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ARTIST

  • Yeoran Je
    제여란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회화의 본질을 집요하게 탐구하며 자신만의 회화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제여란은 전통적인 회화의 작업 방식을 넘어서서 작업에 사용되는 매체의 물성, 제작 도구의 변화 등 다양한 기법을 실험하고 있다.

PRESS RELEASE

Je Yeoran
2010. 6. 17 (목) - 7. 17 (토)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자신만의 회화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제여란의 개인전이 가인갤러리에서 열립니다. 작가는 전통적인 회화의 작업 방식에서 나아가 작업에 사용되는 매체의 물성, 제작 도구의 변화 등 다양한 기법을 탐구하며 자신의 회화 세계를 공고히 다지고 있습니다.
제여란의 작업에 있어서 다양한 시도 가운데 일관된 속성은 물감이 반복적으로 겹쳐지면서 작업으로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중시하고, 신체의 동작을 이용하여 자신의 넘치는 에너지를 거대한 캔버스에 표출한다는 점입니다. 작가는 붓과 같은 일반적인 회화의 도구를 사용하여 손과 팔, 손목을 이용하는 종래의 평면적인 행동 방향에서 벗어나, 캔버스를 마주 대하며 전체적인 신체의 움직임을 통해 감정을 표현합니다. 즉, 자신의 신체를 작업의 도구로 사용하고, 물감의 매체적인 특성과 그것이 평면의 캔버스에 작용하는 방식에 대한 탐구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신체와 재료, 작업 과정의 상호작용으로 인한 우연성과 필연성에 대한 인식은 작업의 필연성이 우연적 형식 안에서 실현되는 과정에 있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는 미리 이미지를 정하고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몰입된 행위에 의한 드리핑의 결과로 물감을 캔버스 위에 자리잡게 합니다. 따라서 제여란은 유화 물감 특유의 물리적이고 유동적인 속성으로 회화의 형태를 결정하며 그것을 작품으로 제시합니다.
이번 전시에는 2008년 부산 비엔날레 현대미술전에서 전시되었던 '어디든 어디도 아닌 usquam nusquam'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 선보입니다. 'usquam nusquam'은 다양한 화학 재료로 직접 제작한 물감 재료에 대한 재고찰 과정에서 발표하였던 작업 이후, 다시 유화 작업으로 돌아온 후 제작된 작업입니다. 물감이 채 마르지 않은 형상 위에 또 다른 이미지를 얹는 행위는 시간을 누적시키는 작업이자, 시간의 경과와 그에 따른 변화 과정을 시각화 합니다. 유화의 물성에 매료된 작가는 물감이 여러 겹의 층으로 쌓인 캔버스에서 무한한 시공간을 형성하고, 켜켜이 쌓인 화면은 중층화된 무한한 공간과 시간의 겹에 대한 감성을 고조시킵니다. 예술 장르 간에 경계가 해체되고 중첩되어 회화의 ‘순수성’이 상실된 오늘날, 제여란의 전통적인 유화 작업은 작가의 정신과 신체뿐만 아니라, 시공간에 대한 작가의 감성을 일깨우는 에너지의 결정체라고 할 것입니다.
가인갤러리의 이번 전시는 2006년 토탈미술관에서의 전시 이후 4년 만의 개인전인 작가 제여란이 새롭게 시도한 근작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특히 유화 작업과 더불어 처음으로 전시되는 드로잉 작업 등 작가의 다양한 작품이 선보일 예정입니다. 2010년 6월 17일부터 열리는 제여란의 개인전에 많은 관심 부탁 드립니다.                     

