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ARTIST

  • Kyungwoo Chun
    천경우


    한국은 물론 유럽 전역을 아우르며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천경우는 전통적인 방식의 초상사진으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의 관계와 시간의 축적에 기반한 사진의 본성을 탐구하는 작가다. 그의 작품은 대상과 작가가 서로 대화를 하면서 이루어지는 퍼포먼스에 가깝다.

PRESS RELEASE

Believing is Seeing
2007. 5. 17 - 6. 17

가인갤러리 이번 전시는 독일에 거주하고 있는 사진작가 천경우(Kyungwoo Chun, 1969- )의 개인전입니다. 브레멘에 거주하며 독일과 스페인, 네덜란드, 벨기에 등 유럽을 중심으로 매우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작가의 첫 국내 상업화랑에서의 개인전인 이번 전시는 이라는 제목으로 작가의 최근 3가지 사진 시리즈와 비디오 작업을  선보일 예정입니다. 전시 제목과 동일한 사진작품 (2006-7), (2006-7), (2004), 그리고 비디오 작품 (2005-6) 이 그것입니다. 이 세 가지 사진 시리즈는 모두 이전의 그의 작업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관계에 대한 오랜 기간의 고찰을 바탕으로 장시간의 카메라 노출을 이용한 그의 고유한 기법으로 촬영된 것들입니다. 또한 비디오 작품은 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이번 전시 오프닝에 맞추어 퍼포먼스로도 진행될 예정입니다. 다음은 네 가지 작업에 관한 상세한 설명입니다.

BELIEVING IS SEEING (2006-07)
‘Believing Is Seeing’은 잘 알려진 서양의 격언 ‘Seeing is Believing’ 에 대한 역설적 답변으로 보는 만큼 믿는 것이 아닌 믿는 만큼 보는 것이라는 작가의 생각을 말해 준다. 독일에서 제작된 이 시리즈는 선천적으로 볼 수 없거나 병이나 사고로 인해 전혀 또는 거의 볼 수 없는 어린이와 청소년 들이 참여한 작업이다. 사람들이 시각적 명증이 가장 강하게 전달 된다고 믿는 사진이라는 미디어와 볼 수 없는 사람들을 통해 작가는 ‘보는 것’ 또는 ‘본다고 믿는 것’ 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이는 사진 속의 대상이 선명하거나 또는 사물이나 현상을 눈으로 볼 수 있을 때 믿게 되는 자동적인 인지에 대한 의문이자 고찰이기도 하다.
참여한 이들에게 그들이 스스로가 어떻게 보여진다고 믿는지를 묻고 대답하는 시간 동안 노출이 이루어 졌으며 30분에서 40분의 시간이 응축되어 만들어진 이미지다. 작가는 앞을 볼 수 없는 이들이 일방적인 사진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스스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작가와 단 둘이 함께한 공간에서의 반응을 통해 일종의 자화상을 그릴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되기를 의도했다. 한 소년은 ‘무엇을 보는가’ 라는 나의 질문에 이런 대답을 준다. ‘‘나는 모든 것을 검은색으로 보아요, 하지만 검은색이 무엇인지 모르지요.’’ 사진 속 모든 이들은 눈을 감고 있다. 그들에게는 감거나 뜨거나 차이가 없지만 눈을 감음으로써 다른 보통 사람들과 동일한 조건의 상태를 갖게 된다. 눈을 뜨면 보이는 것만 보게 되지만 감으면 더 많은 것이 보인다고 믿는 작가의 믿음이 반영된 것이다.

