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ARTIST

  • Jia Chang
    장지아


    개인의 원초적 감각을 자극하는 파격적이고 독창적인 작업으로 우리 사회의 규범과 금기에 도전하는 작가 장지아는 주로 터부시된 것들, 습관적으로 용인되는 규율이나 체계를 꾸준히 폭로해 왔다.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주관하는 올해의 작가에 노미네이트 되었으며 두산 연강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PRESS RELEASE

The Reason is You
2013.11.18 (월) - 12.27 (금)

독립큐레이터 류병학이 선정한 5인의 아티스트
세계 미술계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아티스트
  

장지아 개인전은 가인갤러리와 류병학 독립큐레이터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기획전입니다. 가인갤러리는 류병학 독립큐레이터와 새로운 개념의 전시기획을 도모하기로 하고, 일명 ‘류병학이 선정한 5인의 아티스트’를 구성하였습니다. 이번 장지아 개인전은 ‘류병학이 선정한 5인의 아티스트’ 개인전의 1탄입니다. ‘류병학이 선정한 5인의 아티스트’는 (류병학 독립큐레이터가 생각하는) 세계 미술계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아티스트를 뜻합니다. 도대체 어떤 작품들이 세계 미술계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까요?   
류병학 왈, “국제미술계에서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미술사(미학 등 미술이론)를 간과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저는 ‘미술평론가’ 입장에서 미술사적으로 주목받았던 그리고 주목받아야 마땅할 작품들을 제작하시는 작가들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미술사’는 제가 생각하는 미술사, 즉 류병학의 ‘개똥 미학’을 뜻합니다. ‘류병학의 개똥 미학’이 궁금하신 분들은 올해 11월 중순부터 줄줄이 사탕처럼 오픈될 가인갤러리의 개인전들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친년 되기’에서부터 ‘아름다운 고문’까지
장지아에게 금기(禁忌)도 성역(聖域)도 없다!  

아티스트 ‘장지아’를 한 마디로 평가 하신다면요? 류병학 왈, “장지아는 2000년 <아티스트가 되기 위한 신체적 조건>을 시작으로 미술계에 새로운 장(場)을 열어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남/녀 차별’과 ‘성역과 금기’에 도전하여 아티스트의 양심과 태도를 일깨왔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장지아는 미대 재학생 시절 <아티스트가 되기 위한 신체적 조건>(2000)으로 미술계에 혜성과 같이 등장했습니다. 장지아의 <아티스트가 되기 위한 신체적 조건>은 일종의 ‘아티스트 처세술(the art of living)’입니다. 어떤 상황이 발생해도 능동적으로 대처하겠다고 말이죠. 장지아의 일명 ‘미친년 되기’는 새벽에 블랙 셔츠를 벗고, 블랙 티도 벗고, 브라자마저 벗어 알몸의 상체와 얼룩말 바지만 입고 길거리를 배회하는 퍼포먼스입니다. 만약 어느 여자가 새벽 길거리에서 유방을 드러내고 당당하게 걸어 다닌다면, 여러분은 그녀에게 뭐라고 말할까요? 미친년? 그렇다면 여자가 아티스트가 되려면 ‘미친년’이 될 각오를 해야 한단 말인가요?
각종 섹스 포즈들을 그린 드로잉 작품인 <난 열여섯 살이예요(I’m sixteen)>(2001)에서부터 불행의 보증수표인 보험을 다룬 <원더풀 행복보험(Wonderful Happiness Insurance)>(2002),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렸던/방영했던 총3편의 싱글채널 비디오로 이루어진 장지아의 <중력의 중심은 어디인가?>(2004), 일명 ‘서서 오줌 누는 여자’로 논란이 되었던 <오메르타(OMERTA) : 침묵의 계율>(2007), 고문의 역사 속 장면들을 속죄의 방식으로 연결시킨 작품들로 구성된 <나는 고백한다(I confess)>(2011)에 이르기까지 장지아는 금기시된 것들을 꾸준히 폭로해 왔습니다. 말하자면 장지아에게 금기나 성역은 없다고 말입니다. 이번 가인갤러리의 <이유는 바로 너(The Reason is You)> 역시 장지아에게 ‘금기나 성역은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남을 설득할 필요 없는 나의 명분으로 작업된
도축된 소한마리의 피로 만든 벽돌, 오브제 
 

