 예술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단언했다. 그러나 과연 모더니즘은 끝이 났고 예술의 역사는 다음 단계와 단절된 채 분리되어 진행되고 있는가? 워홀의 <브릴로 박스> 이전에 뒤샹의 <샘>이 있었음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샤르동이 생각하는 모더니즘은 기존 전통의 가치에 대해 건강한 회의를 갖고 계속하여 새로운 것을 내놓을 수 있는 예술에의 태도를 뜻하는 것이지 결코 특정한 양식의 강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에게 모더니즘은 지속 가능한 것이며 ‘동시대’ 예술은 모더니즘과 양립 가능한 셈이다. 요컨대 니콜라 샤르동은 모더니즘을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새롭게 재해석하는 뚜렷한 목적으로 동일한 원리와 도구를 사용해 조금씩 차이가 나는 다양한 양상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분명한 개념을 지닌 ‘동시대’ 미술가임에 틀림없다.


The geometric abstraction met with ready-made
Text. Hyeyoung Shin
Translation. Jawoon Kim

Familiarity is the first impression that one would have when he or she encounters the paintings of Nicolas Chardon (1974- ), which consist mainly of geometric forms in white and black. For they remind one of the genealogy of a specific tendency of geometric abstraction which has continued for almost one century from the black squares of Kazimir Malevich in the early 20th century to the works of Daniel Buren in the present day. Yet, even a slightly closer look at Chardon's works reveals that they do not stop at being familiar geometric abstract paintings that extend the genealogy. Chardon purposely takes one of the main trends of Modern art, that is, geometric abstraction as his subject matter, and transforms it through his own way.  Thus, his work neither reproduces nor inherits the convention of Modern art, but it contemporaneously reinterprets modernism (In this article, Modern with 'M' has a specific meaning like Greenberg and modern with 'm' has a generic meaning).
The essence of Chardon's geometric abstraction lies in his use of checkered pattern fabric instead of canvas. In the same way that most painters fasten a canvas into a frame, he stretches ready-made fabric with grid. When he does so, the wefts and warps of the fabric are slightly twisted by the irregular physical force of the stretching so as to alter the shape of each grid. Then, in order to emphasize the texture of the fabric, he applies gesso over the stretched fabric. After that, he draws geometric images along the twisted lines of grids, and paints the remaining parts white. The changes and distortions of grids generated by the tight stretching of the fabric allow the geometric images to be flowing and flexible. Hence, his geometric images consisted not of straight lines but of variable curved lines result not from his own arbitrary intention but accidentally from the materialistic property of checkered pattern fabric. The ready-made object of checkered fabric, therefore, plays a conclusive function in the generation of Chardon's geometric compositions, and as described above the process of his art-making is very simple and evident.
His paintings of such a simple methodology and limited means exceed one's expectation in terms of visual pleasure. His soft geometric forms possess rhythms unlike other usual geometric images, and the fact that they are originated from the checkered pattern of stretched fabric makes his geometric images witty and humorous. In fact, checkered fabric is a tool that provides Chardon with grids, which in turn let him make his own geometric images, and at the same time it in itself produces secondary visual effects. For instance, the sides of the support of each painting, which are not painted, are covered with fabric of various patterns, and the surfaces of his paintings subtly show the texture of the fabric. In addition, on the white walls, his works provide an unexpected pleasure generated by the reflections by the colors and pattern of the fabric. The originality of Chardon's work is explained not only by its formal feature of the novel geometric forms of irregular curved lines but also by its visual diversity caused by the materialistic attribute of its material.
What makes his painting interesting above all is, however, the fact that the elements that have been considered incompatible in the established art history are harmoniously combined in a single work into a novel outcome. For his painting, which transforms the most basic geometric element of grid, by use of low-priced ready-made fabric, employs a ready-made object, which was excluded in the mainstream of Modernism, to reinterpret geometric abstract painting, which is one of the main artistic tendencies of 'Modernism.' Moreover, in reinterpreting modernism he uses the conventional elements of Modern painting. This is scrupulously exemplified by his frequent use of black squares. It can be reasonably said that a black square is a symbol of abstract painting in the respect that many artists used it to create their works throughout the first 20th century including Suprematist painters since Malevich employed for the first time. Chardon newly interprets a clich?of Modern painting through the materialistic property of a ready-made object and the methods based on the property. The fact that both Black Square by Malevich and Fountain by Duchamp were shown in the same year of 1913 is attention-grabbing in understanding Chardon's work.
His site-specific installations make the meanings of Chardon's paintings clearer. His installation works in the form of a mobile also use a material that can be easily found, that is, plywood. After the both sides of plywood are painted with monochrome acrylic pigment, it is bent to be broken into two panels, which are then hung from a ceiling. The methodology and concept of his mobiles exactly correspond to those of his paintings. As grids undergo accidental changes by the stretching of fabric, the edges of broken panels are irregular and arbitrary. Furthermore, as in painting he makes his own geometric images on the accidentally distorted grids, Chardon does not just depend on certain accidental effects but adds his own decisions to complete his mobiles: the split ratio of the board and the location and composition of the installation. As in paintings, moreover, he transforms the representative cliché of Modern painting of 'Monochrome' also in his mobiles. Meanwhile, the installation works of Chardon made through this process are to be re-made in accordance to the spatial circumstance of a specific place. For this exhibition, after he installed his paintings, Chardon hung at one location of the gallery his red mobile made of plywood, which is divided into two panels in a ratio of 1:2, and acrylic pigment that he obtained in Korea, and placed another mobile (stabile) of the same ratio on the floor at another location. In fact, the mobility of contemporary art is also found in his overall artistic creations in the respect that he improvises the display of all his works including his installation works according to each exhibition space.   
Yet, what makes Chardon's work more fascinating, as mentioned above, is that it makes its standpoint on the history of art including Modernism clear. He refers himself as a kind of modernist and explains his original geometric abstractions by using a newly coined term of 'alter-modernism.' And this is originated from his determined attitude to agree not to the Greenbergian Modernism that concentrates on the formal aspects of painting such as flatness but to the true nature of modernism to pursue the new. Regarding the art scene of the 1960s when Abstract Expressionism declined and Brillo Box by Andy Warhol, which could not be explained from the Greenberg's formalist perspective in the 1960s, Arthur Danto concluded that 'Modernism,' which embodied the art history, had ended and the period of post-historical 'contemporary' art arrived. Yet, has modernism indeed ended and is the history of art being developed in the discontinuity with the next phase? How can one explain the fact that Duchamp's Fountain preceded Warhol's Brillo Box? The modernism pursued by Chardon is an artistic attitude to produce something new through healthy skepticism toward the pre-existing conventions in art world, not the constitution of the dogmata of a specific artistic mode. For him, thus, modernism can be continued and 'contemporary' art is compatible with modernism. Undoubtedly, Nicolas Chardon is a 'contemporary' artist with a resolute artistic attitude to reinterpret modernism in his own distinctive way while using identical principles and tools to create various artworks of delicate dif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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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hyeon Lee