VERSUS (2006-07)
주로 모노톤으로 작업해 온 천경우의 첫 번째 칼라 작품인 이 작업은 지속적인 테마이기도 한 인간의 ‘관계성’에 관한 해석(interpretation)에 관심을 갖고 퍼포먼스의 형식에 바탕을 둔 작업 과정으로 제작되었다. 한자의 사람 ‘인(人)’ 자의 형상과 의미에 동기를 두었으며 사람의 다리 또는 두 사람이 기댄 것과도 같은 의미와 문자의 이미지를 참가자들에게 주지시키고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는 독립적인 존재를 열망함과 동시에 혼자서 존재할 수 없는 의존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의 필연적인 양면성을 두 사람이 서로 기대어 연결된 형태로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카메라 앞의 두 사람의 여인은 서로가 몸의 무게를 기댄 채 의지하게 하였으며 두 사람의 나이를 합한 숫자의 시간(minutes)만큼 동안 서로가 밸런스를 맞추어 가며 중심을 유지하게 하였다. 함께 지탱해 가는 이 시간 동안 두 사람의 이미지는 중첩되기도, 분리되기도 한다. 컬러 네거티브에 겹겹이 쌓이는 긴 시간의 양은 각자가 몸에 지니고 있는 색을 반사시키게도 하고 뒤섞이게도 한다. 타인에 대항하여(versus) 또는 비교하며 살아가는 본성과 의존적이고 타인을 통해서만 자신을 볼 수 있는 양면가치(ambivalence)의 모습을 생각한 작업이다.

PSEUDONYM, 2004
퍼포먼스 작품인 (2005)의 기초가 되는 사진 작업으로 두 사람이 일종의 심리적 보호 범위를 넘어 눈을 마주보며 서로가 몸에 양손을 댄 채 장시간 머물게 하여 제작한 시리즈 작업이다.
이 작업에서 작가의 역할은 처음으로 제 3의 관찰자로 거리를 두고 있으며,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의 가장 전형적인 앵글을 택하여 한 사람의 얼굴만을 보여주고 있다. 쌍(pair)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한 이미지는 포지티브로 다른 한 이미지는 네거티브로 보여지는데, 두 번째 네거티브 이미지는 등을 보인 인물을 보고자 하는 기대를 감추고 있다. 이는 동일인일 수도, 스스로의 다른 익명(pseudonym)의 인물일 수도 있는 바 열린 가능성을 암시한다.

INTO: apoyo o carga, 2005-2006 (지지하거나 짐이 되거나) - Performance video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 사람들을 위해 구상된 이 퍼포먼스는 사진시리즈 Pseudonym(2004)에서 발전되었다. 이 퍼포먼스는 서로 모르는 익명의 관객 10명 또는 20명이 참가할 수 있으며 일정시간 동안 모르는 사람의 몸 가까이에서 서로의 몸에 손을 대고 있는 동일한 규칙을 갖고 진행된다. 낯설면서도 어색한 이 행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대에 대한 거부, 무감각, 지지, 부담 등의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동일한 이 행위는 서로를 지탱해 주는 힘이 될 수도 무거운 짐이 될 수도 있는 상대적인 의미를 지닌다. 낯선 사람 앞에 인위적으로 가까운 관계가 되어 신체를 접한 상태는 상대의 편안함 또는 불편함에 따라 서로에 대한 ‘지지’ 또는 ‘짐’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스페인 산 세바스티안 에서 60명의 관객이 2일 동안 참여한 이 퍼포먼스는 한국계 독일 작곡가 심근수의 피아노 음악과 함께 영상으로 편집되었다.

◎ 이번 전시의 오프닝 당일 오후 5시에 동일한 퍼포먼스 <지지하거나 짐이 되거나>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스페인, 체코에 이어 20명의 참가자로 이루어질 이번 한국에서의 퍼포먼스를 끝으로 이 작업은 마무리될 것입니다. (참여를 원하시는 분들의 신청을 받습니다.)

◎ 작가는 이번 전시 이후 다음과 같은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1. 5월 26일부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Gallery Van Zoetendaal 에서 개인전이 열립니다.
2. DIVA Exchange programme의 일환으로 올해 덴마크 정부는 3명의 해외 작가를 초청하는 덴마크 문화부 (The Danish Arts Council)의 초청으로 2007년 9월부터 3개월간 코펜하겐(Copenhagen), 아르후스(Aarhus) 두 도시에서 덴마크여왕 마가렛트 2세를 테마로 한 사진작품을 제작할 예정입니다.
3. 영국 Ivpoy press 커미션 워크: 예술전문 출판사인 영국의 Ivory Press는 한 해 두 번 발행되는 국제 사진예술 전문 작품집 C Photo Magazine제작에 두 명의 작가에게 커미션을 선정하며  이 작품은 유럽의 주요 예술재단, 기업에 컬렉션됩니다. 올해 작가로 선정된 천경우의 작품집이 가을 영어, 중국어 그리고 스페인어, 일어로 동시에 발행될 예정입니다.

