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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RELEASE

100% REFURB SHOW
2012. 11. 1(목) - 12. 5(수)

평창동 가인갤러리에서 11월 1일부터 12월 5일까지 이인현 작가의 개인전 <100% REFURB SHOW>가 열립니다. 가공하지 않은 캔버스에 청색 유채물감을 사용하여 간결한 화면을 완성하는 그의 작업은 ‘회화의 지층’이라는 제목 하에서 물성과 이미지, 정면과 측면, 평면성과 즉물성 등 회화의 본질과 그 존재방식에 관한 질문과 탐구를 거듭해 왔습니다.
2006년 이후 6년 만에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그 동안 천착해 온 문제를 제기하고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진전시킨 다양한 해법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작업과정에서 나온 파지나 허드레천을 재활용하는 것은 물론 작업 테이블이나 붓, 커피잔이나 아이의 신발과 같은 ‘물건들’을 ‘작품’ 위에 덧붙임으로써 모든 작품이 다른 작품의, 모든 물건들이 다른 물건들의 새로운 역할로 ‘재생’(refurbished)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거나, 전시가 이루어지는 공간 자체를 그림의 액자처럼 사용하면서 프레임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상기시킨다거나, 제작년도가 10년 이상 차이 나는 작품들을 쌓아 올려 이미지의 문맥을 보여준다거나, ‘피처링(featuring)’의 개념을 도입해 정광호 작가의 작품과 자신의 작품을 서로 중첩함으로써 매스가 결여된 조각과 두께를 가지는 회화의 물리적인 동거를 보여주는 등 다채로운 시도로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전시 제목에 쓰인 ‘리퍼브(refurb)’란 비교적 최근에 등재된 마케팅 용어에서 착안한 것입니다. ‘새롭게 하다’, ‘개조하다’라는 뜻의 ‘refurbish’의 줄임말로, 구매자의 단순변심으로 반품되거나 미세한 흠집이 있지만 실사용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전시상품 혹은 단지 포장이 약간 훼손된 상품 등의 재판매를 목적으로 재포장, 새단장 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신품과는 하등 다를 바가 없는, 신품도 중고도 아닌, 재생품(再生品 = refurbished) 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미술작품의 전시회는 오프닝을 하는 순간부터 ‘재고’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포장을 풀고 이미지를 대면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헌 것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관람객들은 신작을 요구하고 작가들은 신작 콤플렉스에 시달리며 끊임없이 새로운 이미지를 구하겠지만, 이미지를 새로운 이미지로 대체하는 것은 이미지 과잉의 악순환을 되풀이 할 뿐입니다. 기능상으로는 전혀 하자가 없지만 신품의 이미지만 없는, 다시 말해 이미지에서 새로움만을 제거한 그런 이미지를 ‘재생’ 하는 것이 이번 전시의 핵심인 것입니다.
따라서 ‘작가의 새로운 작품’을 바라는 관람객에게 어쩌면 이번 전시는 실망을 줄 지도 모릅니다. 신작이 전혀 없는, 기존 작품들의 재구성과 조합으로만 이루어지는, 100% 헌작으로 이루어지는 전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작가가 오랜 기간동안 집요하게 탐구해 온 회화의 지층, 즉 회화의 본질과 그 존재방식에 대한 질문과 탐구가 진전되어 ‘재생’에 이른 양상이 궁금하다면, 그 관람객에게 이 전시는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벤트가 될 것입니다.

PUBLIC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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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작가 인터뷰
글. 윤형주 I 가인갤러리 큐레이터

사용설명서 [refur – refurb – refurbish – refurbished] : 말로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그림. 순수하게 정보로 환원될 수 있는, 디지털파일에 근접하는, 예를 들면 실물보다 ‘사진빨’이 더 좋은 작품.