Lee Inhyeon

Sep 14, 2006 – Oct 15, 2006

'회화의 지층'이라는 텍스트
글. 신혜영 I 가인갤러리 큐레이터

번짐과 색의 계조(階調, gradation)를 중심으로 가공하지 않은 캔버스에 단색 유채물감을 사용하여 극히 간결한 화면을 완성하는 이인현의 회화는 ‘회화의 지층(L’épistémè of Painting)’이라는 동일한 제목으로 십여 년 이상 지속되어 왔다. 물감이 캔버스에 스며들어 번져 나오는 양태와 서서히 옅어지거나 진해지는 색의 계조는 그 자체 ‘회화의 지층’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그가 사용하고 있는 ‘지층’이라는 어휘는 단지 그러한 외형상의 특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지식의 고고학"에서 미셸 푸코가 말한 ‘에피스테메’ 개념을 염두하여 붙여진 것임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푸코는 그 시대 모든 담론의 배경이 되는 인식의 구조가 있으며 그것이 땅의 지층처럼 시대별로 구분됨을 주장하고, 그러한 지층을 가리켜 ‘에피스테메’라 칭했다. 따라서 이인현이 그의 회화작업 전반을 ‘회화의 지층’으로 통칭하는 것은 자신의 회화가 단순한 감상의 대상으로서 하나의 예술작품이기 보다는 이 시대 모든 회화를 아우르는 기본 원리, 즉 현대회화의 ‘에피스테메’를 탐구하는 일련의 시도로서 읽혀지기를 바라는 작가의 의지 표현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 하다. 십여 년 이상 계속되어 온 그의 '회화의 지층' 연작이 회화의 물성과 이미지, 정면과 측면, 평면성과 즉물성 등 회화의 본질과 그 존재 방식에 관한 연구임을 고려할 때, 이 제목은 작가 자신의 일관된 예술태도를 피력하기에 꽤 적절한 명칭임에 틀림없다.
처음 작품을 발표한 1990년대 초반부터 2003년 최근 전시에 이르기까지 이인현의 '회화의 지층'을 둘러싼 다양하고 심도 있는 비평과 논의들이 있어 왔다. 발표초기부터 미술계 평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그의 회화는 한편으로는 바로 이러한 점(이인현=회화의 지층) 때문에 매번 일종의 유명론적(唯名論的) 증명에 시달려 온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뜬금없이 ‘어느 작품이 회화의 지층이냐’고 찾기도 하고, 나름대로 ‘회화의 지층을 보았다‘는 행복한 결론에 도달하기도 한다. 또는 ’언제까지 회화의 지층이 계속될 것인가‘ 자못 진지하게 궁금해 하기도 하는데, 이런 반응은 대부분 이미지의 결핍에 따른 금단증상일 경우가 많다. 이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요구하고 이전보다 더 발전된 모습을 추구하는 목적론적인 모더니즘의 단선적 역사관에 따른 것이며, 필자는 그러한 근대적 사고에 대한 거부야 말로 이인현의 회화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중심 테제라고 본다.
이인현의 '회화의 지층'은 전통 회화의 역사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던 미술 전반의문제들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기존 회화의 논의에서 이분법으로 구조화되어 있던 것들에 반기를 드는 ‘회화에 관한 회화’다. 그는 기존 미술사의 논의에서 양립할 수 없었던 것들을 그 경계선상에서 자신만의 역설적인 논법으로 양립 가능하게 만든다.
먼저 살펴볼 것은 그간 '회화의 지층'을 둘러싼 논의들 가운데 가장 자주 거론되었던 정면과 측면에 관한 이인현의 입장이다. 그는 정면 중심의 회화의 역사에서 가려져 있던 측면의 위치를 부각시키기고자 했다. 그의 회화에 공통된 10cm 폭의 측면은 물감이 스며드는 모습을 통해 회화의 물질적 본성과 그 생성과정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화면이다. 그의 회화에서 측면은 정면과 함께 감상되어야 할 화면의 연장이자, 물질이 만들어내는 회화의 깊이를 물리적으로 보여주는 – 전통적 회화가 삼차원 환영을 통해 회화의 깊이를 추구하는 것과 달리 - 효과적인 방편이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제작 당시 측면이었던 것이 보여질 때는 정면이 되기도 하며, 심지어 면과 면 사이의 모서리가 화면의 중심이 되기도 한다. 이렇듯 그에게 회화의 화면은 정면과 측면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떠나 언제든 서로의 자리를 바꿀 수 있는 가역적이며 고정된 중심이 부재한 유동적인 성질의 것이다.