2009년 장지아는 도축된 소의 피로 작업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작업을 진전시키지 못하고 중단했습니다. 와이? 장지아 왈, “생명이 끊어진 지 몇 시간 안되어 체온의 따뜻함을 안고 있는 유기물을 작업의 도구로 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가로서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하지 말아야 하는, 경이로움에 대한 훼손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장지아는 소피 작업을 중단한 후 붉게 물든 그녀의 손을 여러 차례 씻어도 마치 각인된 죄의식처럼 씻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경험이 바탕이 되어 장지아는 <나는 고백한다>를 작업하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따라서 소피 작업이 장지아에게 얼마나 깊게 각인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4년 후 장지아는 다시 소피 작업을 합니다. 왜냐하면 “온전한 나의 것, 남을 설득할 필요 없는 나의 명분, 작가와 작품이 달라붙는 필연적인 연결고리”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장지아 왈, “작업제작을 하던 날 나의 상체는 소의 피를 다루면서 피칠갑을 하고 있었고 내 하체는 하혈로 피가 범벅이 되었습니다. 내 주변은 따뜻한 피가 천지였죠. 끈적이고 따뜻하며 비릿한 피 안에 내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나는 이놈의 것들과 맞짱을 뜨는구나… 나의 자궁은 공포와 종교적 성스러움, 또는 컬트 영화 속 한 장면처럼 한 달에 한 번씩 접하는 일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기이하게 마지막 안녕을 한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 작업에 있어서 영감에 의해 창작하는 아티스트가 아니라 작품을 세상으로 매개하는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가인갤러리 첫 번째 전시장을 들어서면 테이블 위에 붉은 벽돌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관객에게 먼저 와 닿는 것은 붉은 벽돌의 시각(적 형태)보다 후각입니다. 왜냐하면 관객은 비릿하고 역한 냄새를 코로 먼저 들이키기 때문이죠. 그 작품이 바로 장지아의 <도축된 소한마리의 피로 만든 벽돌, 오브제>(2012)입니다. 그 작품은 제목 그대로 도축된 소한마리의 피로 만든 벽돌 형태의 오브제 작품입니다.
장지아 왈, “한 때, 생명을 지탱하고 에너지를 공급했던 소의 피가 다른 물질의 대상으로 바뀌는 이 과정은 저에게 있어서 정신적인 것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곧 소멸되는 에너지, 끊어진 생명력, 본래의 의미와 가치가 시간의 흐름에 의해 냄새나고 곰팡이 피는 일상의 오브제로 바뀌는 과정. 이 금기의 과정을 직접 겪으며 앞으로 다가올 시련에 맞설 수 있는 내면의 에너지를 응축시킬 수 있었습니다.”

죽지 않고 살아남기
삶이란 무엇인가?

장지아의 머리 뒤쪽 목을 보면 유난히 긴 머리카락 하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이는 그 긴 머리카락을 떼어내고자 잡아보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내 그 머리카락이 진짜가 아닌 문신인 것을 알게 됩니다. 장지아 왈, “이 머리카락은 다른 이로부터 스킨쉽을 유도하는 기능도 합니다. 머리카락을 보면 떼어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반영했으나, 아무도 건드리지 않네요. ㅎㅎ"
그리고 장지아의 손목에는 얇은 머리끈 같은 것이 둘러져 있습니다. 그런데 머리끈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얇게 보입니다. 알고 보니 그것 역시 문신이더군요. 장지아 왈, “손목에 있는 선 타투는 자주 병원을 다니면서 병원에서 몸에 선을 긋는다는 것이 얼마나 공포스럽고 불안한 일인지 그리고 정상이 아니라는 표식의 흔적인지 알기에 더 이상 그런 불편한 감정을 넘어서기 위해 미적인 표현으로 남긴 것입니다.”
가인갤러리 두 번째 전시장에는 거대한 소가죽에 드로잉한 작품들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산과 강 그리고 나무와 집 또한 말을 타고 가는 사람과 배를 타고 있는 사람 등 아름다운 풍경이 드로잉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 드로잉을 세심히 바라보면 붓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인두질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장지아의 <인두질 된 풍경>(2012)입니다. 그 풍경은 허구의 이상적인 대상을 그린 것이 아니라 장지아가 운남에서 본 이질적인 풍경들(말린 고기와 아름다운 풍경)을 소가죽에 마치 문신하듯 인두질한 것입니다.
장지아 왈, “운남 일대의 식당들에서 통째로 크게 말린 고깃덩어리들을 처마에 매달아 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었는데, 우리가 흔히 보는 고깃덩어리와는 다른, 사이즈와 리얼한 질감, 색상에 놀라게 됩니다. 스페인에서 주로 먹은 '하몽'과 비슷한 것인데요, 운남 사람들은 이것을 얇게 포를 떠서 양념한 여러 야채들을 곁들여 먹더군요. 운남은 오래된 중국의 도시와 소수민족들의 삶, 아름다운 자연경관도 있지만 이런 그로테스크한 일상의 풍경이 함께 존재하더군요. 그 풍경을 담고 싶었습니다.”
장지아의 <죽지 않고 살아남기(To Survive the Death)>(2013)는 소가죽 중앙에 ‘죽지 않고 살아남기’라는 제목으로 10가지 질문을 인두질로 쓰고, 주변에 이미지들을 인두질로 드로잉한 작품입니다. 두 해골들 사이의 혀를 따라 걸어가는 사람들, 옷을 벗는 여자와 짐승의 탈을 벗는 여자, 두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간 사람을 중심으로 마치 시계바늘처럼 팔을 들어 무엇인가를 가리키고 있는 사람들, 포옹한 남녀, 기린과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 이미지들은 마치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위장한 것 같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위장을 겉어낸다면, 작가가 관객에게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고통과 쾌락 사이
아름다운 고문과 아름다운 도구II  