Q. 전시회의 명칭이 ‘100% REFURB SHOW’ 라고 되어 있는데, 무슨 뜻인가요? 우리가 ‘리퍼폰’이라고 할 때의 그 리퍼인가요?
A. 리퍼제품, 리퍼브제품의 그 refurb입니다. 리퍼브란 비교적 최근에 등재된 마케팅용어로, ‘새롭게 하다’ ‘개조하다’ 라는 의미인 refurbish의 줄임말인데, 구매자의 단순변심으로 반품되거나 미세한 흠집이 있지만 실사용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전시상품, 혹은 단지 포장이 약간 훼손된 상품등의 재판매를 목적으로 재포장, 새단장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리퍼브제품이란, 주로 노트북이나 스마트폰 등 제품의 운용이 물리적인 외관보다는 운영체계나 프로그램 쪽에 비중이 있는 IT관련 디지털기기의 AS나 재판매에 사용되는 제품으로 보통 신품대비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됩니다. 박스를 뜯는 순간 중고가 된다는 말이 있죠. 타인의 손을 타는 것에 대한 약간의 결벽증을 제외하면 신품과는 하등 다를 바가 없는, 신품도 중고도 아닌, 再生品(=refurbished)인 셈입니다. 요즈음은 IT쪽 뿐 아니라 의류, 가구, 식품관련 등, 보다 광범위한 마케팅용어로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Q. 아무런 하자가 없지만 신품이 아닌 미술작품이란 어떤 것으로 이해해야 하나요?
A. 기능상으로는 전혀 하자가 없지만 신품의 이미지만 없는, 이미지에서 새로움만을 제거한 것. 그런 이미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전시회라는 것은 태생적으로 초기불량을 품고 있습니다. 모든 이미지는 이미 재생된(refurbished) 것입니다. 포장을 푸는 순간, 이미지를 보는 순간, 그것은 ‘헌’(refurbished)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작품을 감상하는데 필요한 시간은 무한히 제로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모든 미술작품의 전시회는 출발부터 악성 재고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관객들은 항상 신작을 요구하지만 신작의 유효기간은 전시회의 종료시기보다도 일찍 찾아오거든요. 비유로서만이 아니라 이제 중견작가들은 작업공간이 아닌 재고용 창고를 구해야 할 판이죠. 이것은 매출양이나 재고율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직 미술이 온전하게 데이터베이스의 영역으로 진입하지 못했다면, 그래서 여전히 감상을 필요로 하는 그 무엇이라면, 미술작품은 더욱 거듭해서 재생되어야 하는 물체이기 때문입니다.
Q. 리퍼비시라는 게 일반적으로는 마이너스적인 이미지이고 그다지 선호되지 않는 느낌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일전에 언급하신 이미지지상주의와 관계가 있는 건가요? 신작을 출품하지 않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요? 어떤 식으로 이미지의 과잉상태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A. 끊임없이 이미지를 구하는 것은 우리의 성질(nature)이기 때문에 그것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이미지를 새로운 이미지로 대체해 가는 것은 과잉의 악순환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다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무 것도 보지 않을 수도 없을 테고요. 신작컴플렉스는 우리의 인식론에 기인한 것입니다. 이미지의 조합이 무한하다는 것은 그만큼 기시감도 동시에 쌓여간다는 말입니다. 즉 낡은 이미지의 조합도 무한하다는 거지요.
Q. 낡은 이미지란 말 그대로 새롭지 않은 이미지들을 말하는 것인가요? 기시감에 대하여 조금 더 설명해 주세요.
A. 낡은 이미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미지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스스로를 조회합니다. 이것은 이렇게 생긴 것입니다. 편의상 이것을 이미지의 과거형, 뒷모습으로 부른다면, 우리는 한순간도 이미지의 앞모습을 볼 수가 없는 거죠. 녹지 않은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없는 것처럼, 기시감의 도움 없이는 새로운 이미지를 우리는 알아볼 수조차 없습니다.
Q. 소위 기성작가의 경향이나 작품세계 같은 것도 기시감으로 볼 수 있겠군요. 6년만의 개인전이지만 지난 전시 때 출품했던 작품들도 있는데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A. 지난 개인전과 1998년 경주에서 있었던 ’defrost’전은 여러모로 닮은 점이 많은 전시였어요. 넓은 공간에 대표작을 망라한 회고전에 가까운 전시였는데 전시공간에 대한 취약성을 처음으로 느꼈던 것 같아요. 아마 그때쯤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이미지를 이미지로 극복하는 것에는 어떤 근본적인 갈증이 있다고 느낀 것이. 예나 지금이나 실제 전시보다 남겨지는 도록자료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지만, 지난 개인전은 팜프렛만(으로도) 충분히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의 팜프렛편집에서 이미 이번 전시의 밑그림은 대부분 그려졌습니다. 지난 번 팜프렛의 형식이 곧 이번 개인전의 내용입니다. 이번 전시는 그 설명대로 따라해 본 것에 불과합니다. 신작 없이 말이죠. 20년 전에 발표했던 작품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전시의 내용이 팜프렛에 담기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아직 보지도 않은 이미지가 팜프렛에 선행할 수 있나요.
Q. 앞으로 새로운 이미지의 신작은 계획이 없는 건가요?
A. 새로운 이라는 이름으로는 없겠죠. 액자나 판넬을 만들고, 물감을 칠하는 단순한 노동의 결과를 작품이라고 부르지는 않잖아요. 이번에 내가 만든 건 그런 작품들의 틀과 백그라운드에요. 자신의 밴드를 데리고 다니는 일종의 유랑악단(traveling band)을 생각했어요. 그러면 (논리적으로는)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돼요. (논리적으로는) 액자에 넣어진 모든 작품들은 공간으로부터 자유롭죠. 공간을 잘 활용한다는 것은 그만큼 공간의 제약을 많이 받는다는 거니까요. ‘나는 가수다’에서 밴드팀이 상대적으로 유리하다는 것과 비슷한 논리죠.