정면과 측면의 유동적 관계는 물성과 이미지로 이어진다. 그의 회화에서 정면과 측면이 정해진 주종의 관계가 아니듯 기존 회화에서 양립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던 물성과 일루전은 '회화의 지층'에서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분리 불가능한 것이 된다. 균질하게 칠해진 단색 화면과 물감이 번진 화면 모두는 그 자체 확연히 물성을 드러내지만, 그와 동시에 푸른 물감이 번져나간 형상과 그것이 단색면과 병치되어 보여주는 이미지는 수평선을 사이에 둔 강가 풍경이거나 바다 위에 떠있는 섬들의 모습과 같이 구체적인 일루전을 드러낸다. 점 작업의 경우에도 캔버스와 물감의 물성을 하나의 화면 안에서 잘 드러내면서도 보는 사람에 따라 내리는 빗방울이나 바다 위에 떠 있는 고깃배의 불빛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렇듯 이인현의 회화에서 일루전은 작가가 의도한 자기 표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물질의 성질 자체에서 비롯된 우연적 효과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그는 '회화의 지층' 안에서 물성과 이미지 간의 뚜렷한 경계를 흐리며 그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캔버스와 물감이라는 모더니즘 회화의 절대적 본질을 견지한 채 바로 그 자체의 물성으로부터 모더니즘 회화가 거부한 일루전을 탄생시키는 역설적인 방법으로 말이다.
'회화의 지층'은 제작 기법과 재료 사용에서도 전통적 회화의 그것을 벗어난 고유의 역설을 담지하고 있다. 그는 캔버스에 유성물감을 사용하면서도 그것을 묽게 용해하여 짧은 시간 안에 균질하게 펴바르거나 순간적으로 내려놓아 번지게 함으로써 유화가 가지고 있는 두터운 마티에르를 피하고 수성의 느낌이 나게끔 한다. 이는 유화의 재료를 사용해 유화가 아닌 듯 보이게 하는 그만의 전략이다. 또한 그는 물감을 캔버스에 옮기는 과정에서 회화의 상징과도 같은 붓의 사용을 자제한다. 캔버스를 감싼 막대에 물감을 적셔 붓처럼 쓰거나 캔버스 천 자체를 붓대신 사용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며, 실제 붓을 사용할 때 조차 붓을 캔버스에 대지 않고 그저 물감을 옮기는 도구로써 사용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는 ‘붓질(brushstroke)’에 대한 전통적인 회화의 과도한 의미부여를 의도적으로 비틀고자 함이다. “물감을 묻히지 않은 맨 붓을 캔버스에 갖다 댄들 아무 흔적도 남길 수 없다. 그렇다면 사실상 붓은 영원히 캔버스에 닿을 수 없는 것 아닌가”라는 그의 말에는 이러한 의도가 잘 드러난다.
또한 '회화의 지층'은 캔버스의 전형화된 형식을 전복시킨다. 이인현은 전통적 의미의 2차원 평면이 아닌 일정한 폭을 지닌 ‘3차원 평면’의 장방형 캔버스 형태를 중심으로 그 높이와 너비를 변형하고 심지어 막대형 캔버스나 정육면체 캔버스를 시도하며, 그것들을 임의적으로 조합하기도 한다. 이렇게 두 폭, 세 폭,… 대여섯 폭으로 된 그의 회화는 ‘한 폭의 그림’이란 상투어를 보란 듯이 비웃는다. 뿐만 아니라 그의 완성된 작품은 부분적 해체와 재조합, 반복과 재생을 거친다. 이전 작품의 캔버스 천을 뜯어 낸 틀 위에 새 캔버스를 씌워 새로이 작업을 하고, 이렇게 제작된 작품을 이전 작품과 결합하여 또 다른 작품을 완성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에게 신작과 구작의 구분은 중요치 않으며 모든 작품은 개별작품으로서 가치와 의미를 지니기 보다는 '회화의 지층'이라는 작가의 전 예술행로에서 하나의 과정으로 자리할 뿐이다.
'회화의 지층'에서의 이 모든 시도는 예술작품에 대한 물신화와 예술가의 권위(authority)에 저항하는 작가의 의지에서 기인한다. 그는 예술작품을 신성시하거나 예술가를 신격화하는 예술의 근대적 신화에 반대한다. 사실상 그의 작업 행위는 단순한 노동의 반복 과정이다. 나름의 계산을 거쳐 제작에 들어간 이후 그는 일체의 상념과 욕심을 거둔 채 숨을 죽이고 동일한 시간과 긴장감으로 붓칠을 하고 순간적으로 물감을 내려놓아야 한다. 오직 캔버스와 물감을 만나게 하는 일에만 몰두하는 것이다. 그에게 회화의 화면은 작가의 노동을 통해 캔버스와 물감이라는 두 물질이 조우하는 장소일 뿐, 작가가 전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완성된 그의 회화에는 작가의 붓자국도 지문도 사인도 없다. 오직 물질과 그것이 만들어 낸 자발적인 일루전이 존재할 뿐이다. 이처럼 '회화의 지층'에서 작가의 역할은 최소화되며 작가는 작품에서 최대한 멀어진다.