류병학 왈, “장지아의 <도축된 소한마리의 피로 만든 벽돌, 오브제>와 <죽지 않고 살아남기>는 일종의 ‘아름다운 고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떻게 고문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그것은 아마 속죄의 방식으로 작업되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를테면 ‘아름다움’과 ‘고문’이라는 이질적인 단어들이 하나의 문구를 이루는 것처럼, ‘아름다운 고문’이 고통과 쾌락 사이에 놓여있기 때문이라고 말이죠.”
장지아의 ‘아름다운 고문’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도구들’ 역시 이질적인 용어들로 접목되어 있습니다. 장지아의 <아름다운 도구들>은 옛 고문기구들을 참조하여 작자가 제작한 ‘고문기구들’입니다. 그러나 이번 가인갤러리에 전시된 장지아의 <아름다운 도구II>(2011)는 실재 고문기구들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름다운 도구II>는 고문기구이면서 동시에 고문기구가 아닙니다. 그것이 고문기구인 것은 그 각각의 도구들에 언급된 텍스트(설명문) 때문이고, 그것이 고문기구가 아닌 것은 19세기 말 중국에서 썼던 외과용 수술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장지아 왈, “<나는 고백한다(I confess)> 개인전 때, 시대별 고문도구에 대한 리서치를 많이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역사 속 사례들 보다 저의 상상력을 훨씬 자극한 것은 치과에서 마취 후 침대에 누워 치료용 도구들을 들여다본 짧은 순간입니다. 지금은 80세를 넘긴 체코의 애니매이션 작가 얀 스반크마이어(Jan Svankmajer)의 작품들을 참 좋아하는데, 어린시절 경험한 공포의 순간에 떠오른 상상력을 작품의 동력으로 사용하시는 분이죠. 저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덧붙여 그 도구들을 직접 보시면 알겠지만 형태가 무척 심플해서 몸의 구조만 알아도 쉽게 상상하고 쓸 수 있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덕적 판단이 개입해 쓰지 못할 뿐이고, 그것이 문제죠.”