PUBLIC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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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제여란의 야생적 풍경 그리고 긍정의 힘
글. 김원방 I 미술평론

제여란의 작업을 하나의 양식적 개념으로 묶어내기는 힘들다. 얼핏 그녀의 작업은 우리가 손쉽게 동원할 수 있는 몇 가지 기존 스타일이나 시각적 변별특성에 비추어 한정될 수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 "액션 페인팅적 제스쳐나 앵포르멜적 물질감, 흑색 모노크롬적인 깊이, 습지풍경과 같은 구상적 모티브의 변형, 빛이나 톤의 변화가 주는 심미주의적 쾌감, 이러한 요소들을 적절히 혼합하고 있는 일종의 서정적 반추상 작업" 같은 정의가 그것이다. 그러나 제여란의 작업에 대한 많은 오해가 바로 이와 같은 절충주의적 접근에서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녀의 작업은 어떠한 양식이나 방법론적 가능성 자체를 부인하는데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의 작업은 어떤 특정한 결과나 목표를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그녀는 분석하거나 결론짓지 않으며 항상 어떤 생성의 시점에 서 있을 뿐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의 제여란의 작업은, 군데군데 빛이 잔존하는 어두운 밤풍경과 같은 작업, 그리고 붓 대신 판화용 스퀴즈로 다량의 물감을 발라 침울하고도 숨가쁜 느낌의 공존을 추구한 작업, 그리고 93년도 이후 현재까지 진행 해오고 있는 작업으로서 수직방향으로 검은 소나기나 뒤틀린 넝쿨 같은 것이 뒤덮혀 있는, 전에 비해 더욱 통일되고 격렬해진 흐름으로 일관된 작업 등, 세가지 갈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을 통틀어 외양상 특기할만한 점은 화면 대부분을 뒤덮고 있는 흑색 톤의 내향적 어둠과 빛, 카리스마적 느낌의 대칭구도, 끈끈하고 질척한 마티에르, 간혹 어둠의 정중앙에 돌출해 있는 모호한 이미지,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함께 뿜어내는 야생적 분위기이다.
이러한 제여란의 작업은 일종의 「내면적 풍경화」로 보아도 무리는 없지만 그러한 손쉬운 정의 이전에 우리가 물어보아야 할 바는, 바로 그 풍경이 지니는 특유한 힘이 어디서 오는가, 어떤 종류의 힘인가 하는 것이며 그러한 힘은 특히 제여란에게 있어 작품이 지니는 외양을 넘어 그것을 이루는 회화적 생성의 구조와 깊은 역동적 관계가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즉 특유한 「되어감의 구조」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글은 바로 그러한 관점에서 그녀의 작업을 이해하기 위한 단상이다. 
제여란의 많은 작업에서 우선 특기할 바는 무거운 「수평적, 수직적 흐름의 대칭구조」이다. 그녀의 작업에서는 어두운 톤의 질척한 물감 덩어리와 붓질이 명확한 한계 없이 얽혀 있어 얼핏 그러한 구도가 잘 식별되지 않지만 주의 깊게 보면 화면내부의 격렬한 폭발이나 정적인 이미지들이 기념비적 구도의 어둠 속에서 도발적인 자세로 존재하고 있다(예를 들면《습지, 1989》,《여명(黎明), 1990》,《아침, 1990》,《Black, 1990-91》등의 경우). 종종 지평선과 같은 것이 화면을 이분하며 때로는 두개의 모호한 이미지가 서로 대결하기도 한다《무제 1993》. 그리고 이 모든 움직임이나 사건은 결코 분명한 방식으로 묘사되지 않은 채 화면 속에 파묻혀 있으면서도 막대한 진동을 수반하며 카리스마적 구도 속에 군림하고 있다. 이러한 풍경은 마치 우리의 의식이나 세계, 시간의 모든 밝은 표피에서 흘러다니는 수만 개의 지류가 끊임없이 하류를 향해 합쳐지면서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마지막 심연과도 같아 보인다. 이 풍경들은 보통 다음과 같은 특유한 공간적 흐름으로 구성되고 있는데 그것은: ①빗물의 흐름을 연상시키는「수직적 흘러내림」②흐름이 정지된 듯한 습지나 심연을 연상시키는「수평적 고임」③이러한 침묵의 분위기 속에서 화면의 시각적, 상징적 힘을 모으기 위한 일종의 구심점으로서의 이미지, 즉「분출」이나「상자」같은 정적, 동적 이미지들이다.