진정성과 호환성

A. 아기 신발이라 느낌이 조금 희석되긴 하지만 작품 위를 밟게 하고 싶었어요. 이 작품은 이전부터 특히 배경으로 쓰고 싶은 생각이 많이 들던 연작인데, 처음에는 보다 고운 계조의 작품 위에 붙여보니 아이가 ‘예수 같다’고 하더군요. 물위를 걷는 듯한 설정이 너무 직접적이어서 조금 거친 화면의 작품으로 교체했습니다. 다른 물건들도 그렇지만 이 신발은 여기저기에 붙여 보았어요. 자석으로 붙이는 거라 본체에 아무런 흠집 없이 착탈됩니다. 물론 다른 신발이나 오브제를 부착할 수도 있습니다. 테이블 위에 있는 커피잔도 어딘가에 붙였던 것입니다. 테이블은 갤러리에 비치되어 있는 가구입니다.
고집스러운 예술적 선택들은 항상 일회적이고 영구불변입니다. 미술대학교에서 학년이 바뀔 때마다 산더미처럼 쏟아져 나오는 폐작품들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오직 하나의, 일회의 용도에만 바쳐지는 물건들. 모든 작품이 다른 작품의, 모든 물건들이 다른 물건들의 새로운 역할로 다시 빛을 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신발을 제일 먼저 붙여 본 작품(?)입니다. 작업테이블에서 찾아낸 허드레천 위에 신발을 올렸습니다. 지난 작업의 흔적을 고스란히 받아낸 우연한 얼룩들이 이렇게 판넬에 씌우고 보니 나름 예뻐 보입니다. 주사위작품도 올려보았는데 그것도 잘 어울리더군요. 오랜만에 꺼내본 어릴 적 첫 아이의 첫 신발이 너무 앙증맞아서 나도 모르게 ‘이건 어떻게든 다시 써야 돼’ 라고 마음속으로 외쳤습니다. 질퍽이는 바닥을 걷는 듯한, 쌍으로 찍혀진 얼룩들이, 그리고 지금은 사용할 수 없지만 버리기는 아까운 미묘한 감정들이 서로 닮았다고 느꼈습니다.
연습용이나 버린 것으로 다시 작업을 발표한 이래, 몇 해 전부터 파지들을 버리지 않고 모으고 있습니다. 사실 파지를 보관한다는 점에서 이미 조금은 불순할지 모릅니다. 한번은 처음부터 파지처럼 시간의 흔적과 통제되지 않은 거친 느낌을 만들어보려고 시도를 했는데, 일부러 못 그린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훨씬 고난이도의 노동입니다. 무엇보다 심정적으로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어차피 이 어색함은 나만 느끼는 비밀 같은 것이라 굳건하게 정색을 지켜야 합니다. 이쪽으로 특화된 몇몇 작가들도 있지만 역시 테크닉이라기보다는 성격의 문제인 듯 합니다. 새로움, 해방, 성실함, 열정 등이 하나의 억압일수 있다면, 이런 사전적 의미의 ‘좋은’ 말들을 제외한 행동을 어떻게 제정신으로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막막함이랄지.. 오버하자면 가령 우주모형의 빅크런치가 시작된 새아침의 마음가짐 같은 것? 결국 작업대의 바닥에 겹겹이 쌓인 아주 오래 된 천 중에서 ‘선별’하여 사용하기로 했습니다.(작업조수와 둘이서 보물찾기 같다고 좋아했습니다.) 그래도 어딘가 조금 어색한 곳은 손을 보고 낙서도 하고 얼룩을 덧칠했는데, 처음에는 민망하지만 신기하게도 - 이런 류의 이미지는 어떤 기준이랄 게 없으니 – 거의 티가 나질 않습니다. 취향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완성도의 기준은 없는, 대신에 오래 된 것과 새 것의 숨은그림찾기 같은 은밀한 재미가 있습니다.(고전적 의미의 기존 그림들의 완성도라는 것은 이를테면 인위적으로 시공을 정지시키는 것에 다름 아닌 게 아닌가..!)
이런 작업들을 진행하면서, 잘 그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그린 그림이란 어떤 것인지 새삼 의문에 빠졌습니다. 그나마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말(기준)은 ‘그럴듯한’ 것입니다.
이번에 선택된 버린 천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자연스럽고 풍성한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만드는 일이란 불가능에 가깝더군요. 우연한 시간의 성과물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사용한 것과는 다르지만 붓과 커피잔을 붙여 보았습니다. 이미지와의 연관성도 있고 작업시에 가장 친근한 물건들입니다. 연습용으로 혹은 깔개로 버려지는 수많은 파지들을 보면서 테이블보나 런천매트, 혹은 소파천으로 재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봤습니다. 브랜드런칭을 하자는 우스개소리도 나왔고요.. 식탁세팅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두 물체는 서로 다른 중력하에 놓여진 연출입니다. 붙이는 위치를 이리저리 바꿔보다가 ‘이’라는 글씨로 보이는 순간 결정이 되어버렸습니다.
점작업을 할 때 전용으로 사용하던 붓을 붙이려고 했는데 도통 찾을 수가 없어서 다른 사람의 붓을 빌렸습니다. 작품에 출연시켜 주겠다고 구슬려서 말이죠. 원래의 붓이었다면 도리어 식상한 동어반복이 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후일담이지만 붓의 행방을 찾느라 온종일 작업실을 뒤지고 몇년전 조수들까지 수소문해서 알 필요도 없는 건물의 리노베이션 역사까지 들어야 했습니다. 달랑 걸어버리면 금방 끝날 일을.. 붓의 제공자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결국 전시할 것은 인사동 필방에서 다시 구입했습니다.