뻔하지 않은 엉뚱함이 주는 충돌
상업적인 공간에서 비상업적인 작품으로 맞짱 뜨기

장지아는 그동안 비상업적인 공간에서 전시를 했습니다. 따라서 이번 가인갤러리에서 열리는 장지아 개인전은 첫 상업 갤러리 전시입니다. 비(非)상업적인 작품이 상업적인 공간에서 전시된다는 것은 ‘아름다운 고문’이나 ‘아름다운 도구’처럼 이질적인 것들의 접목인 셈입니다.
장지아 왈, “상업적인 공간에서 가장 상업적이지 않는 것으로 판단되는 '피와 가죽, 고문의 도구들'을 전시하는 것 자체가 흥미롭습니다. 뻔하지 않은 엉뚱함이 주는 충돌과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할 따름입니다.”
장지아는 아웃사이더에서 인사이더로 스스로 ‘경제 플레이어’가 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순수’ 예술과 ‘불순한’ 자본이라는 이율배반을 더 이상 반복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류병학 왈, “미술계 여러분도 알다시피 아티스트들은 세상을 다 아는 체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실상 경제를 잘 모릅니다. 그런데 경제도 잘 모르는 아티스트가 어떻게 관객의 마음을 흔들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장지아는 가장 상업적인 갤러리에서 가장 비상업적인 작품으로 맞짱을 뜨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아티스트는 상업갤러리에서 관객을 관통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미술계만의 리그’는 이제 그만!
관객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도록

류병학 왈, “이번 가인갤러리에서 발행한 장지아 개인전 도록은 신작만 실려 있지 않고 구작, 즉 초기 작품부터 신작까지 전 작품을 망라합니다. 더욱이 상업갤러리 입장에서 구작 앞에 신작을 위치시키는 것이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인갤러리는 장지아의 구작부터 시작하는 편집디자인을 택했습니다. 이 점은 가인갤러리가 무엇보다 관객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중요시하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대한민국 미술관뿐만 아니라 상업갤러리조차 전시회를 기획하면서 미술계를 먼저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미술계의 전시회에는 관객은 없었다고 말입니다. 그런 까닭에 불특정다수인 관객은 미술계의 전시회를 ‘그들만의 리그’로 간주합니다. 따라서 가인갤러리는 무엇보다 관객을 존중하고 가인갤러리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로 전시회를 기획하고자 합니다. 이번 장지아 개인전이 그 첫 시도입니다.


PUBLICATIONS

  • Jia Chang l CHANG jia

    2013. Gaain Gallery
    161 Pages, Full Color Illustrations

    Pric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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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몸에 새겨진 고통과 쾌락의 기호
글. 이선영 I 미술평론