작가주의에 반대하는 이인현의 이러한 예술에의 태도는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을 연상케 한다. 텍스트의 유일한 의미의 기원으로서의 저자를 상정하고 그러한 저자의 의도를 해독하는 것을 독서의 과정으로 여기는 기존의 문학작품에 대한 논의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바르트는 의미 발생의 근원으로서 저자의 절대적인 권위를 거부하고 모든 텍스트의 의미는 중의적이며 불확정적이라고 말한다. 중세 이후 인본주의와 더불어 생겨난 근대적 개념인 ‘저자(auteur)’는 항상 작품에 선행하며 작품을 부양하는 작품의 근원적인 존재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러한 저자의 개념을 전복해야 할 하나의 신화로 보고, 텍스트와 동시에 태어나고 언술행위 안에서만 자신을 소모하는 ‘필사자(scripteur)’의 개념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한다. 바르트가 말하는 현대적 의미의 필사자야 말로 언어라는 기원 외에는 다른 어떤 기원도 가지지 않은 채 선행하는 글쓰기를 모방하고 “바닥이 없는 거대한 사전으로부터 멈출 줄 모르는 글쓰기를 길어올리는” 진정한 의미의 작가인 것이다. 이럴 때만이 무한한 의미생산이 가능한 열린 공간으로서의 텍스트가 가능하며 텍스트의 의미의 통제권이 독자에게 옮겨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인현의 회화는 이러한 ‘저자의 죽음’이 비단 문학에서만 성립되는 것이 아님을 몸소 보여준다. 화가는 자신의 회화에서 유일한 의미를 산출하는 자기표현의 주체가 아닌, 회화와 동시에 태어나고 회화의 제작행위 안에서만 자신을 소모하는 자로서 계속하여 “이전의 몸짓을 모방할” 뿐이다. 독창성(originality)이란 예술의 근대적 신화가 만들어 낸 허상일 뿐 완전히 새로운 것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화가는 작품에 최종적인 의미 부여를 지연하면서 계속하여 그리기의 공간을 답사하는 자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인현은 '회화의 지층' 떠다니는 수없이 많은 기표(물성) 가운데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기의(이미지)를 방조하면서 회화 자체를 탐구하는 바르트가 말하는 바 진정한 의미의 작가 - 현대적 필사가 - 인 셈이다. 작업의 결과물로서 완결된 하나의 예술작품보다는 일련의 생성과정으로서의 예술행위를 보다 중요시 하며, 유사한 것들의 반복과 차이 속에서 그 의미를 더 풍부히 하는데 주력하는모습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것이 '회화의 지층'에서 이미지의 변화가 중요치 않으며 그의 '회화의 지층' 연작이 계속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삼년 만에 열린 이번 개인전에서 '회화의 지층'은 보다 다양하고 풍요로운 양상을 띤다. 단일한 종류의 연작을 선보인 지난 몇몇 전시들과 달리 이번 전시에서 그는 그간의 여러 제작 방법을 망라하여 그야말로 다채로운 ‘회화의 지층’을 보여 준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면과 면이 만나는 모서리에 가로선으로 물감이 번져 나가는 화면이다. 캔버스로 감싼 각목을 물감에 적셔 넓은 캔버스의 모서리에 갖다대는 방식으로 제작된 이러한 화면은 각목을 대는 각도와 시간에 따라 선의 형태와 길이가 달라지면서 섬이 되기도 수평선이 되기도 한다. 또한 이러한 일루전의 화면이 균일한 단색화면과 결합하여 두 폭이 맞닿아 이루어진 작품군은 그의 회화의 특징인 물성과 일루전의 줄타기를 매우 잘 드러내면서 전시의 한 주류를 차지한다. 이밖에 '회화의 지층'을 대표하는 기존의 면 작업과 이전에 비해 그 제작방식을 조금 달리한 – 이전에는 붓끝이 캔버스에 살짝 닿아 점의 가장자리가 더 진했다면, 이번에는 붓끝을 대지 않고 물감을 캔버스에 내려놓기를 반복하여 점의 중앙이 더 진한 색의 계조를 띠는 - ‘점’ 작업, 그리고 회화의 표면에 물감을 스치우는 가벼운 면 작업 등이 여러 점 선보인다.
무엇보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특히 이러한 다양한 양상의 작품들이 어떻게 한 공간 안에서 잘 어우러질 것인가에 주력했다. 이는 그의 작업이 하나의 작품으로 독립적인 완결성을 가질 수 없고 다른 작품들과의 관계항 속에서, 또는 과거의 작품들로부터 앞으로의 작품들에까지 연결되는 연장선상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임을 고려할 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런지 모르겠다. 이렇듯 반복과 차이 속에서 지속되어 온 의미의 다양한 층을 지닌 텍스트로서 '회화의 지층'은 이인현이라는 작가의 손을 떠나 관객에게 인도되며, 바닥이 없는 거대한 사전에서 계속하여 길어올릴 그 텍스트는 앞으로도 보는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운 해석을 가능케 할 것이다. 프러시안 블루의 유채물감과 가공하지 않은 생 캔버스라는 ‘상수’를 가지고 수없이 많은 ‘변수’를 만들어 내는 이인현의 회화에 대한 탐구가 '회화의 지층'이라는 이름으로 계속하여 더 많은 변주를 풀어내기를 기대해도 좋을 이유다.