프레임은 권력이다

Q. 예전에 선생님의 작품에 관하여 ‘회화적 설치’라는 분석도 있었습니다만, 이번의 경우에는 특히 회화작품인지 오브제작품인지 설치작품인지 더욱 애매해진 것 같습니다.
A. 여전히 모든 회화는 ‘현실에 처한 회화’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모든 작품이 기본적으로는 설치작품이고, 따라서 공간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말이죠. 그런데 그 현실이 자신의 대기권 안에서만 가능한 실존주의적 감동이나 낭만이 아닌 모종의 비현실을 가끔 떠올리기도 합니다. 불속에서 차를 달이는 어느 오도송이나 물속에서 차를 마시는 스펀지밥을 보면서 무중력적인 쾌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Q. 관객들이 프레임처럼 만들어진 벽체를 넘어 들어가 그림의 일부가 된다거나 그런 광경을 다른 관객이 바라보는 중첩된 구조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만.
A. 그림이 현실세계와 가장 가까운 부분은 정면이 아니라 측면입니다. 이 측면을 차단하는 것이 프레임이죠. 원래는 가려져 있던 부분, 즉 팜프렛이나 사진, 정면視로 구현 불가능한 부분을 보다 적극적으로, 취약한 부분을 드러나게 하는 방식으로 디스플레이하는 것. 예를 들면 프레임으로 인하여 작품의 일부가 엄폐된다던지, 보여지지 않는 벽면에 작품을 배치한다던지 하는 방식으로 말이죠. 이전의 비스듬히 바라보는 방법보다는 훨씬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방법입니다. 작품에 부착된 오브제들도 그 부분을 가리는 게 되는 셈이죠. 팜프렛을 만든다거나 사진을 찍는 행위는 작품의 옆면을 제거하는, 프레임을 씌우는 행위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혹은 작품을 말로, 이야기로 옮기려는 행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누락 없이 전적으로 정보화될 수 있는 작품이야말로 완벽한 작품이다 라는 역설이 성립됩니다. 액자는 그림의 옆면을 가리면서 시선을 안쪽으로 집중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마그리트의 여러 작품들에서 보여 지듯이 그림은 자신을 그림 안에 가둡니다. 그렇게 그림을 볼 수 있게, 혹은 없게 해주는 것이 바로 프레임이며, 프레임은 그자체로 존재의 틀임과 동시에 인식의 틀인 것입니다. 그것은 그림을 ‘있게’ 해줌과 동시에 ‘알게’ 해주는 것이죠.
보다 정확하게는, 우리가 그림의 이미지에 몰입할 때 그림의 물질적인 측면을 인지하지 못하듯이 그림은 그것이 보여지지 않는 동안에만 존재합니다. 그림을 본다는 것의 본령이 프레임의 경계를 의식하는 일이라면 – 그림의 안팎을 기웃거리는 일이라면 – 그림을 그리거나 작품을 한다는 것은 그 경계를 짓고 가공하는 일에 다름 아닌 것이 됩니다.
Q. 작업의 비중이 프레임으로 옮겨진 것과 함께 실제적으로는 벽체를 만드는 등 갤러리의 공간을 변화시키는 것이 이번 전시의 가장 주된 작업 같은 데요.
A. 가급적이면 작품화면의 페인팅에는 직접 개입을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래서 나온 것이 조합인데 이전에도 그런 식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대담하게 화면의 앞에 다른 작품을 부착해 보았습니다. 조합이라기보다는 가린다는 의미를 원했고, 위치를 옮길 수 있는 임의성, 호환성, 언제라도 원위치 할 수 있는 가역성 등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가벽의 설치는 갤러리측의 협조가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죠. 작가는 훌륭하고 개성적인 공간을 만나면 거기에 작품을 설치하는 상상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갤러리에 상주하고 계시는 분들은 좀 다를 것 같아요. 왠지 조금 따분할 것 같다고 할까. 같은 공간에 작품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할까. 작가들보다는 갤러리공간을 통시적으로 파악한달지 그런 거죠. 그래서 저는 집에 일체 작품을 걸어두지 않거든요. 일전에 갤러리 공간구조를 파악하려고 홈페이지에 들러 사진들을 보다가 마치 정지카메라로 고속촬영을 한 무비처럼 공간은 움직이지 않고 작품들만 분주하게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영화 ‘타임머신’에서 쇼윈도우 안의 마네킹의 의상이 시대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것과 흡사했어요.
지난 개인전의 팜프렛에 실린 도판을 그대로 어느 사진전에 출품한 작품의 현장 전시사진입니다. 이 도판을 다시 다른 공간에서 전시한다면 마주보는 두 거울 속의 이미지처럼 영원히 계속될 수도 있겠죠.
작품은 그대로인데 작품을 둘러싼 환경이 계속 새롭게 갱신되는(refurbish), 기시감의 과잉상태.