지난 10 여 년간 장지아의 작품을 단순한 전시회가 아닌 돌발적 사건처럼 접해왔는데, 이번 전시의 면모는 일견 차분하다. 그동안 장지아의 작품은 엄청나게 ‘세다’는 선입견 아닌 선입견을 가지게 된 필자는 이번에는 또 어떤 일을 저질렀을까 하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전시에 가보니 심플한 좌대 위를 이불 또는 탁자보처럼 덮은 통가죽, 붉은 벽돌, 낡은 수술기구 등이 전부여서 썰렁한 기운마저 돌았다. 서서 오줌 누는 여자(2007년 ‘omerta;침묵의 계율’ 전, 대안공간 루프)나 가학 피학적인 행위가 등장하는 이전의 작품(2004년 ‘where is the center of gravity’전, 아트선재-서울아트시네마, 2011년 ‘I confess’전, 정미소)에 비해 선정적인 면은 없지만, 물질의 형태로 그 강도와 섬세함을 보존한다. 작품을 만들기 위해 통과했을 고통과 열락의 시간은 차갑게 물질화된 채로 해동을 기다린다. 장지아의 작품은 강렬하지만 억지스럽지 않고, 예술적 승화에 연연하지 않지만 그가 구사하는 언어는 정교하다. 유기체 특유의 항상성을 죽어서도 유지하면서 그 표면에 이미지를 새기는 것에 강한 저항을 보여주는 가죽, 피나 피 같은 붉은 색을 칠한 것이 아니라 피 자체를 머금고 있는 것 같은 기이한 사물들, 이국의 벼룩시장에서 발견한 물건에 색다른 사물의 질서를 부여한 언어적 상상력 등이 그러하다. 필자가 작가를 접해 본 경험으로 보자면, 장지아의 작품의 세기는 유별난 엽기 취향이 아니라, 인간적 천진함과 작업에 대한 집요한 성실성에서 오는 것 같다. 천진함과 성실함이 결합되면 두려울 게 없다. 요컨대 앞뒤를 계산하지 않고 끝까지 가보려는 맹목적 자세는 자신도 모르게 금기들에 접근하게 한다.
장지아의 전시들의 부산물이었던 선정성은 금기와 그 위반의 게임과 관련된다. 여기에서 몸은 금기의 한 가운데에 있다. 몸은 정상과 이상이 판별되는 가장 근본적인 경계이다. 몸이라는 가장 민감한 경계의 위반은 자잘한 상처로부터 죽음에 이르는 진폭을 가진다. 그러나 어떤 한계를 돌파하는 것은 고통과 죽음 뿐 아니라, 열락과 초월도 가져온다. 그것은 비천함과 숭고를 오고간다. 금기를 위반하는 폭력을 성스러움으로 간주하는 위반의 철학자들은 예술을 종교의 후예로 자리매김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금기와 그 위반이라는 사건이 어둡고 쇠락한 기운으로만 가득하다면 우리는 그것에 그렇게 매혹되지 않을 것이다. 금기라는 한계를 넘어 절대를 향해 질주하려는 본능은 그 분출구를 찾는데, 장지아의 작품에 꾸준히 등장해 온 몸은 그 전쟁터가 된다. 가죽과 피, 그리고 금속 용구 같은 소재가 등장하는 이번 전시에서 몸은 부재하면서도 현존한다. 날카로운 금속은 내장과 살을 보호하는 피부를 뚫고 붉은 체액을 바깥으로 유출시킬 것이다. 화공약품과 살지지는 냄새를 맡으면서 가죽위에 인두질 드로잉을 하는 행위, 도대체 저것들로 무슨 수술을 했을까 싶은 야릇한 금속 도구들은 유기체의 고통과 죽음을 연상시키지만, 그 결과물은 시각적 쾌감을 주는 예술작품이자 치유이다. 금속과 살의 접합은 사도매저키즘같은 일탈적인 성적 관행에서, 일상적으로는 피어싱이나 문신 같은 하위문화의 장식에서 유희적, 쾌락적으로 등장한다. 장지아의 작품에서 고통과 쾌락이 교차하는 지점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이 전시를 계기로 장지아론을 집필한 류병학이 말하듯이 ‘누군가의 고통은 누군가의 쾌락’이다.
소한마리의 가죽이 통째로 등장하는 작품 위에 새겨진 것은 한 무리의 젊은 작가들이 중국 오지를 돌아다니는 한가로운 풍경이다. 예술작품을 비롯한 인간의 어떤 필요를 위해 벗겨진 피부 위에는 이국적 문화와 자연을 즐기는 인간들이 그림지도처럼 새겨져 있다. 작가는 중국의 운남 지역에서 고택의 처마 밑에 살 껍질을 벗겨진 채 통째로 매달린 인체 크기의 고깃덩어리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보존된 이 단백질 공급원은 가축의 도살이나 가공이 금지된 곳에서 행해지는 현대적 방식과는 낯설다. 고즈녘한 동양적 풍경과 중첩된 거대한 고깃덩어리는 은폐된 삶의 진실을 불현 듯 드러낸다. 삶을 위해 희생된 유기체의 고통은 작업의 고통으로 이어진다. 큰 작품의 경우 인두로 한땀한땀 수를 놓듯이 하루 10시간 넘게 꼬박 3개월을 바쳤다. 부담 없는 드로잉 같지만, 거의 조각에 가까운 작업이다. 살타는 냄새가 진동하는 인두질 작업은 울룩불룩 우는 가죽만큼이나 작가의 손발을 오그라들게 했을 것이다. 작업 과정은 그 자체로 고통스러운 각인의 방식을 연상시킨다. 그것은 기억과 고통의 인과 관계를 다룬다. 위반의 철학자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어떻게 해서 인간이라는 동물에게 기억이 심어질 수 있을까를 묻는다. 그에 의하면 어떤 것이 기억에 남으려면 그것은 달구어져야 한다. 부단히 고통을 주는 것만이 기억에 남는다. 니체는 인간에게 기억을 새겨야 할 필요가 있을 때 피와 고문, 그리고 희생 없이는 불가능함을 강조한다. 모든 종교적 의례의 가장 잔인한 절차는 고통이야말로 기억술에 가장 도움이 된다는 점을 이용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억의 덕택으로 사람들은 마침내 이성에 도달했다.