The Text of L’épistémè of Painting
Text. Hyeyoung Shin I Curator of Gaain Gallery
Translation. Jawoon Kim

Lee Inhyeon’s extremely simple picture planes are created by his use of monochrome oil pigments on raw canvases while focusing on the spreading effect of pigment and the gradation of colors. Such work of Lee Inhyeon has been continued for more than a decade under the same title of ‘L’épistémè of Painting’. The way pigment permeates and ooze out canvas and the color gradation ranging from the lightest to the darkest themselves make one to picture ‘L’épistémè of Painting’ in his or her mind. Yet, it can be safely said that the more important reason that the artist entitles the entire work of his ‘L’épistémè of Painting’ lies in his aspiration that his paintings are not merely artworks to be viewed but a series of attempts to inquire into a fundamental principle that can encompass all the paintings of the present time, that is, the ‘épistémè’ (a concept of Michel Foucault) of contemporary painting. Considering that his L’épistémè of Painting Series that has been continued for a long time is his inquiry into the nature and ontological mode of painting, the title is quite apt to manifest the coherent artistic attitude of Lee Inhyeon.
L’épistémè of Painting of Lee Inhyeon is ‘a painting about painting’ in the fact that it questions the general artistic conventions, which have been accepted without reflective processes in the history of painting, and challenges the dichotomic structure of the existing discussions of painting. He makes what have not been comparable in the established art history comparable by use of his own paradoxical logic within the boundaries between them.
What has been most often said in the discussions of Lee Inhyeon’s L’épistémè of Painting is that he brought to the fore the lateral aspects of painting which have been shielded by the frontal perspective employed in the history of painting. The side of 10 centimeters wide, which is common to every work of his, is another picture plane on which the spreading process of pigments reveals the materialistic nature of painting and its becoming. In his work, the flank side of the canvas is the extended picture plane to be viewed together with the front and is used as an effective means to physically embody the depth of painting that material creates unlike conventional painting that pursues the element of depth through three-dimensional illusion. In addition, sometimes, what was to be the side during the production turns into the front, and further the edge becomes the center of the picture plane. As such, for Lee Inhyeon the picture plane is both something reversible where the front and the side can replace each other while refusing the rigid idea of dichotomy and something fluid without a fixed center.
Strong physical properties are revealed by both the evenly painted monochrome plane and the plane where pigment spread into warps of canvas, but at the same time the image created by the shapes produced by spreading blue pigment and their juxtaposition to monochrome plane makes a certain concrete illusion such as a riverside view whose middle is crossed by the horizon or islands floating in the sea. Thus, the illusion in L’épistémè of Painting is not created by the intent of the artist but accidentally generated by the properties of materials themselves. It may be thus said that the artist is walking on the rope that is fluctuating between physical properties and images while erasing the clearly drawn boundary between them. And it is through his own paradoxical method that both maintains the absolute attributes of modernistic painting such as canvas and pigment and creates out of physical properties of such attributes the illusions that modernistic painting refuses.
In L’épistémè of Painting the production methods and materials also escape from the convention of painting. He uses oil pigments on canvas, but he dilutes the pigments so that he can apply it evenly or let it spread when he drop it onto the canvas. In that way, he avoids the effect of thick matiere of oil painting and produces a watery impression. This is his own strategy to make a work that does not look like an oil painting despite his use of oil painting materials. In carrying pigment onto canvas, moreover, he contains himself from using a brush which is one of the fundamental instruments of painting. He very often uses a stick wrapped with canvas or canvas by itself as a brush. And when he uses a brush, he does it as a means to carry pigment to canvas without its touching the surface of canvas. This is to intentionally counteract the excessive meaning bestowed on brushstroke in conventional painting. He once said, “A brush cannot leave any trace on canvas without pigment. Then, isn’t it that a brush can never touch canvas?”.
L’épistémè of Painting subverts also the typicality of the form of a canvas. Lee Inhyeon does not use the two-dimensional flat surface of conventional painting. Instead, his basic form of a canvas is a ‘three-dimensional flat’ rectangular canvas with a certain width, and he varies its height and width, and even uses canvases in form of a stick or a cube. And sometimes he arbitrarily utilizes these diverse forms. His paintings of several panels loudly laugh at the hackneyed term ‘picturesque’. Further, his finished work goes through the processes of sectional dismantlement, reassembling, and reproduction. He tears canvas off from the previous work and covers the frame with new canvas to work on it, and this work gets to be combined with another previously finished work while completing yet another new work. Accordingly, the division of a new piece and an old piece has no importance to him, and every work denies individual significance and is just a part of his entire artistic path of ‘L’épistémè of Painting.’
All these attempts of Lee Inhyeon originate from his intention to repudiate the fetishism toward an artwork and the authority conferred upon the idea of an artist. He opposes to the modern mythology that deifies an artwork or an artist. In fact, his art-making consists of the repetition of simple labor. When he finished certain creative calculation, he eliminates all the thoughts and desires from his mind, and does brushwork and drops pigment with equal amounts of time and tension while holding his breath. He devotes himself only to make canvas and pigment meet each other. For he believes that a picture plane is just a place where canvas and pigment encounters each other through the labor of an artist, not a realm that an artist can fully control. One can find neither the brushstoke made by him nor his fingerprint nor his signature in Lee Inhyeon’s finished work. There exist only material and the spontaneous illusion produced by it. As such, in L’épistémè of Painting the role of the artist is minimized and the artist is separated from the work to the maximum distance.
While reminding ‘The Death of the Author’ by Roland Barthes, such an artistic attitude of Lee Inhyeon personally manifests that ‘the death of the author’ is not to be embodied just in the field of literature. A painter is not a subjective entity who produces the one and only meaning in his or her own painting but a being that gets born at the same time with his or her painting and consumes himself or herself only for his or her art-making, and by doing that he or she just “imitates his or her previous gesture”. The concept of originality is a fictional thing that the modern artistic mythology has manufactured, and the wholly new cannot exist. And a painter is one who endlessly explores his or her creative space while keep postponing the endowment of the final meaning to his or her work. In this respect, Lee Inhyeon is one of the true artists in the sense that Barthes says, that is, one who inquires into painting itself while leaving the consistently sliding signified (image) to take its own course in the midst of the numerous signifiers (objecthood) that are floating around in L’épistémè of Painting. This is why the external changes do not matter and why his L’épistémè of Painting Series had to be continued.
In this solo exhibition of Lee Inhyeon, which is held in three years, L’épistémè of Painting puts on more various faces. Unlike several previous shows where a single artistic kind was presented, this exhibition reveals literally diverse ‘L’épistémè of Painting’ while including all the methods that he has experimented. In this exhibition, he focused on the harmonious display of his works of such diverse modes. This seems very natural in the respect that his work cannot be independently concluded but completes itself within the relationship with other works of his or in the continuum that ranges from the previous works to the future works. As a text that holds many layers of meaning, L’épistémè of Painting is transferred from the hands of Lee Inhyeon to viewers, and a variety of new meanings are possibly excavated as the text draws out potential meanings from a bottomless well. This is why one can anticipate that Lee Inhyeon’s inquiry into painting, which has produced a host of variables from fixed numbers of Prussian blue pigment and unprepared raw canvas, would continue to play much more variations in the name of L’épistémè of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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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actisculpture