PUBLICATIONS

  • Kyungwoo Chun l Believing is Seeing

    2007. Gaain Gallery
    16 Pages, Full Color Illustrations

    Pric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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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yungwoo Chun l Interpreters

    2013. Gaain Gallery
    20 Pages, Full Color Illustrations

    Price : ₩
    Warning: number_format() expects parameter 1 to be double, string given in /home/gaain2005/wwwhome/exhibitions/current.php on line 138
  • Kyungwoo Chun l Photographs, Video Performances

    2005. Gaain Gallery
    104 Pages, Hard Cover and Full Color Illustrations

    Price : ₩
    Warning: number_format() expects parameter 1 to be double, string given in /home/gaain2005/wwwhome/exhibitions/current.php on line 138
  • Kyungwoo Chun l bild.klang.los - Ein Trialog von Kyungwoo Chun, Kunsu Shim und Gerhard Stäbler

    2009. Gaain Gallery
    208 Pages, Hard Cover and Full Color Illustrations

    Price : ₩
    Warning: number_format() expects parameter 1 to be double, string given in /home/gaain2005/wwwhome/exhibitions/current.php on line 138
  • Kyungwoo Chun l Kyungwoo Chun: Performance Catalogue Raisonne I

    2011. Gaain Gallery
    198 Pages, Full Color Illustrations

    Pric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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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yungwoo Chun l Photographs

    2011. Gaain Gallery
    112 Pages, Hard Cover and Full Color Illustrations

    Price : ₩
    Warning: number_format() expects parameter 1 to be double, string given in /home/gaain2005/wwwhome/exhibitions/current.php on line 138
  • Kyungwoo Chun l Interpreters

    2014. Gaain Gallery
    80 Pages, Hard Cover and Full Color Illustr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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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arning: number_format() expects parameter 1 to be double, string given in /home/gaain2005/wwwhome/exhibitions/current.php on line 138
  • Kyungwoo Chun l Thousands

    2008. Gaain Gallery
    128 Pages, Hard Cover and Full Color Illustrations

    Pric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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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시간의 축적과 인간의 관계를 담은 사진
글. 신혜영 | 가인갤러리 큐레이터