이러한 니체의 음울한 결론은 인간의 이성이 신의 가호나 계몽화 된 개인들 간의 사회계약이 아니라, 수많은 피와 잔혹의 결과임을 알려준다. 헤이든 화이트는 [19세기의 역사적 상상력]에서 니체의 역사관이 미래의 세계를 지배할 운명에 있는 강자와 약자로 구분된 세계임을 밝힌다. 헤이든 화이트의 니체에 대한 독법에 의하면, 타자에게 권력을 행사하는데서 오는 즐거움은 가학적인데, 부유해진 사회는 가학적 쾌락을 교환가치를 지닌 상품으로 전환시켰다. 주어진 것이든 받아들인 것이든 고통은 비축되고 입안되고 과세되고 국가화 되고 사회화할 수 있게 된다. 요컨대 고통이 자본화된다. 모든 자본화된 현실에는 고통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는 삶이란 그 근본기능에 있어서 침해, 공격, 착취, 파괴를 통해서 움직이는 것이며, 항상 다수의 약한 권력을 희생시킴으로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민주주의와 이성, 역사와 진보에 대항하여 권력에의 의지를 주장하는 니체의 사상은 반동적이고 퇴폐적이라고 낙인찍혔지만, 인간의 삶에 그러한 어두운 구석이 있음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평소에 동물실험이나 학대 등에 열렬히 반대하는 장지아가 절대 그러한 불온한 사상에 물들어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약육강식에 기반 하는 정글 같은 이 자본주의 사회가 니체주의적이라는 현실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근대적 진보가 의심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가장 먼저 복권된 철학자가 니체였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야생적 현실을 오성이나 이성의 매개 없이 날것으로 표현하려는 이들에게 니체의 울림은 거대하다. 타자의 희생이 암시된 의례적 요소, 그것이 암시하는 폭력과 성스러움, 고통과 쾌락의 동시적인 분출은 초창기 작품부터 지금까지 면면히 흐른다.
다른 가죽 작업에는 피눈물을 흘리는 자화상, 가혹한 예술노동에 시달렸을 손, 누군가의 섭식의 대상이 된 유기체, ‘죽지 않고 살아남기’에 대한 작가 나름의 해법과 강령, 해골끼리 혀를 교환하는 장면 등이 보인다. 이미지들은 마치 꿈이나 무의식처럼 뚜렷한 인과관계 없이 띄엄띄엄 새겨져 있지만, 그것들은 재료의 강한 저항을 이겨낸 가혹한 산물이며 그 모두 인간의 삶을 울고 웃게 하는 사랑, 죽음, 광기, 예술, 욕망과 밀접한 도상이다. 그것들은 살과 피를 연상시키는 재료와 하나가 된다. 그러나 장지아는 이러한 비합리적이고 무거운 주제를 그만의 방식으로 경감시킨다. 작가는 가벼움에서 무거움을, 무거움에서 가벼움을 길어 올린다. [아름다운 도구 시리즈]는 북경의 벼룩 시장에서 발견한 물건이다. 기능적 물건에 새겨진 장식은 유물 같은 면모를 드러낸다. 외과용 수술 도구에 작가가 멋대로 붙인 해설은 수상쩍은 치료보다는 고문에 방점이 찍혀있다. 그것은 2011년 ‘I confess’ 전에 나온 가학피학적인 도구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소한마리를 도축하여 받은 피로 거칠게 만든 벽돌이나 아이가 대충 만든 듯한 어수룩한 사물들은 바로 이렇게 생긴 작품을 만들기 위한 그 모든 피비린내 나는 노력을 가벼운 농담처럼 만든다. 살아있는 피를 그대로 머금고 있는 사물-예술은 기괴하다. 원래 소피는 석고랑 만나면 분홍이 아니라 회색으로, 산소와 만나면 검붉게 변한다. 정육점에 진열된 붉은 살코기는 살이 아니라 피의 색이다. 고기는 실은 피의 맛이다. 전시 오프닝 날 붉은 색 일색으로 나온 음식물은 오감에 호소해온 장지아 작업의 스타일을 알려주는 에피소드이다. 소소한 형태로 만들어진 사물엔 희생된 생명의 기운이 담겨있다. 이 작업을 할 당시 작가는 피를 쏟으며 탈진한 상태였지만, 그 시기에 그 작업을 해야 할 필연성이 있었기에 작업은 냉혹하게 진행되었다. 그 순간에 자신만이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바로 그 필연성이 예술 및 예술가를 잔혹한 운명에 몰아넣는다. 