Jun 22, 2006 – Aug 06, 2006

Exhibition Preview


반복적인 행위를 뜻하는 “practice”와 조각의 “sculpture”가 결합된 제목의 이 전시는 각자다른 재료와 조형어법을 사용하지만, 반복적 행위를 통한 물질의 확장이라는 공통된 조형적 특성을 보여주는 젊은 조각가 김수진, 김윤수, 신치현, 이규연, 4인의 전시다.
오늘날 우리나라 조각의 새로운 하나의 경향을 보여주고자 기획된 이 전시는 가인갤러리가 앞으로 매해 두 차례 선보이게 될 주제전 의 첫 번째 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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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ton Smith

Seton Smith

Mar 23, 2006 – May 07, 2006

진정한 지각에 대한 사진적 성찰
글. 신혜영 I 가인갤러리 큐레이터

“우리가 이 세계를 제대로 지각하고 있는가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다. 오히려 세계는 우리가 지각하고 있는 것 그대로라고 말해야 한다.” 실제적인 지각이란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자신의 철학사상과 예술이론을 전개한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그의 대표저서『지각의 현상학』에서 ‘지각’의 본성에 관해 이와 같이 함축적으로 말하고 있다.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실제적인 지각이란 우리 각자의 몸이 자신이 속한 세계에 젖어 들어 사물들과 더불어 살아가며 체험하는 매우 구체적인 활동이자 모든 사유와 언어에 앞서는 원초적인 경험이다. 사실상 우리는 자신이 살아 온 환경에 따라 각기 다른 삶의 방식을 취하듯, 시간의 축적을 통해 형성된 각자의 지각의 역사에 따라 똑 같은 대상을 보고도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게 된다.
사진작가 시튼 스미스(Seton Smith, 1955- )는 철학사상이 아닌 예술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인간의 실제적인 지각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녀의 초점이 벗어난 흐릿한 사진 앞에 선 사람들은 몽롱하고 아련한 분위기에 휩싸여 일순간 모든 감각의 방향을 잃는다. 이 형상이 무엇을 찍은 것인가를 “생각하기” 앞서 그 자체를 “보고” 알 수 없는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단색조의 실체를 알 수 없는 흐릿한 형상과 통제되지 않은 듯한 카메라 기술은 생경한 화면을 만들어 내어 보는 사람의 상상을 자극하고 그 사람만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시튼이 자신의 사진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특정한 피사체가 아니라 그 피사체가 불러오는 세계와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 사이의 관계로서의 지각현상인 것이다.
그 이미지들은 실제적인 것(the real)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에 대한 작가의 추상화된 해석(abstracted version)이며, 작가는 보는 사람이 그 이미지들을 실제의 어떠한 상황이나 대상과 결부시키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느낌과 해석으로 바라보길 원한다. “장면을 만들어 내는 것은 나지만, 그 해석은 열려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경험을 그 장면들에 투사할 수 있다”는 그녀의 말처럼 그녀의 주된 피사체인 램프, 그릇, 의자 등의 일상 오브제나 계단, 기둥, 창문 등이 포함된 실내 공간은 그것이 가진 원래의 익숙한 의미가 아닌 보는 사람의 지각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예컨대, 거울에 비친 피아노의 일부분을 찍은 시튼의 사진을 보고 누군가는 의자의 윗부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다른 누군가는 사람의 머리 형상을 떠올릴 수도 있다. 문자의 의미가 어떤 특별한 “기표(signifiant)”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만들어내는 기표들의 끊임없는 미끄러짐 속에서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자크 라캉(Jacque Lacan)의 언어이론처럼, 시튼의 사진은 지각의 주체를 따라 확정되지 않는 끝없는 의미화 작용(signifying operation)을 겪는다. 언어의 기표들이 주체 속에 자리잡을 때에만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듯 시튼의 사진 속 형상들도 그것을 대하는 주체와의 만남에 의해서만 온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튼의 작품이 사진으로서 갖는 특징은 무엇이며 그녀는 왜 사진을 자신의 예술매체로 삼고 있는가. 사진이라는 매체는 본디 빛을 기록하는 것으로서 시간성을 지니며, 사진이 담지한 시간은 특정한 공간을 통해 드러난다. 그러나 시튼의 사진에서 시간과 공간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며 심도있는 논의를 필요로 한다. 시튼에게 시간은 사진을 찍는 행위와 그 결과물 모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시튼은 사진을 찍는 행위 자체에 큰 의미를 둔다. 잭슨 폴록이 붓을 들고 캔버스 위에 물감을 흩뿌려 하나의 화면을 완성하듯, 그녀는 오랜 시간 카메라를 들고 사물들이 반사하는 빛을 하나의 화면에 담아낸다. 그녀만의 고유한 화면을 만들어내기 위해 그녀는 트라이포드 없이 카메라를 직접 손에 들고서(hand-held) 초점을 대상에 맞추지 않은 채 낮은 조명 아래 긴 노출(exposure)로 촬영을 한다. 일반적인 사진작가들이 카메라를 고정시켜 한 장면을 순간적으로 포착하는 것과 달리 시튼은 카메라의 흔들림을 방치한 채 한 장면을 담아내기 위해 오랜 시간 조리개를 열어 두는 것이다.