“나는 내가 보는 것을 찍는 것이 아니라 내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을 찍는다.”1) 어느 인터뷰에서 밝힌 사진작가 천경우의 이 말은 사진에 대한 그의 생각을 대변해 주는 동시에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Believing is  Seeing)>는 이번 전시 제목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는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seeing is believing)”라는 서양의 오랜 격언에 대한 역설적 답변으로서, 시각의 명증성을 우선시하는 서구의 근대적 사고와 시각적 복제물이라는 사진의 일반적인 정의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제시하는 것이다. 사실상 천경우 사진 전반을 관통하는 고유한 매력은 이렇듯 기존의 질서를 끌어와 결국에는 전혀 다른 반대 지점에 이르는 역설적 방법론을 취하는 데 있다.
가장 기본적인 사실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천경우는 인물사진을 찍는다. 그의 사진 속 인물은 윤곽이 선명하지 않고 형상이 또렷하지 않다. 이러한 결과는 그가 감광도가 낮은 필름을 사용해 장시간 노출로 인물을 찍는 데서 기인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방법이 19세기 중엽 처음 등장한 초상사진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상류층 사람들이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 필요로 했던 초기 초상사진은 사진 속 인물이 자신임을 확실히 드러내야 했기에 무엇보다 대상의 사실적인 재현을 최우선으로 하였다. 따라서 장시간의 노출이 불가피했던 당시의 사진 기술상, 보다 또렷한 상을 얻기 위해서 사진가는 피사체에게 오랜 시간 표정을 굳히고 동일한 자세를 취할 것을 요구해야 했다. 그러나 천경우의 인물사진은 초기 초상사진과 동일한 조건을 차용하면서도 그 과정과 목적을 전혀 달리 한다.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기 위해 금장식 의자, 커튼 등의 소품들을 사용했던 당시의 초상사진과 정반대로 천경우는 의도적으로 배경을 중성적으로 처리하고, 심지어 많은 사진에서 인물들의 옷을 검은색으로 통일한다. 이는 그야말로 인물에게만 집중하기 위함이다. 장시간 노출로 배경과 옷은 묻혀버리고 우리는 오직 인물의 눈빛과 표정의 “미묘한 뉘앙스”2)에만 몰입하게 된다. 천경우의 사진이 긴 노출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은 오직 그 시간 동안 사진을 찍히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세밀한 정신적 변화의 과정, 즉 “섬세한 정신의 직물”3) 을 담기 위함인 것이다.
따라서 그는 실물과 닮은 또렷한 상을 얻는 데 집착할 필요가 없고, 이를 위해 피사체가 부동의 자세를 취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그는 조리개를 열어놓는 동안 카메라 앞에 앉은 사람에게 자유로워지기를 청한다. 수십 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카메라 앞에 앉은 사람은 작가의 인도에 따라 스스로를 반성하고 숙고하며,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사진을 찍는 자와 찍히는 자 간에 수많은 대화가 오간다. 카메라가 대상이 반사하는 빛을 담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반응과 교감이 함께 담기게 되는 셈이다. 이렇듯 시간이 축적되는 가운데 서로의 모습을 반영함으로써 완성되는 천경우의 사진에서 더 이상 찍는 자와 찍히는 자라는 전통적인 의미의 주-객의 구분은 희미해진다. 그의 사진 속 인물은 “포즈를 취하는 동안 자신을 조직하고, 순식간에 다른 육체로 만들고, 미리 앞질러 스스로를 이미지로 변형시켜 버리는”4) 경직된 피사체가 아니므로, 더 이상 “과녁, 대상물, ...대상에 의해 사출(瀉出)된 환영이거나 사진의 유령”5)이 아닌 것이다. 나아가 그 결과물이 가져다 주는 섬세한 정서를 느끼고 반응하는 관객까지 그 관계 안으로 들어와 얽히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사진에서 주도적 의미의 ‘촬영자’와 수동적 의미의 ‘피사체’라는 용어는 적절치 않으며, 그것을 멀찍이 바라보는 ‘구경꾼으로서의 관객’도 존재치 않게 되는 것이다. “정면을 향해 오랜 시간을 나와 함께 채워나간 내 사진 속의 인물들은 나의 자화상이기도 하고 나의 사진을 바라보는 관람자의 모습일 수도 있다”6)는 작가의 말은 그의 사진을 둘러싼 인간의 ‘관계성’을 축약하여 보여준다.