그림의 그림의 그림

A. 이 작품은 3개의 층, 아니 4개의 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초기의 점작업이 1994년작이고 주사위작업이 1995년작입니다. 그리고 2012년에 가장 아래에 있는 작업대를 만들었으니 여러 제작연대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캔버스천의 조직이나 상태도 다르고, 점들의 색상이나 모양새도 많이 다르지만 점들의 이미지는 서로 연결되어 보이기도 합니다. 작업대는 가장 최근에 만들었지만 오래되었다는 설정으로 몇 가지 트릭 같은 것을 추가했습니다. 자신의 근거랄지 문맥, 백그라운드를 가지는 회화를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물론 이것도 다른 작품들과의 조합 및 추가 첨삭이 가능합니다. 각각의 개체들은 서로가 프레임의 역할을 할 것입니다. 양 옆의 뚫린 프레임과는 상대적으로 돋아있는 프레임입니다. 사이즈나 높이가 들어맞게끔 되어있죠.
초기작업에서 조심스럽게 이중으로 찍은 점들이 보이는군요. 고정된 이미지를 평면 위에서 이중상으로 풀어보려고 했던 것이 주사위의 대담한 표현과는 대조적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색상이나 크기의 차이가 두드러져 보입니다. 한 시야에서 바라보니 불과 1년 사이인데도 회화론에 대한 확신이 차이가 새삼 느껴지는군요. 처음 이 조합을 생각했을 때는 10년 정도의 시차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때는 매년 개인전을 했었군요!
Q. 이 관객들은 뭐죠?
A. 요즈음은 작품을 앞에 두고도, 아니 음식을 먹기 전에도 기록부터 하는 것이 기본이더군요. 그런 상황을 연출한 겁니다. 유명전시회나 명승지에서 인파를 피하여 사진을 찍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시잖아요. 그렇다고 아무도 없는 사진은 엽서나 팜프렛과 다를 바가 없죠. 이렇게 ‘인증’을 해주는 것이 당사자들에게는 의미가 있을 테니까요. 그런 인증의 인증, 기록의 기록으로 걸러지는 과정에서 애초의 피사체가 가진 분류하기 힘든 예술적 의미들이 희석되고 탈락이 될 수 있거든요. 무게중심이 감상과 해석에서, 기록하고 분류하는 쪽으로 옮겨진다는 거죠.
Q. 학생들을 동원하신건가요?
A. 동원이 아니라 모집을 한 거죠. 현장감이나 스케일감을 내기 위한 블러샷을 찍을게 아니니까 얼굴이 안 나오게 해 달라든지 할 거면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이 초상권을 주장하는 경우는 없잖아요. 이들은 이 전시를 미리 본 관객들이기도 합니다. 작품은 한 달 이전에 걸려있었거든요. 아마 전시회의 오픈 당일에 다시 온다면 이미 본 작품을 다시 보는 기회를 가지게 되겠죠. 어차피 걸린 작품도 신작은 아닙니다만.
Q. 그래서 작품이 아웃포커싱 되어 있는 거로군요. 이 아이는 아드님?
A. 내 작품에 대한 평을 물어보니 쿨하게 ‘밋밋해’라고 합니다. 촬영을 부탁하니 시큰둥해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기대를 하고 있더라고요. 포즈요구에도 잘 협조해 주고. 그런 건 재미있나 봅니다. 사진을 편집하고 있는데 ‘내 사진이 너무 많이 나와’ 하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면서 싫은 눈치는 아니더군요.
Q. 커피잔 자국 같은 모양이 자주 등장하는군요.
A. 자국은 작업대를 연상시키는 클리셰로 애용되는 이미지입니다. 데스크의 현장성이나 평면성, 수평성을 드러내고 싶을 때 상투적으로 출현하죠. 커피잔이나 잉크병 자국 같은 둥근 흔적에 대한 선호가 있기도 하고, 일본작가 이다 쇼오이치(井田照一)에의 작은 오마주이기도 하고요. 싸인처럼 보이기도 하고.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커피얼룩을 실감나게 만들려면 몇 가지 포인트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쪽이 열려있고 다른 한쪽에 흘린 양이 몰려야 하는데, 이것이 진짜처럼 보이는 데는 잔을 놓았다가 들어 올릴 때의 기울기와 방향성, 바닥에 전달되는 압력 등 실제의 특징적인 움직임의 결과와 동일하다는 오묘한 이치가 있더군요. 그것을 반전시켜 보니 별의 엄폐(eclipse)형상과 닮아 있습니다. 커피잔이 바닥을 잠시 가리고(누르고) 지나가는 소소한 일상과 아득히 먼 천체의 운행에는 어떤 동형반복이 있는 걸까요? 사물도, 작품도, 관객들도, 바닥을 잠시 가리고 지나가는 것이 아닐까요? 물감도 기본적으로는 바닥을 가리는 것이니까요.
정면에 보이는 큰 캔버스와 막대모양의 캔버스의 조합은 서로 닮은꼴입니다. 크기의 차이만큼 풍경 같은 일루전의 거리감도 차이가 납니다. 마찬가지로 같은 사이즈의 프레임 안에서 움직이는 관객들의 위치도 서로 닮은꼴임을 느낄 수 있도록 의도한 것입니다. 통상 막대형 캔버스의 아래쪽에 조합되는 부분은 맞은 편 벽에 걸려 있습니다. 이 창을 통해서 보여지게 되겠지요.
정작 조합을 시키고 보니 천의 색상이 미묘하게 달라서 다시 제작을 해야 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정작 나 자신은 사소한 색상차이 정도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작업조수의 말을 듣고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는 겁니다.
회화의 지층 계보 중에서 비교적 컬러풀하고 예쁜 축에 속하는 작품입니다. 그래서인지 몇 개 남아있지 않아서 구성하는데 가장 고심을 한 작품입니다. 그야말로 남아있는 재고를 긁어모아 조합한 결과입니다. 옆면만 드러나 있으니 속살이 가장 많이 보이는 편이죠. 그래서 어떤 이미지를 통한 소통가능성을 얘기하시는 분도 계신데, 이번에 앞으로 튀어나오게 조합된 작품들과 같이 전시를 해 놓으니 옆면을 보인다는 컨셉이 조금 더 명확해 지는 것 같습니다. 위로 계속 쌓아 올라갈 수 있다는 확장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연필선을 그었습니다.