사진을 찍을 당시 작가의 시간은 현재 사진을 보는 관객의 시간에 중첩되면서 비로소 작가의 의도는 완성된다. 시튼의 사진 앞을 천천히 걸으며 감상하는 관객은 사진 속 공간과 사진 표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겹쳐 보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진에 담긴 작가의 시간과 현재 자신의 시간을 공유하게 된다. 이러한 시튼의 고유한 시간성은 그녀의 이면화 형식 사진에서 더욱 강조된다. 다르지만 연결된 듯한 두 개의 화면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된 것으로 동일한 대상에 대한 다른 시선을 제시한다. 따라서 두 장의 연결된 사진은 공간의 이동뿐 아니라 시간의 연속성을 드러내는데 효과적이다. 움직이며 사진을 감상하는 관객에게 시튼의 이면화 형식의 사진은 마치 영화의 연속적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한편, 시튼의 사진에서 시간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이 담고 있는 공간이다. 시튼은 일상 사물을 찍을 때조차 사물 자체보다 그 사물이 놓인 주위 공간에 더 큰 비중을 두며, 그녀의 사진 중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것 역시 실내공간 사진이다. 특히 시튼의 사진 속 공간에는 건축적 요소가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토니 스미스를 도와 언니 키키와 함께 기하학적 모형을 만들곤 했던 시튼의 작업에는 토니에게서 두드러졌던 건축적인 측면이 많이 남아있다. 또한 시튼은 전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여러 다른 건축형태들을 보고 그것들이 정서적으로 어떤 느낌을 주는지 연구했으며 작은 건축모형들을 만들어 사진작업에 사용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시튼은 초기에 사진과 실제 오브제를 함께 설치하는 공간 특정적인 작업을 주로 했으며, 1990년대 이후 사진에 전념한 이후에도 건축물을 즐겨 찍고 실내공간을 찍을 때도 그 장소가 가진 특색있는 건축적 요소를 통해 공간을 강조하고자 했다. 그리고, 시튼은 거의 대부분의 사진에서 독립된 한 공간을 찍기 보다는 관계로서의 공간을 드러내길 원했다. 기둥들 사이로 보이는 거울에 비친 공간, 창문이나 문을 통해 바라본 집 안 가구들, 계단을 내려오며 찍은 벽과 바닥 등 시튼의 사진에는 작가 고유의 건축적 공간 해석이 두드러진다.
사실상 이러한 관계로서의 공간 역시 한 장의 사진보다는 시튼의 특유한 두 장이 연속된 사진들에서 잘 나타난다. 한 사진에서의 계단이 끝나는 지점부터 다른 또 한 사진에서의 계단이 시작하는 식으로 두 장의 사진 안에서 공간의 연속이나 확장이 보다 효과적으로 표현된다. 그 결과 관객들은 두 장의 사진 사이에 있을 공간을 각자 상상하게 된다. 이는 부분을 통해 전체 문맥을 추측하게 하는 시튼만의 공간에 대한 은밀하고 간접적인 제시 방식이다. 그녀의 이면화 혹은 삼면화 형식 사진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은 이처럼 각각의 이미지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상호작용으로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의 이미지에서 옆의 다른 이미지로 자연스럽게 시선을 옮겨가며 그 사이의 문맥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읽어내도록 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시튼의 사진은 그것이 어떠한 사물이든 실내공간이든 자연풍경이든 그것을 보는 사람들 각자의 세계 안에서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지지만, 사실상 그것들 대부분은 작가 자신의 주변에 자리한 것으로서 작가에게는 매우 친숙한 것들이다. 그러나 작가 자신의 일상 공간이 개인의 사적인 영역에 머물지 않고 모든 사람들 깊은 내면의 기억과 무의식적인 욕구로부터 새롭게 해석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시튼의 사진 속 대상들은 그것이 무엇이건간에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전혀 다른 시공간으로 한없이 옮겨갈 수 있다. 시튼의 사진에서 중세 유럽풍 저택의 실내장식이나 오리엔탈풍의 회화와 같은 특정 시기, 특정 지역의 대상들이 그 시대성과 장소성을 상실하며, 박물관의 고대 유물 역시 그 본래의 역사적 의미나 사료로서의 가치를 떠나 다른 사진 속 대상들과 다를 바 없이 하나의 이미지로서 사람들에게 작용할 뿐이다.
사진은 실재(the reality)를 그대로 재현하는 본성을 가졌다는 점에서 다른 예술 장르과 달리 작가의 주관이 개입되기 어려운 매체다. 그러나 시튼은 사진이라는 객관적인 매체를 가지고 마치 추상화나 시처럼 감상하는 사람 각자의 주관에 따라 그 해석을 열어놓는다. 시튼이 다루는 것은 분명 실재이며 그녀는 어떠한 것도 조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대하는 우리는 어느새 자신만의 세계에 젖어들어 실체를 알 수 없는 어떠한 열망과 기억에 사로잡히고 만다. 시튼의 사진이 매력적인 이유는 그 흐릿한 아름다움 자체에 있다기보다 한 개인의 익숙한 일상이 카메라 렌즈를 통해 각자의 세계 안에 저마다의 친밀함으로 전혀 새롭게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Photographic Reflections on Real Perception
Text. Hyeyoung Shin I Curator of Gaain Gallery
Translation. Jawoon Kim