이렇듯 천경우의 사진은 가장 전통적인 방식의 초상사진으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의 관계와 시간의 축적에 기반한 사진의 본성을 탐구하는 지속적인 과정이다. 그는 사진의 본질적인 특성이 타인과의 관계를 인정하는 것에 다름 아님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사실상 내 얼굴을 보는 사람은 나 자신이 아닌 타인일 수밖에 없기에 사진을 찍어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자 하는 것이 인물사진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일지 모른다.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나 자신이 아닌 타인이듯이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만 자기 존재를 증명할 수 있지 않은가.
이번 전시에서 천경우는 자신의 지속적인 테마인 인간의 ‘관계성’을 더욱 심화하여 보여준다. 먼저 이번 전시를 통해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그의 첫 컬러사진 연작인 (2006-2007)는 그 제목대로 누군가에 ‘대하여’ 형성되는 우리의 인간관계를 집약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카메라 앞의 두 여인에게 서로의 몸과 얼굴을 기댄 채 두 사람의 나이를 합한 숫자의 분(minutes)만큼 자세를 유지하도록 하였다. 서로의 어깨에 자신의 체중을 실은 상태에서 수십 분을 버티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아서, 이들은 서로 기대어 균형을 맞추어 가면서 중심을 유지하는 동안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이 타인을 의존해 가면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임을 깨닫게 된다. 그는 이 퍼포먼스 형식의 사진 작업에서 참가자들에게 한자의 사람 ‘인(人)’의 형태와 의미를 주지시켰다. 두 개체가 서로 지지함으로써 지탱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사람 ‘인(人)’ 자처럼 우리 인간은 독립된 존재로서 살아가는 듯하나, 동시에 타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고 타인을 통해서만 자신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두 사람의 옷, 머리, 피부에서 반사되는 색이 수십 분간 컬러 네거티브 필름에 그대로 혹은 뒤섞여 기록되어 특별한 조작 없이도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가져온다.
'Versus'의 전작에 해당하는 'Pseudonym'(2004) 역시 개념상 같은 맥락에 있다. 이 사진 연작은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상대의 어깨에 손을 얹고 두 사람의 나이를 평균 낸 시간(minutes)만큼을 보내는 과정을 카메라가 한 방향에서 담아낸 것이다. 사람이 일종의 심리적 보호 범위에 해당하는 가까운 거리에서 타인을 마주 했을 때 느끼는 익숙하지 않은 느낌과 둘 사이의 긴장감을 의도한 작품이다. 또한 이 작품들은 한 사람은 정면이 보이고 다른 한 사람은 뒷모습만이 보이도록 카메라 앵글을 고정하여 촬영함으로써 얼굴이 보이는 사람과 마주한 사람이 다른 인물일 수도 있지만 동일인물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이는 ‘익명(Pseudonym)’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모든 사람이 자신을 나타내고 싶은 욕구와 숨기고 싶은 욕구를 동시에 가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자아와 타아의 동시성에 관한 작가의 생각은 이 작품에서 모노톤의 이미지가 한 장은 포지티브로 다른 한 장은 네거티브로 프린트되어 한 쌍을 이루면서 그 효과가 배가된다.
이렇듯 'Versus'와 'Pseudonym' 연작은 작가 본인이 제3자의 입장에서 거리를 두고 참가자들 사이에 일어나는 교감과 반응을 관찰하고 탐구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작품들과 조금은 차별화된 퍼포먼스 형식의 사진이다. 한편 천경우는 이 두 연작과 동일한 개념의 퍼포먼스를 실제 관객들이 있는 가운데 실연(實演)하고 그것을 비디오로 담은 'INTO: apoyo ocarga(힘이 되거나 짐이 되거나)'(2005-2006)을 이번 전시에서 함께 선보일 것이다. 이는 작가가 사진을 찍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관객들이 현장에서 함께 경험함으로써 좀 더 많은 사람들 사이에 긴장감과 관계성이 확장되기를 의도한 것이다. 