①과②는 제여란의 화면의 바탕을 이루는 요소들인데, 이를 통해 저항할 수 없는 관성의 숙명이 지배하는 듯한 극도로 무겁고 멜랑콜리에 찬 세계를 보여준다. 그것은 그저 평온하거나 맥이 빠진 느낌이라기보다는 거꾸로 우리의 존재를 지탱하고 있는 관성의 순수한 본성과 힘을 드러내주며, 마치 온갖 고체와 기체, 쇠와 살, 분노와 쾌락 등이 평등하게 뒤섞여 관성의 숙명 속에서 녹아버리고 동질성을 되찾아 다시 완전한 평정과 영원한 기다림으로 되돌아온 어떤「원초적 상태」, 이러한 격렬한 시간을 모두 겪고 보유했으면서도 망각해버린「몰가치적 상태」와도 같은 것이다. 화면의 모든 동작과 마티에르는 자신의 무게에 복종하며 그저 천천히 흐르고 또 고여 있다. 그것은 자세히 보면 고통스럽지만 전체적으로는 고요한 흐름 속에서 무심한 표정을 취한다. ③의 요소 즉 화면 중앙에 직설적인 자세로 존재하는 이미지들은 이러한 모순된 힘을 모으거나 분출하는 곳이다. 이 이미지들은 거대한 힘의 분출로서 또는 그러한 힘의 비밀을 간직한 강렬한 카리스마적 침묵으로서 군림한다. 그것들은 제여란의 작업이 항상 그렇듯이 대각선이나 사선구도, 조감도 등의 설명적 시점(視點)이 아닌, 완전한「수평수직구도」속에서 화면 정 중앙에 자신의 앞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에 그만큼 더욱 압도적이다. 동시에 그것은 주위의 어둠 속에 파묻혀 있는 상태로 불분명한 일각(一角)만을 불쑥 드러내기 때문에 더욱 수수께끼 같은 내향적 존재이다. 그것은 노출증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설명해내는 덧없는 개체가 아니라 너무 원초적이어서 자신을 설명할 수 없는, 카리스마적 존재라기 보다는「카리스마적 원천」이며, 시끄러운 로고스(logos)적 사고가 허무하게 끝나는 지점에서 새로이 시작하는 어떤 웅변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제여란의 작품에 대해 지나치게 문학적인 읽기를 행할 생각은 없다. 그녀의 풍경은 근래의 포스트모던한 회화가 흔히 그렇듯이 다양한 개인사적, 신화적 또는 심층심리학적 해석 등이 수반될 소지가 많지만 이러한 풍성한 문학적 은유는 제여란에게 있어서는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있어 작업의 중요한 동기와 회화적 실천은「회화적 역동성」(또는「회화적 생성」)의차원에서 이미 완전히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제여란은「문학적 표현」이나「작업의 의도」에는 원래 관심이 없다. 그녀가 작업하는 지점은 이미 말 이전의 단계이며, 그녀의 관심사는 특정한 체험이나 사상을「기념」하기보다는 그것의「연금술적 변화」에,「표현하기」보다는「표현되어짐」에 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있어 유일한 원칙이 있다면 "의도나 규칙이 아닌, 예술의 형식언어와의 내밀한 관련의 지속성"(일기중 발췌)이며 이에 따라 "그림을 통한 대상의 현실적 변화는 오히려 대상을「존재적」이게 하는 입장을 열어준다". 즉 제여란은 회화의 중심을 오직 회화 내부의 역동적 생성 속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게 어떤 구체적 리얼리티에 대한 대상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녀는 회화 속에서 습지, 관, 폭포, 새벽의 햇빛 등 많은 대상을 의식하며 그로부터 연상해 내기도 한다. 즉 많은 대상이 스스로 「재현되어 지기도」한다. 그러나 회화란 이러한 모든 대상의 즉 자연의 "구체성의 상실과 새로운 시간의 획득을 위한 중간의 장소"(일기중)이어야 한다. 이러한 언급은 더욱 진전된 방식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즉 회화란 주어진 자연에 대해 회화적 리얼리티를「부과」하는 수동적 과정이라기 보다는 스스로 탄생하는 회화적 리얼리티 속에서 자연도 함께, 동시에 탄생하는 과정인 것이다. 이렇게「새롭게 되살아난」대상은 언어의 명증성을 벗어버리고「회화적 어둠」과「회화적 충격」을 되찾는다. 제여란에게 있어 마티에르는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흑색의 두터운 마티에르는 계속되는 쌓아 올려짐과 흘러내림 속에서 무언의 강한 외침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그녀에게 있어 마티에르란 작업의 출발점도 목표도 아니며 작업과정을 선도하는 그 어떤「의식」도 아니다. 마티에르는 그녀가 추구하는 특유의「싸이키델릭」한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며 과정일 뿐이다. 제여란의 마티에르가 가지는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항상 흐름을 지닌다는 점이다. 여기서 물감의 무게와 중력(흘러내리는 힘)은 중요한 요소이다. 그녀는 화면 위에서 물감의 자세를 통제하려는 식의 인공적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물감은 스스로를 감당 못하는 듯 힘겹게 흘러내리고 모든 마티에르는 마치 보는 자와 호흡을 같이 하려는 듯한 방향과 포즈를 취한다. 이러한 물감의 쌓임, 흐름의 반복 속에서 마티에르는 고통스럽고도 끈질긴 자태로 화포 위에 달라붙는다.