“There is no need to ask whether we perceive the world as it is. Instead, we should say that the world is as we perceive,” said implicatively Maurice Merleau-ponty in his book, Phenomenology of Perception on the nature of ‘perception’. He was a French philosopher who developed his philosophical thoughts and art theories on the real perception. According to *, real perception refers to very concrete activities that our body experiences as it lives together with objects while it is immersed in the world to which it belongs and to primary experiences that is prior to all thoughts and languages. In fact, as if our environments decide our way of life, we respond differently to a certain object in accordance with our history of perception that has been written over time.
Photographic artist Seton Smith (1955- ) concretely reveals to us the real perception of human beings through not philosophical ideas but works of art. Before her out-of-focus, blurred photographs one’s perception loses its direction while he or she is swallowed up by their dim and hazy effects. Before one ‘thinks’ what the shape represents, she or he ‘sees’ the shape and experiences unfamiliar feelings. Monochromatic, unsubstantial, and blurred shapes and seemingly decontrolled camera techniques produce raw images so as to stimulate one’s imagination and invoke one’s own memories. What Smith intends to disclose through her photographs is not a specific subject but a perceptive phenomenon, that is, the relation between the world that the subject delivers and the person who experiences the very world.
The images are not the records of the real but the artist’s abstracted versions of the real, and the artist wants one not to link those images to real situations or objects but to feel and interpret them in one’s own way. Smith states, “I makes scenes, but the interpretations of them can be anything. People can project their own experiences to those scenes,” and in her works what is photographed, that is, daily objects such as a lamp, a bowl, and a chair or interior spaces that contain a stairs, a column, and a window, loses its original, familiar meaning and is endowed with a different meaning in accord with the viewer’s perception. Before her photograph of a part of a piano reflected in a mirror, for example, one might think he or she is looking at the upper part of a chair, and another might be reminded of the shape of a human head. Jacque Lacan said that the meaning of letters is made not by a specific ‘signifiant’ but by the constant slips of signifiants that produce differences. And the photographs of Smith go through an indefinite, endless signifying operation as they follow the perceiving subjects. As the signifiants of languages can perform their function only when they establish themselves within the subject, a shape in Smith’s works is able to have an intact meaning only by meeting the subject that sees it.
Then, what is that Smith’s works have as photographs? Why has she chosen photography as her artistic medium? One of the original attributes of photography is described as recoding light. And it thus possesses time as one of its elements and the time that a photograph hold is exposed through a specific space. Yet, time and space in Smith’s photographs have unusual significances which require in-depth speculation. For Smith time is an important factor in terms of both photographing action and its outcome. She places great emphasis on the very act of photographing. As Jackson Pollock created an overall painting by scattering pigment on canvas, Smith fills a photograph with light that objects reverberate while holding a camera for considerable duration. The distinctive quality of her photographs is generated by use of a camera in her hand without a tripod, the out-of-focus technique, long exposure, and low illumination. Unlike many other photographic artists capture a momentary scene with a camera that is fixed at a certain spot, Smith ignores the movements of her camera and opens its iris for a considerable time to build a scene.
The artist’s intention is not completed until the time of the artist who was taking photographs overlaps the time of the viewer who is looking at those photographs. While slowly walking in front of Smith’s photograph, the viewer simultaneously sees the space within the photograph and him or herself reflected on the surface of the photograph, and he or she unknowingly owns both the artist’s time and his or her own time. This inimitable quality of time is reinforced in her diptych photographs. Two different, yet seemingly related panels present two different perspectives on one object while being developed as time passes. Hence, the two connected photographs effectively demonstrate both the movement of space and the continuity of time. Smith’s diptychs provide a viewer in motion with a feeling of seeing the sequences of a film.
Meanwhile, in the photographs of Smith, the element of space is as important as that of time. More accurately, the space which time contains within it. Even photographing a daily object, she places more weight on the space that surrounds the object than on the object itself, and her many works are of interior spaces. In those spaces of her works architectural factors are especially important. In her childhood years she helped her father, Tony Smith in making geometric models together with her sister Kiki, and the architectural aspect of her works manifests the influence of her father. Also, she observed her own feeling at the sight of diverse forms of architecture during her trips to different places of the world, and she also made architectural models to be used for her photographic work. Moreover, in her early career Smith concentrated on site-specific works for which photographs and objects are installed. Since the 1990s when she began to devote herself to photography, she has continued to photograph various architectures and even when photographing interior spaces, she did not ignore the architectural quality peculiar to the site. Also, in most of her works Smith intended to show the relation of spaces rather than a separate space. The artist’s own interpretations of architectural spaces are well exemplified in the images of the space reflected on a mirror between columns, of the indoor furniture looked through windows or doors, of the walls and floors photographed as she step down the stairs.
And the relation of spaces is obviously demonstrated in her diptych than one-panel works. In one panel the stairs ends at some point and in the other panel it starts from the very point, and thus in two panels the space effectively continues and expands itself. As a result, the viewer is forced to imagine the space between two photographs. The covert and indirect way of presenting space of the artist allows the viewer to conjure up the overall context through parts. In her diptych or triptych a sort of interaction occurs between the images, and while the eyes of the viewer move from one image to another, he or she is able to interpret the context between those images in his or her own way.
Although the subjects of her works transform s themselves into a variety of things in the world of each viewer, most of them are from the artist’s everyday surroundings, which do not stop at being the artist’s private realm, but electrify the memories and unconscious desires in viewer’s inner mind, and in return they are reborn into novel entities. Every object of Smith’s photographs goes beyond a specific time and place to entirely different time zones and places according to each viewer. In her works, objects of specific time periods and locations such as interior decorations of medieval Europe and paintings in the Oriental style are, for example, deprived of their own senses of times and places, and the ancient artifacts in a museum put their original historical significances and values aside and become raw images so as to affect the minds of viewers in the same way that other ordinary images do.
Since it is one of the attributes of photography to represent reality as it is, unlike other art forms it is rather troublesome for the subjectivity of an artist to be inserted. Through the extraordinary artistic capability of Smith, however, this relatively objective medium of photography enters into the subjective world of each viewer as abstract painting and poetry do. It is unquestionable that Smith deals with reality and that she does not inflict any manipulative procedures on reality. Confronted by the reality Smith delivers, nevertheless, one is unknowingly captivated by certain impalpable desires and memories hidden his or her own world. What makes the photographic work of Smith so magnetic lies not in its simple blurriness but in the undeniable fact that the familiar daily life of an individual comes to the worlds of other individuals with an intim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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