익명의 관객 10~20명이 마주 앉아 에서처럼 서로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다른 한 손을 마주 잡은 채 일정 시간을 보내는 이 퍼포먼스는 처음에는 모두에게 낯설고 어색했던 행위가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교감의 상태에 따라 짐이 되기도 하고 의지가 되기도 하는 관계의 상대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전(全)과정을 바라보는 관객들 역시 이 긴장관계에 동참하게 된다. 스페인에서 행해졌던 퍼포먼스를 영상 편집한 이 비디오 작품의 상영과 더불어 전시 오프닝 당일에는 한국 관객들의 참여로 실제 퍼포먼스가 이루어질 예정이다. 이는 관객들에게 영상을 통해 보는 것과 또 다른 종류의 생생한 경험을 가져다 줄 것이다.
한편, 이처럼 유사한 개념을 가진 작품군 외에 전시의 주된 축을 이루는 또 하나의 사진 연작은 전시 제목과 동일한 'Believing is Seeing'(2006-2007)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전세계적으로 처음 선보이게 될 이 새로운 연작은 선천적 혹은 후천적으로 시각을 잃은 시각 장애 어린이와 청소년의 참여로 독일에서 제작된 작품이다. 인물군의 범위를 한정 지었다는 점에서 기존의 작품들과 차별화되지만 여전히 작가 고유의 인물에 대한 내밀한 천착이 돋보인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볼 수 없는 사람들과의 교감을 통해 그가 오랜 시간 고민해 온 ‘보는 것’과 ‘본다고 믿는 것’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작가가 카메라 앞에 앉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보는지 혹은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보인다고 믿는지 등을 묻고 답하는 30~40분의 시간 동안 노출이 이루어졌다. 시간이 축적되는 동안 참가자들은 작가와 교감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머리에 그리게 되고 그러한 모든 반응과 교감은 한 장의 사진에 고스란히 담긴다. “눈을 뜨면 보이는 것만 보게 되지만 감으면 더 많은 것이 보인다고 나는 믿는다”는 작가의 말처럼,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이 ‘보는 것’ 보다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이 ‘본다고 믿는 것’이 때로는 더 풍부할 수 있다. 'Believing is Seeing'연작은 사진(寫眞)이 ‘실물을 베낀다’는 그 한자 뜻과 같이 오직 실물과의 닮음이나 사실의 복제와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는 작가의 오랜 생각을 우회적으로 말해주는 작품이 아닌가 한다. “물론 사진은 직접적인 사실과 관련된 것이지만, 같은 것을 바라보는 많은 다른 방법들이 있다는 믿음과도 관련된다. 진실로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7) 1994년 첫 개인전 이후 십 수 년 넘게 지속되어 온 천경우의 사진은 이러한 동일한 의도를 기반으로 발전해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인간의 관계성에 관한 보다 심도 있는 연구와 시도를 감행했다. 또한 이제까지의 어두운 모노톤 위주의 작품 성향에서 잠시 벗어나 빛의 또 다른 모습인 색이 사진에서 보여줄 수 있는 조형적 아름다움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큰 강줄기 아래 흐르는 수많은 작은 시내 중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사진작가 천경우는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믿었던 19세기 초상사진을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을 수 있다’는 믿음에 이르는 21세기 새로운 인물사진으로 바꾸어 가는 긴 여행 길 위에 서있고, 이번 전시는 그 길 위에서 제시하는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1) , interview by Susanne Pfeffer, HATJE CANTZ, 2005, p. 89
2) <카메라 루시다>, 롤랑바르트, 열화당, p. 18 (“위대한 인물사진가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미묘한 뉘앙스를 표현하지 못한다”)
3) Ibid., p. 18
4) Ibid., p. 18
5) Ibid., p. 16
6) (2005년 5월호), 미술사랑, p. 113
7) , interview by Susanne Pfeffer, HATJE CANTZ, 2005, p. 90