제여란의 화면에서는 붓질과 흐름의 중첩 속에서 많은 것이 사라진다. 그러나 그것은 취소나 삭제가 아니다. 이미 이루어진 모든 바를 전적으로 용인하며 이러한 매 순간의 과거 위에서 항상 새로이 출발한다. 제여란에게 있어 붓질이란,「그리거나」재료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는 재료로 하여금 스스로 생성하게 하는 매개체이다. 마티에르는 이미 정착된 마티에르에 의해 새로운「행위의 꼴」을 형성하게 되고 동시에 선행하는 마티에르의 과거의 기억을 되살린다. 즉 그녀는 그림 자체도 스스로의 살과 호흡을 지닌 유기적 존재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표면은 이에 특유한 홍망성쇠의 시간을 그대로 간직하고 또 드러낸다. 표면은「기억」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제여란의 화면이 갖는 힘이란 바로 이러한 어둠 속에서의 기나긴 호흡과 동작이 더이상 진전 불가능한 포화상태 속에서 돌연 멈추어진 바로 그 순간의 침묵과도 같은 것이다. 1992년부터 1993년까지 제여란은 새로운 작업을 시도하였는데 그것은 붓 대신 실크스크린용 스퀴즈로 다량의 물감덩어리를 발라 부치는 작업이다. 손이란 어쩔 수 없이 인공적 통제를 낳기 때문에 그의 매개체인 붓을 제거함으로써 재료가 가지는 또 다른 표정을 드러내게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스퀴즈 작업은 이전의 작업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
스퀴즈 작업은 어떤 측면에서는 붓을 사용한 작업보다도 재료에 대한 더욱 야생적인 감수성을 드러낸 작업인데, 그 예로서 마티에르가 내뿜는 특유한「반짝거림」을 들 수 있다. 가장 전형적인 스퀴즈 작업은 번쩍이는 유화물감의 두터운 흑색 마티에르만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때로는 그 흐름과 숨어 있는 형상을 포착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감상자는 복잡한 빛의 반사를 피해가며「본래의 형상」을 찾아내려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까다로움 자체도 제여란에게 있어서는 재료가 지니는 본래의 야생적 측면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녀의 화면은 시각을 위해 온순하게 길들여진 그림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야생적 오브제」로서 바라보아야 한다.