Text. Lee Sun-young I Art Critic
Translation. Jawoon Kim

My experience of Jia Chang’s work for the last decade or so can be characterized not as a mere viewing of art exhibitions but as coming upon some kind of unexpected accidents. Yet this show is at a glance of calmness. I had had some sort of preconceptions about Chang’s work that ‘extremely intense and provocative’ were the appropriate adjectives to describe her work. Hence I was quite curious about what the artist would have done this time . In actuality, however, my first impression of the show was that it was relatively plain and flat since it consisted only of sheets of animal skin covering simple pedestals like comforters or tablecloths, red bricks and worn-out surgical instruments. Compared to Standing Up Peeing(Omerta: Commandment of Silence, 2007, Alt Space Loop) or other previous works in which sadomasochistic actions were expressed (Where Is the Center of Gravity, 2004, Art Sonje-Seoul Art Cinema; I Confess, 2011, Gallery Jungmiso), her works shown at this exhibition maintain as much intensity and delicateness in the form of material despite it lacks the provocativeness. Hours of pain and ecstasy, which the artist went through during the production of the works, have undergone icy materialization and are now waiting to be thawed. Chang’s works are intense, yet not stubborn. They concern little with artistic sublimation, yet her creative language is quite elaborate: the animal skin seems to continue to maintain such homeostasis unique to organisms even in death and its surface harbors strong antagonism against being inscribed with some images; bizarre objects that seem to be wet with blood itself, not be painted with blood or bloody red pigments; her linguistic imagination through which artifacts found at flea markets in foreign countries are endowed with unfamiliar orders. According to my experience with the artist’s personality, the intensity of Chang’s art seems to originate not from some peculiar abject taste but from her innocent mind and tenacious devotion to her artistic work. Nothing beats the marriage between innocence and sincerity. In short, a blind attitude to go all the way without reflecting on the circumstances tends to arrive at the door of taboos.
The element of provocativeness, which had been the byproduct of Chang’s exhibitions, is related to the game of violating taboos. Here the body is in the crux of the taboo. The body is the most fundamental boundary that demarcates the line between normal and abnormal. The breaking of the most sensitive boundary of the body results in a broad spectrum of outcomes from a minor trivial injury to death. But breaking through a certain limitation brings about not only pain and death but ecstasy and transcendence as well. It fluctuates between lowliness and sublimity. The philosophers of violation, who regard taboos and the violence of violating them as sacred, do not hesitate to establish art as the offspring of religion. But if taboos and the incidents of breaking them are thought as only dark and dreary entities, one is unlikely to be fascinated by them. The instinct to transcend the limitations of taboos to seek after the absolute finds its outlet, and the body, which has constantly appeared in the work of Chang becomes its battleground. In this exhibition where the works use the materials such as leather, blood and metal equipments, the body is both absent and present. Sharp metal objects will penetrate the skin, which protect internal organs and flesh, to discharge red bodily fluids. One is reminded of the pain and death of an organism by the act of drawing on the surface of leather with a hot iron while being exposed to the stenches of chemicals and burning flesh and by the unfamiliar metal apparatuses of which one can only wonder what operations require them. Nevertheless, the outcomes are artworks of visual pleasure and have healing effects. The combination of metal and flesh is suggestive of playfulness and hedonism in the deviant sexual practices such as sadomasochism and in such subcultural practices as piercing and tattooing. There are a considerable number of points where pain and pleasure cross each other in Chang’s work. To borrow the words of Ryu Byung-hak who formulated a theory of Chang Jia on the occasion of this show, “one’s pain is another’s pleasure.”
What is inscribed on the surface of her work made of the whole skin of a cow is an idyllic scene of a group of young artists travelling around the remote areas of China. On the skin flayed for certain human needs including making a work of art are depicted human beings enjoying the exotic cultures and nature as in a pictorial map. The artist’s mind was bent by a human body-sized chunk of meat hanging from the eaves of an old house in Yunnan, China. This protein source preserved in the traditional manner looks different from that done at secluded slaughter houses where livestock is butchered and processed using modern methods. This huge hunk of meat placed against a peaceful landscape lays bare the concealed truth of life. The pain of an organism sacrificed for human life is inherited to the artist in making the work. In the case of a large piece, it took the artist as long as three straight months to produce it. She embroidered the images with an iron for over ten hours a day. It appears to have required no great labor, but it needed as much labor as the making of a sculpture would demand. The searing must have filled the studio with the stink of burning flesh, and it is beyond doubt that the artist’s mind was suffocating as