What Is Not Seen Can Be More Than What Is Seen !
Text. Hyeyoung Shin | Curator of Gaain Gallery
Translation. Jawoon Kim

 “I photograph not what I see, but what I believe exists.”1) This words of Chun Kyungwoo stated in an interview reveal his thoughts on photography and imply the meaning of the title of this exhibition, ‘Believing Is Seeing’. The title is a paradoxical response to the Western adage, “Seeing is believing” as it takes a strongly skeptical view of modern Western thought that prioritizes visual verification and of the general definition of photography of visual reproduction. In fact, the distinctive appeal that penetrates the photographic oeuvre of Chun lies in this paradoxical methodology through which established order is primarily taken to be delivered at the opposite end. Let us start with the most basic fact. Chun photographs people. The figure in his photograph has neither clear outlines nor definite shapes. This results from his use of low-sensitivity film and a long exposure. What is interesting about this is that this method is identical to the method used for the portrait photography of the mid 19th century when it first appeared. Since early portrait photography was requested by upper-class people to show off their social standings, one of the most important factors that had to be fulfilled was to clearly demonstrate who the figure was, and thus the realistic representation of the object was imperatively essential. The photographic technology of that time inevitably required a long exposure, and hence a photographer had to ask the subject to keep still for a considerably long time. Although Chun’s portrait photographs employ the same conditions of early portrait photography, its process and aim are entirely different. The portrait photography of that period utilized such props as a chair decorated with gold and curtains to expose one’s social rank, but on the contrary Chun intently neutralizes the background and dresses the subject in black in many photographs of his. This is to place the sole focus on the subject. The long exposure buries the background and clothes, and we can concentrate on the “subtle nuance”2) emanating from the eyes and facial expression of the subject. Chun’s photographic works necessitate a long exposure in order to render “a delicate moral texture,”3) that is, the process of minute mental change occurring only to the very subject that is being photographed during a certain amount of time.  
Accordingly, Chun does not need to worry about obtaining a clear image that resembles the subject and the subject also needs not to pose still. Rather, he asks the subject sitting in front of his camera to feel free for the time during which the iris is opened. The person sitting in front of the camera for a long period of time of several tens of minutes reflects on him/herself in accordance with Chun’s guidance, and numerous dialogues are shared between who is photographing and who is being photographed across the camera. As the camera absorbs the light the object reflects, the mutual responses between the two people are also absorbed. In the photographs of Chun that are completed when they reflect each other as time accumulates itself, the conventional division of the subject and the object, namely, of who is photographing and who is being photographed, is blurred. The figure in his photographs is no longer a rigid subject that “constitutes him/herself in the process of posing, instantaneously makes another body for him/herself and transform him/herself in advance into an image,”4) and thus is neither “the target nor “the referent” nor “any eidolon emitted by the object”.5) Furthermore, the viewer who feels and responds to the delicate emotions that the product generates enters into the relationship and becomes entangled in it. Therefore, either active word ‘photographer’ and passive word ‘subject’ is not pertinent to his photographs, and there even ‘the audience as the bystander’ do not occupy a place. His statement, “The figures in my photographs who have seen it through for a long time depict both myself and those who are looking at a picture of me”6) briefly explains the relation of human beings that encompasses his photographs.
Chun’s photographs are the products of the continuous process that inquires into the nature of photography that is based on human relationships and the accumulation of time while having started from the most traditional mode of portrait photography. He is well aware that the essential property of photography is nothing but acknowledging the relationship with other people. Considering that who sees my face is not me but other people, it may be said that the fundamental aim of portrait photography is to meet the desire to identify oneself through his/her own picture. As who calls my name is not me but others, one can verify his/her being only within his/her relationships with others.
In this exhibition, Chun digs deeper in exploring his continuous theme of human ‘relation’. Versus (2006-2007), his first series of color photographs that is shown in Korea for the first time through this exhibition, epitomizes one’s human relationships that are formed ‘versus’ someone as the title suggests. For this work, Chun asked the two women in front of the camera to hold their leaning pose for the duration of the minutes calculated by adding their ages. It is not that easy to endure several tens of minutes while placing one’s weight on the other’s shoulder, and they realize more acutely than ever that they cannot live without relying on others during these minutes when they are trying to keep their balance as they lean on each other. For this photographic work in the form of performance art, he made sure that participants comprehend the form and meaning of the Chinese letter for ‘human (人)’. As the letter entails that two entities can hold themselves by supporting each other, it seems that one leads his/her life as an independent being, yet one cannot avoid to rely on others from time to time and one can identify him/herself through others. The colors reflected from the two people’s clothes, hair and skin are recorded on color negative film either as they are or in mix so as to bring out the dreamily beautiful without any special manipulation.