이전의 붓작업과 비교할 때 스퀴즈 작업에서 특기할 점은 특유의「싸이키델릭」한 측면이다. 1992년 작《무제》는 스퀴즈 작업의 전형이며 압권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인데, 화면은 완전한 흑색 마티에르의 찰라적 흐름만으로 이루어진 고밀도의 포화상태를 연출하고 여기에 더해 어둠의 정 중앙부에서 융기하는 무정형한 덩어리, 흑색 마티에르가 반사해 내는 빛의 다발 등은 매우 환각적이고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연출해낸다(도판 8). 이 작품에서 느껴지는 시간감각은 매우 특이하다. 미국 모더니즘 회화에서 보이는 초월적인 무시간성과는 당연히 거리가 멀지만 자유분방하고 신변잡기적인 포스트모던 회화의 표피적이고 일상적인 시간과도 다르다. 거의 완전한 칠흑의 어둠 속에서 융기하는 또다른 어둠.그리고 흐름. 모든 것이 어둠 속에 얼어붙은 듯한 그 곳의 시간은 제여란의 현세적 삶과 욕망의 시간이면서도 가장 깊은 곳에서 무겁게 흐르는 시간이다. 스퀴즈 작업이 지니는 강력한 힘은 그러한 영상이 지니는 밀도와 찰라성, 그리고 모든 것이 오직 숨막힐 듯한 흑색의 어둠에만 의존하여 힘겹게 이야기 되어져야 하는 바로 그「고통」속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제여란의 여러 작업 속에서도 특히 스퀴즈 작업이 그녀가 진행해온 작업의 한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1993년부터 현재까지의 최근의 작업들은 다시 붓을 사용한 것들인데, 그것은 전반적으로 과거에 비해 좀더 단순화되었으면서도 더욱 격렬해졌다. 화면은 수직방향의 격렬한 흐름과 뒤틀림이 주조를 이루는 일종의 어두운 정글 같은 풍경으로서, 과거화면의 중심부에 어둡게나마 비교적 분명히 자리잡고 있던 형상적 이미지들(돌출하는 산같은 것들)은 더욱 퇴화하여 단지 화면의 지배적 흐름을 거부하는 듯한 몇번의 강한 붓질이나 무정형한 번짐의 덩어리로 남아있다. 반면 흐름은 더욱 증폭되고 일체화됨으로써 전체적인 정조는 과거의 작업에서보다 더욱 순간적인 발산력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이미지는 한편으로는 거의 오로지 어둠으로만 행해지는 동작의 순간들을 중첩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남겨지는 여백을 통해 과거의 순간을 중첩시킴으로써 제여란 자신의 "몸"적 시간에 대해 정조를 부여하는, 아니 그것을 더욱 강력하게 하는 하나의 "fetish(物神)"인 것이다. 최근 작업의 경우, 어딘가 고통스런 절제의 모습이 담겨져 있던 이전의 작업과는 달리 더욱 자연스럽고 직설적인 발산의 힘이 있다는 점에서 기대되는 변화라고 느낀다.
제여란의 풍경은 어둡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따는 스퀴즈 작업의 예에서 보았듯이 그녀에겐 어둠 못지 않게 빛에 대한 갈망이 숨어있다는 사실이다.「여명」(1990)에서 보면 물감의 흐름이나 붓질 사이로 드러나는 흰 캔버스의 흔적이 신비한 반짝거림이나 원경 (遠景)의 어스름한 허공처럼 남아있다. 이러한 빛의 잔재는 오히려 제여란의 풍경에「어둠의 미스테리」나 내향적 성격을 더해준다. 이러한 빛은 밝음이 아닌, 밝음의 잔재이며 전 작업을 통한 이러한 잔재의 지속은 거꾸로 그녀가 밝음에 대한 양가적(兩價的) 집착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낳는다. 즉 밝음을 등지고 있는 어둠의 풍경이지만 그 시선은 끊임없이 어둠의 피안을 향하고 있거나 또는 그것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어둠과 빛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무거운 질료와 허공의 표현을 운용하는 제여란의 방식을 보면, 물감의 쌓임이나 흐름은 그 표정에 따라 무거운 중량으로 남거나 공허한 허공으로, 암흑이나 빛의 여운으로 또는 구체적 형상이나 그 사라짐으로 드러난다. 이렇게 되면 결국 그녀의 흑색은 그것이 어둠이면서도 항상 빛의 기억 또는 습성을 지니고 있는「빛의 한 형태」로 볼 수 있으며, 또한 추상적이고 우발적인 듯한 물감의 스밈과 쌓임은 그 자체가 스스로의 타고난 회화적 본능에 의해 구체적 형상으로 짜여져 나가는「형태의 원단」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이미 그 무엇이면서도 동시에 색다르게 되어간다. 이러한 측면은 제여란의 풍경에서 형상성(또는 비 대상성)과 비 형상성(또는 대상성)이라는 두가지 상반된 읽기를 동시에 가능케 하는 측면이다.
이렇게 되면 제여란이 정확히 무엇을 그렸고 또는 그리지 않았는가 라는 질문은 딜레머를 낳을 뿐이다. 이러한 딜레머는 제여란의 풍경에 나타나는 형상적 이미지의 윤곽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생기는 딜레머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녀
「그림/안그림」의 갈등 속에서 작업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추상/구상」이라는 보편적 질문의 수준으로 확장시킬 경우 제여란의 풍경은 사실 둘 중 그 어느 것으로부터도 유래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양자 모두 오독은 아니겠으나 제여란의 풍경 특유의 생성구조를 망각한 편견이 된다. 그렇다면 제여란의 풍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드러내는가?