재현이 아니라 재생이다

A. 멀리 보이는 밝은 프레임 안에는 막대형 캔버스의 아래쪽이 걸려 있습니다.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프레이밍이 가변됩니다. 위아래로 번져나온 물감이 호수에 반영된 그림자를 연상시키는 일루전을 가진 속칭 양수리라고 불리는 시리즈인데, 초기에는 직접 양쪽 캔버스에 번갈아 같은 정도로 칠을 했습니다만 보다 정확한 대칭이미지를 얻기 위해서 몇 단계의 개선된 제작과정이 있었습니다. 캔버스의 넓은 면에 물감을 칠해 놓고 막대형 캔버스의 긴 모서리변을 45도로 눌러서 물감을 빨아들이게 하면 데칼코마니처럼 대칭이미지가 생겨나는 거죠. 바닥에 놓인 넓은 캔버스가 붓의 역할을 하는 겁니다.(반대로 양수리 작품을 바닥에 놓인 빈 캔버스에 찍으면 미시시피라는 별칭의 더 큰 대칭이미지의 작품이 됩니다.) 위아래 두개의 동일한 이미지의 캔버스가 필요하므로, 천을 두 겹으로 겹쳐 싸서 찍고, 천을 해체해서 각각의 막대에 다시 뒤집어 매면, 두 캔버스가 조합된 정확한 반영이미지를 얻을 수 있는 거죠. 보통은 두개를 위아래로 겹쳐 놓습니다. 이 반영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하여 종종 일루전으로 치우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실 양수리라는 네이밍도 여기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번에는 한쪽의 막대형 캔버스를 분리하여 반대편 프레임 안에 걸어 놓았습니다. 설명으로는 까다로운 것 같지만, 머릿속에서 반영의 이미지를 재구성 해보자는 의도였습니다.
Q. 그러한 가역적 착상이나 묘화도구의 개발, 재활용 등이 매우 기발하고 독창적인 것 같은데..
A. 대부분 내가 보았던 것에서 베껴온 거죠. 자연현상이나 풍경, 기타 인공적인 건물, 타인의 작품들 등등으로부터 자연스럽게 가지고 옵니다. 나는 보기보다 수용적인 측면이 강해요. 선, 후배, 제자를 가리지 않고 말이죠.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하고, 또 그것을 대부분 기억하고 있어요. 내가 아이디어맨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인 것 같아요.
Q. 전시회를 잘 안 다니시는 걸로 아는데 수용적이라는 말은 좀 의외입니다.
A. 그러니까 사람들은 거꾸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요.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은 보통 별로 독창적이랄 것도 없는 부분이기도 하거니와 최초의 순간적인 자극에서 결과는 워낙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예를 들면 액자의 하단에 제목을 인쇄한 판화작품이 있는데 도널드 설탄(Donald Sultan)의 과격한 싸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면 누가 표절이라고 태클을 걸 수 있겠어요?
Q. 그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하게 해 주시면?
A. 일본에서 어느 구매자로부터 ‘달밤’이 도널드 설탄의 작품과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일본에서는 두번째로 베끼는 것 까지는 괜찮다는 속설이 있더군요(자세한 의미는 모르겠지만). 물론 이미지상으로는 흡사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달밤’은 에디션의 넘버링개념이나 개별적인 농도의 차이 등, 작품의 프로세스는 전혀 다릅니다. 아무튼 그는 달밤을 구매를 했고 나는 ‘그럴 리 가 없다’라고 대답을 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때까지 나는 도널드 설탄이라는 작가를 몰랐으니까요. 이후에 그의 작품을 접하고 엉뚱하게도 그의 과감한 싸인에 강한 인상을 받아서 ‘4D Perspective – 어두워질때까지’ 연작에서 과감하게 액자에 내부에 싸인을 프린팅 해 넣는 계기가 되었지만, 그 연관성은 아무도 눈치를 못 채더군요.
한때 곽인식의 드로잉작품을 보고 나도 점작업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죠. 노다 테츠야(野田哲也)의 日記연작을 접했을 때는, 시각적인 의장등록보다 나만의 프레임의 발굴이 필요한 것이라고 받아 들였습니다. 단언컨대 ‘회화의 지층’은 그의 작품입니다. 그 당시 일본의 한 조교로부터 들은 고백인데 학부시절 아무리 노력해도 이우환의 작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는 거에요. 한참을 그리고 있다 보면 소스라치게 닮아 있다는 겁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랬다는군요. 그 후로 어떻게들 그 주박(呪縛)에서 풀려났는지 심히 궁금합니다.
독점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혼동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교훈적이거나 교육적인 옛 말씀들은 널리 나누어야 하겠지만 예술적인 것들은 다를까요? 그렇다면 예술적인 교육은 어떨까요? ‘그림을 맨 처음 벽면에 걸 줄을 안 그는’ 누군지 모르지만, ‘변기나 모니터를 맨 처음 화랑에 갖다 놓을 줄 안 그는’ 독점이 허용되어야 할까요?
닮았다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면을 타인에게서 발견하고 그것에 안도하고 다시 나에게로 와서 재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거든요. 그런 것들을 숨길 필요는 없잖아요. 심지어는 큐브릭의 영화에 나오는 모노리스를 보고 내 작품의 면모를 떠 올리기도 했어요. 물론 그 영화가 훨씬 먼저 만들어진 것이지만 순서 같은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숨쉬기 같은 거죠. 누가 먼저랄 것도 없는.
앞으로는 이것을 극단적인 미학적 실험이나 잠언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실천감각이 요구된다는 점입니다. 더 이상 이미지를 만드는 이의 특권을 주장하기가 어려워졌을 뿐 아니라 사람들은 이제 ‘만든다’는 말 속에서 ‘복사한다’는 의미를 더 많이 실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 홀로 도를 딱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거죠. 만드는 주체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그 주체가 옮겨가는 것, 그리고 되풀이 되는 것입니다.
Q. 그래도 대중들은 여전히 예술가의 특권적 위치를 인정하고 있지 않나요?
A. 그 고집스러움을 비하하는 대중들도 있죠. 대중의 반응을 정확한 지표로 삼는 예술가들도 있고요. 무엇보다 과연 대중이 가장 정확할까요? 이 말이 맞는다면 그것은 대중들이 가장 ‘이랬다 저랬다’를 잘 하기 때문이라는, 모순적인 전제 하에서 만이죠. 일관성을 가져야 할 아무런 부담이 없으니까요. 소위 예술가들도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제상황에서 대중들의 판단을 전적으로 참조하지는 않죠. 대표적인 언행불일치의 사례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생계형 예술가’ 라는 명칭은 왜 자랑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죠?
비미술인, 라이트미술인과의 관계. 경합프로그램의 프레임관련......
페이스북이야기.....