Pseudonym (2004) which is the previous version of Versus is also in the same conceptual context. This series shows a single angle view of the process in which two people are sitting while facing each other with their hands on each other’s shoulder for those minutes that correspond to the average number of their ages. Chun intended to convey the unfamiliar feeling and tension that people sense when they face others in a close distance that is applicable to a kind of psychologically protected range. In addition, in these works the camera angle is fixed to capture one’s frontal view and the other’s rear view, and in consequence the one whose face is exposed and the other are possibly either different persons or one and the same person. This dual possibility symbolically tells, as the title of ‘Pseudonym’ entails, that everyone has two different needs at the same time to reveal and conceal him/herself. Such a thought of Chun on the simultaneity of ego and other ego doubles its effect in its realization as a positive print and a negative print of a monotonic image form a pair.
While incorporating the element of performance art, Versus and Pseudonym are slightly differentiated from his previous works in the respect that the artist himself took the position of the third person who observes and delves into the mutual responses between participants. Meanwhile, Chun also shows in this exhibition a video work entitled ‘INTO: apoyo o carga’ (2005-2006) in which a performance whose concept is identical to these two series is performed before an actual audience. This is intended to extend tension and relation to much more people by making viewers to experience the situation occurred during the process of the artist’s photographing. In this performance, ten to twenty anonymous viewers are sitting facing each other as in Pseudonym with their one hand on each other’s shoulder and their the other hand holding each other’s hand for a certain amount of time. The change developed during those actions demonstrates the relativity of relation as the actions that were unfamiliar and awkward at first become, as time accumulates, either burdensome or helpful in accordance with what kind of rapport they share. And viewers who are watching the whole process come to participate in this state of tension. Together with this video work in which the performance carried out in Spain is edited, on the opening day of this exhibition there will be an actual performance with the help of Korean viewers. It will provide viewers with a live experience different from that can be gain from video images.
Besides these works of similar concepts, another photograph series that forms one of the main axes of the exhibition is Believing Is Seeing (2006-2007) which has the same title the exhibition does. This new series, which is introduced for the first time through this exhibition, was produced in Germany with the participation of young people who were visually impaired either congenitally or postnatally. These works are differentiated from previous works in the fact that they restrict the range of subjects, but nonetheless they still bear Chun’s persistent exploration for people. In this series, Chun unfolds his longstanding question on ‘to see’ versus ‘to believe to see’ by showing the empathy with those who cannot see. The long exposure for thirty to forty minutes was taken as Chun asked those in front of the camera what they see or how they believe to be seen by others and they answered. As time accumulates, participants imagine how they look as they empathize with Chun, and all the responses and empathies are intactly registered in a photograph. As Chun says, “Open eyes see only what is seen, and I believe closed eyes can see much more,” what one ‘believes to see’ with his/her closed eyes can be sometimes richer than what the other ‘sees’ with his/her open eyes. 
It is assumable that Believing Is Seeing implicitly illustrates Chun’s consistent idea that photography has to do not merely with the notions of resemblance and the reproduction of facts as the meaning of Chinese word for photography of copying the actual object connotes, but it is capable of making what is not seen to be seen. “Of course photography has to do with direct reality, yet it also has to do with the belief that there are many different ways of viewing the same thing. Believing really is seeing.7) It may be safely said that the photographic art of Chun that has continued over a decade sine his first solo exhibition in 1994 has developed on the basis of this coherent intent. In this exhibition, he ventures a more intensified attempt on human relation. Also, while abandoning the previous use of dark monochrome for a while, he explores into the visual beauty that color, which is another appearance of light, can create. Yet, this would be nothing but one of the countless streams which are to be joined to form a wider river. For photographic artist Chun Kyungwoo is on a long journey during which he develops 19th-century portrait photography that believed ‘what is seen is all that is’ into 21st-century portrait photography that would make one believe ‘what is not seen can be more than what is seen,’ and this exhibition is just one of infinite possibilities that he unfurls on that journey.


1) KYUNGWOO CHUN – photographs, video performances, interview by Susanne Pfeffer, HATJE CANTZ, 2005, p. 89
2) Roland Barthes, Camera Lucida, Yeolhwadang, p. 18. (“Photography is anything but subtle except in the hands of the very greatest portraitists”)
3) Ibid., p. 18
4) Ibid., p. 18
5) Ibid., p.16
6) art in culture, May 2005, misoolsarang, p. 113.
7) KYUNGWOO CHUN – photographs, video performances, interview by Susanne Pfeffer, HATJE CANTZ, 2005, p. 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