the scalding iron made puckers in the leather. The production process of the work itself reminds one of agonizing branding. It deals with the causal relationship between memory and pain. In his Genealogy of Morals, Nietzsche, who is known as a philosopher of violation, asked how memory could be implanted in the mind of the animal called the human being. According to him, in order for something to remain in one’s memory, that something has to be burned in. What never ceases to cause pain in one’s mind can stay in his or her memory. Nietzsche emphasized that to inscribe memory in the human mind necessitates blood, torture and sacrifice. The cruelest procedure of every religious ritual takes advantage of the fact that pain is most useful in the art of memory. And thanks to such nature of memory, people have finally succeeded in obtaining rationality.
This dismal conclusion of Nietzsche informs that human rationality is neither of God’s blessing nor of the social contract between enlightened individuals but the achievement attained at the cost of bloodsheds and cruelties. In The Historical Imagination of Nineteenth-Century Europe, Hayden White posits that the historical view of Nietzsche is based on the notion of the world whose people are divided into the strong who is destined to rule it and the weak. According to White’s reading of Nietzsche, the pleasure in exercising power upon the other is sadistic in nature and in the rich society sadistic pleasure has converted sadistic pleasure into a commodity of exchangeable value. Regardless whether it is given or accepted, pain is stored, is drawn up, is taxed, is nationalized and is socialized. In brief, pain is capitalized. Every capitalized reality is inscribed with pain. In Genealogy of Morals, Nietzsche writes that life operates, in its basic function, through disturbance, attack, exploitation and destruction and that it is always sustained through the sacrifice of the weak power of the majority. Nietzsche gave priority to the will to power over democracy, rationality, history and progress, and such ideas of Nietzsche have been branded as reactionary and decadent. But it is obvious that no one can deny that the life of every human being is tainted with such dark stains. Chang has been fiercely opposed to animal testing or animal abuse and thus I do not believe that she is infected with such disquieting ideas. Nonetheless, no one can ditch the reality that this jungle-like capitalist society is Nietzscheanistic. It is not coincidental that it was Nietzsche who was the first to be reinstated in the postmodern era during which the modern concept of progress has been questioned. For those who attempt to express the raw and wild reality without the mediation of understanding or reason, the thoughts of Nietzsche are heart-throbbing. What has been coherently inquired into in Chang’s art from the early years until now are the ritualistic elements suggestive of the sacrifice of the other, the violence and sacredness entailed by them, and the simultaneous releases of pain and pleasure.
What are shown in another leather work of Chang in this show are a self-portrait shedding tears of blood, hands on which severe artistic labor inflicted, an organism that have become someone’s food, the artist’s own solutions and doctrines of ‘surviving the death’, and a scene where skeletons are tongue kissing. These images seem to show no distinct connection among them as if in dreams or unconscious minds. Yet they are the products of brutality that have conquered the obstinate resistance of the material and function as icons intimately related to love, death, madness, art and desire, all of which determine one’s joy and sadness. They have become one with the material, which reminds one of flesh and blood. Yet Chang lightens up these irrational and heavy subjects in her own ways. The artist extracts the heavy from the light and vice versa. Beautiful Instrumentsconsists of objects that the artist found at a flea market in Beijing. The ornamental designs of those practical objects give them the appearance of relics. The artist’s random comments about surgical equipments are more focused on the act of torturing than some sort of suspicious surgical operations. The work is in the same context of the sadomasochistic tools shown at I Confessin 2011. The slipshodness of the bricks for which the blood of a slaughtered cow is used and the sloppiness of the objects to the extent that they look as if a child made them, eradicate the seriousness that can be plausibly associated with all the bloody endeavors that the artist carried out for the very production of those crude artifacts. The word to describe the object-art preserving living blood is nothing but grotesque. Cattle blood should turn grey, not pink, when it meets plaster and blackish red when it does oxygen. The red color of meat in the display case at a butcher shop is the color of blood, not of flesh. What gives meat its flavor is its blood. At the opening reception of the show, all the food was red in color. It was an episode that epitomized the style of Chang who has been appealing to one’s five senses. Her artifacts in unsophisticated forms contain the force of the lives of those creatures sacrificed. During the making of the works the artist endured excruciating labor. She even coughed up blood. But she felt the necessity that the work needed to be done at that very moment, and that forced her to carry on. The very need that can and should be done by only him or her at a certain moment pushes both art and the artist into merciless destinies.