프레임의 프레임의 프레임

A. 사실 이 벽면은 막대형 캔버스와 동일한 사이즈의 슬릿을 통하여 동굴을 탐험하듯 보게 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하면 작품을 걸고 나올 수가 없어서 변경을 했습니다. 마주 보는 프레임과 상호보완되는 효과도 있고 자연광과 대비되어 쇼윈도우를 연상시키는 화려함도 있어서 나쁘지 않더군요.
비록 목재로 만들어진 칸막이에 불과하지만 물리적인 경계는 어떤 류의 정서를 환기시킵니다. 아이들의 땅따먹기놀이나 선을 그어서 자신의 영역을 만들기, 혹은 그 와중의 다툼은 매우 역동적이고 신기하게까지 느껴지지 않습니까? 회화작품의 비밀이 그렇듯이 이미지의 아우트라인은 의미론을 훌쩍 뛰어넘어 생각의 아우트라인을 정해 버립니다. 유럽여행중 미케네의 아가멤논의 무덤에 들어섰을 때 나는 문득 노다 테츠야의 목판화를 떠올렸습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도쿄 긴자의 화랑가에 한평 남짓한 아주 작은 갤러리가 있었습니다. 그 곳은 항상 문을 닫아놓고 손바닥만 한 창을 통해서만 작품을 볼 수 있도록 해놓았습니다.
Q. 나중에 써넣은 어색한 메모들은 다행스럽게도 잘 보이지 않는군요. 신발자국은 밀실추리소설의 분위기가 나지 않나요?
A. 몇 년 전 캄보디아의 어느 외딴 사원을 방문했을 때, 어두운 회랑을 헤매다가 매몰된 돌무더기들의 틈 사이로 이름 모를 석상을 촬영하고 있는 외국인과 마주친 적이 있었습니다. 가이드북에도 나와 있지 않은 대단한 포스의 여신상이었습니다. 장비들로 짐작컨대 일반 관광객처럼 보이지는 않았고 어딘가에 게재될 사진을 찍는 프로 카메라맨 같았는데, 매우 비밀스러운 장면을 불시에 조우한 듯한 뭔가 흥분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치 어드벤처영화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촬영된 결과물은 깔끔한 엽서사진만 남긴 채, 안타깝게도 석상을 가리는 돌기둥들과, 곡예에 가까운 촬영각도와, 또 그것을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는 한국에서 온 한 관광객이 있다는 걸 보여주지는 못하겠죠.
여기에 출연한 관객들은 전시기간중에, 그리고 팜프렛을 볼 때마다, 미리 본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될 겁니다.