좀 더 정확히 표현하여, 그녀의 풍경이「되고자」하는 바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문자 그대로의「풍경」일 뿐이다. 그것은 어떤 현장(모델)의 풍경이 아닌「스스로가 현장인 풍경」이다. 그 풍경의 피안에는 어떤 객관적인 것도 존재 한 것이 없으며, 스스로가「회화적으로」탄생하고 생성해내는 하나의「회화적 원천」이다. 제여란에게 있어 풍경이란「기호학적 풍경」-대상과의 갈등구조를 내포하고 있는 표현인-으로 이해되기보다는「하나의 풍경일 뿐인 회화」의 뜻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곧「기호학적 어둠」과「회화적 충격」의 지평으로 나아감이다.
제여란에게 있어 풍경이란 장르나 소재의 개념이 아닌, 하나의「회화관」을 뜻하는 것이다. 이상 몇몇 작품에 한정된 단상을 통해 우리가 엿볼 수 있었던 바는 제여란의 작업이 작업 자체의 내용에 있어서나, 그것이 내포하는 회화관, 세계관 모두에 있어 고도의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일관성은 기존 예술의 양식이나 독트린에 대한 비판적 대응의 결과로서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회화적 체험의 발판을 사유 이전의「천연적」단계로 되돌려 모든것을 여과없이 발산해내는「간단하고」,「직접적인(immediate)」태도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여란은 매우「소박한(naive)」화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제여란이 언급한 바 있는 일종의「자연주의적」태도이며 이것은 그녀의 작업을 가장 총체적으로 특징짓는 용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자연주의란, 언어와 이성의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회화를 하나의 야생적 체험의 원천으로 되돌려놓음을 뜻한다.
"사물은 놀랍게도 자신들의 각을 합해가면서 인간의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언어로 만들어진 그 세상으로부터( ). 모든 것은 자체로의 어둠이니까. "(작업노트 중) 비합리적 인식론을 향하는 이러한 진술은 제여란의 회화 체험이 시작하는 지점이 어디인가를 분명히 밝혀준다. 회화란 또 하나의 어둠의 세계일 뿐이며 그녀는 이것을(조명아닌)「실천」하고, 표현하는 대신 그를 통해 「표현되어진다」. 이러한 행위는 일종의「무언의 세계로의 회귀」이며 이에 따라 일시에 무의미해지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스타일」,「방법」,「독트린」등과 이들의 전제조건인「예술」,「새로움」등의 개념이다. 제여란에게 있어 예술이란 피해야 할 대상이며, 진정한 스타일이 있다면 그것은「미리 준비하지 않는」감수성과 행위일 뿐이다. 그리하여 새로움은「원초성」으로 대치되어야한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겐 제여란에게 던질 중요한 질문이 하나 남아 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그와 같은 회화행위를 통해 충족하려는 욕망은 무엇인가? 왜 회화를 계속하며 무엇을 바꾸고자 하는가? 그녀에게 있어 회화의 가치나 효용성이란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앞서 그녀는, 예술은 "구체성의 상실과 새로운 시간을 위한 중간의 장소"라고 말하였다. 이 말의 뜻은 다음과 같은 웅변적 진술에 의해 비로소 충분히 이해된다. "재현이란( ) 매번 새롭게 회화적인 방식으로 되살아나야 하며 그럼으로써 충격의 가능성을 나 자신에게 돌려 주어야 한다."(작업노트 중) 즉 제여란의 관심사는 재현의 가능성을 부인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육체적인(즉 회화적인) 미메시스(즉 되살아남)」를 통해 재현으로 하여금 충격의 가능성, 즉「힘」을 되찾게 하는 데 있는 것이다. 결코 반복일 수 없는 이러한「힘있는 모방」을 통해 무엇이 변하는가?
삶의 리얼리티가 수반하는 모든 두렵고 낯설은 어둠이「전폭적으로, 기꺼이 수용할 수 있는 어둠」으로 바뀌어지는 것이다. 제여란에게 있어 회화란 「긍정」의 한 방식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