featuring with

A. 조각가 정광호의 대표작인 ‘나뭇잎’을 내 작품 위에 붙여 보았습니다. 나는 이것을 콜라보레이션(協業 collaboration)이나 2인전이 아닌 ‘피처링(featuring)’이라고 부릅니다. 두 사람이 한 목소리를 내는 듀엣이나 하모니를 생명으로 하는 합창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서로의 지분을 침해하면서도 각자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가요배틀을 생각했습니다. 각자의 작품을 위계와 상관없이 동시에 한 시야로 보는 것. 서로 쓸데없이 양보하거나 결론을 도출할 필요가 없는 최선의 동거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한 기계적인 중첩이 필요합니다. 따로 본 두 작품을 동시에 다시 떠올리듯이 말입니다.
정광호의 작품을 모르는 사람들은 전부 내 작품인 줄 알더군요.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요? 여기서도 브이질은 필수입니다. 해당 작품과는 화해할 필요가 없거든요.
두께를 가진 회화와, 매스가 결여되어 있는 조각은 의외로 혹은 예상대로 잘 어울려 보입니다. 그림자처럼 진하고 흐리게 찍힌 두 점의 평면적 일루전과 잎맥의 입체적 그림자가 의외로 어울리고, 두 점이 마치 나뭇잎의 벌레먹은 흔적인 것처럼 예상대로 잘 어울립니다. 너무 잘 어울리는 점이 바로 이번 피처링의 최대약점일 우려가 있습니다.
물고기는 거리를 약간 띄워서 매달았습니다. 유치한 발상이지만 걸어가면서 보면 물고기가 앞으로 나아가는 듯 움직입니다.
이 점들 또한 물고기의 눈인양, 옆줄인양, 똥인양 너무 잘 어울립니다.

노는 것도 일이다 일이야 !

A. 신작컴플렉스는 항상 억울하게 ‘빚진’ 마음으로 전시회를 맞이하게 합니다. 이번 전시의 컨셉은 ‘신작을 만들지 말자(100% REFURB SHOW)’라서 모처럼 느긋한 마음으로 준비를 했습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작품들로 하는 만큼 주머니가 두둑한 심정인 거죠. 게다가 피치 못할 여행예정으로 마음도 부산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있을 줄 알았던 이 작품이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는 겁니다. 아마도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판넬을 재활용하려고 폐기한 것 같습니다. 원작은 1992~3년 쯤 제작인데 그때도 이 작품은 미발표 신작이었습니다. 작품을 본 유일한 사람이 그 당시 작업조수였던 서해근작가 단 한명이었어요.(그럼 엄밀히는 신작이 아닌 게 되나요?) 그런데 서해근군은 내 작품 중에서 이 작품을 제일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번짐이 약간 마음에 안 들긴 했지만 이번 전시는 화면의 이미지만으로 승부하는 컨셉이 아니라서 충분히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현물이 없으니 시뮬레이션한 사진파일로 전시를 할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다시 만들기로 했습니다. 원작은 이번에 설치할 벽면에 비해 조금 큰 편이라 만드는 김에 사이즈도 약간 줄였고, 번짐도 그때보다는 훨씬 잘 나왔습니다. 새로 구입한 천의 상태가 아주 좋았습니다. 이쯤 되면 신작이라 할만도 한데, 아무튼 새로 무언가를 ‘처음으로’ 만든다는 부담감이 없어서 편했습니다. 머릿속으로는 ‘그때 그것’을 다시 만드는 것이었으니까요.
작업의 난이도로 보자면 이 작품이 제일 힘이 듭니다. 한시간 이상 1초도 쉬지 않고 고도로 집중해서 붓질을 해야 하거든요. 그것도 매일 한번씩 수차례 반복해서요. 이것 말고도 놀고먹기에는 refurbish해 줘야 할 일이 많았지만 ‘놀기 위해 일한다’는 말 만큼이나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노동이었습니다.
언젠가는 시뮬레이션만으로, 말만으로, 생각만으로도 작업내용이 전달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잔뜩 구입해 놓은 성능 좋은 천들은 어떻게 하지요?
내 작품 중에서는 드물게 12禁쯤 되는 등급을 가지고 있습니다. 19禁이상으로 상향조정도 가능합니다.
바로 이전의 작품과 같은 방에 설치된 작품인데 두 작품은 서로 상반된 동선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앞의 작품이 전후의 동선으로 엄폐를 말한다면 이 작품은 양 옆으로 감상의 동선이 이루어집니다. 정면에서는 그림자로만 입체감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벽면에는 유화물감과 비슷한 반광택의 도료를 칠했습니다.
이 작품도 명목상으로는 재고 전시지만 여러 군데 재처리과정(refurbish)을 거쳤습니다.
갤러리의 입구 – 에 걸려있는 – 사진입니다.
이 벽에는 아무 것도 걸려있지 않습니다.
걸려있지만 보지 못한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